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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99화 (299/350)

299화

우리는 곧 귀빈을 위한 거처로 안내받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범한 마을에 무인들이 일시적으로 주둔하고 있는 거라 거창하고 화려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픈 사람을 눕히고 필요한 처치를 할 정도의 너비와 깔끔함은 준비되어 있었다.

습하고 벌레가 많은 밀림 한복판에서 이런 공간을 마련하는 건 쉽지 않으니 나름 귀빈 숙소라고 할 만한 것이다.

나름 깨끗한 침구를 펼치고 그 위에 신생을 눕혔다. 맥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지하 실험실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는 안정적이었다.

“약을 달이실 거지요? 가서 불부터 피워놓겠습니다.”

“이봐, 조련사. 가서 물을 달라고 하자고. 마실 수 있는 물이어야 해.”

“아까 약을 준다고 하던데 뭘 받아오면 될까요?”

곽 표두와 표사들도 의원 밥을 먹은 지 한 해가 넘다 보니 대충 뭐가 필요한지는 말을 안 해도 알았다.

피를 뽑거나 생체 샘플을 적출한 상처들을 치료하고 나자 일 공자가 보낸 약이 도착했다.

상질의 금창약과 내상에 복용하는 약, 그리고 도움이 될 거라며 보낸 최상급 약재 한 묶음이었다.

다행히 신생의 상태에 쓸 만한 것들이 있어 처치를 하고 방을 나서자 벌써 중천에 뜬 태양이 뙤약볕을 내리쬐었다.

방 안은 약재를 끓여 훈증치료를 시작했고 이대로 안정을 취하면 신생의 상태는 회복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가주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는 건 아니었다.

많이 자랐다고는 해도 아직 한참이나 어린 아이인데, 그런 어린애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개방의 방주 도개걸도 학대에 가까운 수련을 시키긴 했지만 당가주가 가한 행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보통의 아이였다면 그 가혹한 고통에 벌써 숨이 멎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당한 혹독한 수련이 아니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테니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본인이 그 정도는 견딜 수 있다고 여겼기에 무 대신 자청한 것이었을 터.

아직 명랑하게 뛰어놀아도 모자랄 나이에…….

“금 의원님. 일 공자님께서 금 의원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당가주에 대한 분노를 삼키고 있을 때 남해의 무인이 달려와 나를 불렀다. 나는 한 번 깊게 심호흡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라고 하는 겁니까?”

당당을 가둔 일 때문에 썩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무의 증언이 있으니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만, 당장 신생이 당한 일을 보고도 당당을 인질로 내준 것이 속이 쓰렸다.

“궁주께서 오셨습니다.”

이제야 왔군.

당당이 나를 믿는다고 했을 때, 나는 당당을 구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모색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내 패를 꺼낼 만한 상대가 와야 시작할 수 있었다.

“궁주를 만나러 다녀올 테니, 신생을 부탁합니다.”

“걱정 말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곽 표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배웅했다.

나는 조련사를 데리고 남해의 무인을 따라 발을 옮겼다.

아까 일 공자를 만났던 곳으로 향하는데 벌써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여기저기 흩어져 나른하게 누워 있던 맹수들이 벌떡 일어나 모여 있었고 맹금류들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음과 함께 원형을 그리며 하늘을 날았다.

짐승들이 이러한데 남해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궁주님이십니다.”

남해태양궁의 궁주는 그 끝에 놓인 단상에 앉아 있었다.

호피로 된 소파 같은 푹신한 의자에 앉았나 했는데, 잘 보니 의자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저건?”

“저거가 아닙니다. 남해의 수호신, 천랑호표입니다. 말조심하십시오.”

그랬다.

내가 호피의자라고 착각한 것은 사실 의자가 아니라 짐승이었다. 성인 남성이 기대앉아도 충분할 만한 덩치를 가진 거대한 맹수.

“네가 막내를 데려왔다는 놈이더냐?”

그 맹수를 기대고 앉은 또 다른 맹수가 물었다. 살벌한 중원어였다.

남해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신체에 맹수처럼 번뜩이는 눈은 그가 왜 남해의 지배자인지, 천하오강을 꼽으라 하면 무조건 한 자리는 차지한다고 하는지 설명해주었다.

눈빛에 내공을 담은 것처럼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꿀꺽.

나는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북돋우면서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평소라면 이 정도까지 할 필욘 없지만 당가주의 계략에 한 방 먹은 상태라 몸이 말이 아니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어디 들어가 며칠 요양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내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고 당가 막내 놈이랑 같이 왔다고.”

“네, 맞습니다. 금태양이라 합니다.”

내가 긍정하자 궁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령했다.

“고얀 놈! 어디서 당가 놈의 사주를 받고 수작질이냐!”

내공을 담은 외침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이게 바로 천하오강 중 한 명인가?

별호가 ‘태양왕’이라고 하기에 참 과한 칭호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좌수검을 댄다 해도 이자 앞에서는 결코 쉽지 않을 거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궁주의 서슬 퍼런 기세 앞에서 아니라고, 오해라고 해명하는 건 소용이 없어 보였다.

이런 강자들은 자신 앞에서 혓바닥이 길어지거나 비위를 맞춰 제 얘기를 하려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해는 맹우의 예를 잊었는가!”

똑같이 되돌려주는 수밖에.

성치 않은 몸으로 내공을 실어 외치자 목에 무리가 갔는지 피 섞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꾹 참고 그 기침을 삼켰다. 입에서 쇠 맛이 났다.

“맹우의 예라니, 그 무슨―.”

“십오 년 전, 장강을 거슬러 재해와 가뭄으로 굶주린 남해에 은혜를 베풀었던 맹우의 아들을 몰라보고 의심하다니. 남해의 협이 다했음을 이제 알겠다. 태양왕은 백여 년 전의 은혜도 잊지 않는다 들었는데 아버지의 착각이었군.”

“……잠깐. 네 녀석, 금왕의 아들이더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품에서 태양보도를 꺼내들었다.

“대답은 이걸로 대신하지.”

그리고는 칼집째 궁주에게 던졌다. 그는 태양보도를 받아들고 뽑아들더니 이내 유심히 살폈다.

“맞군. 남해의 최상등급 태양석이다. 남해와 깊은 인연을 가진 이들이 아니고서야 이것을 외지인에게 내어주진 않지.”

궁주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사실 아버지가 그때 했던 일은 자선사업이 아니었다. 금왕상단은 그 이후 십여 년간 남해에서 나는 특산물을 독점했으니까. 궁주도 그 사실을 알기에 반응이 저렇듯 미묘한 걸 거다.

하지만 외지인이 갖고 있는 태양석이 남해에 그만한 의미가 있다는 건 다르지 않다.

당장 궁주 옆에 있는 일 공자나 다른 남해 무인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금왕의 아들 중 너만 한 나이 대의 녀석이 없을 터인데. 설마 그 병약하다던 막내인가?”

결국 궁주의 시선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갔다.

“맞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신 금가장의 주인, 금태양이라고 합니다.”

“신 금가장이라…….”

그리고 나는 내가 어떻게 무를 데리고 있게 되었는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얘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당당의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내돌려져 중원을 떠돌다 태양의원에 정착한 후, 무가 구출되어 왔을 때, 동물과 잘 통한다는 사실 때문에 중원어도 익히지 못한 무를 당당이 얼마나 잘 챙겨줬는지도 강조했다.

내 얘기가 끝난 후, 주변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궁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내가 아니었으면 무는 절대 남해로 돌아오지 못했을 테니까.

“얘기는 잘 들었다.”

“그렇다면 당당을 풀―.”

“하지만 당가의 직계는 놓아줄 수 없다.”

“궁주!”

“맹우의 아들, 너라면 그럴 수 있겠느냐? 놈들은 내 아들을 훔쳤고, 남해의 보물을 훔쳤으며, 내 형제자매들과 그 아이들까지 납치해 중원으로 팔아치웠다. 그래놓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화평을 청했다!”

“돌아왔잖습니까!”

“돌아온 건 내 아들 하나뿐이다!”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남해의 무인 몇 명이 가까스로 울분을 참고 있었다.

“우리는 잃은 것이 너무 많다. 또한 오래 참았다. 나의 형제자매들은 서로를 위해 참고 또 참았다. 이제는 참을 수 없다.”

궁주가 허리춤의 곡도를 뽑아들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발도술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당가의 직계들이야말로 앞장서서 내 가족들을 납치하던 놈들이다. 이들 앞에서 당가의 핏줄을 참하지 못한다면 내가 어찌 이들의 주인이겠는가?”

“직계라면, 당랑이나 당철을 말하는 겁니까? 그럼 그들을 베면 되지 않겠습니까?”

궁주는 고개를 돌리고 무어라 남해말로 외쳤다. 그러자 남해 무인들 일부가 우르르 어디론가 달려갔다. 조련사가 창백한 얼굴로 내게 속삭였다.

“당 소협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지금 바로 해치우겠다고, 맹수들의 먹이로 주겠다고―.”

아버지와의 인연을 언급한 것도, 무를 구해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 것도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계획한 수단이 없다.

녀석은 나를 믿는다고 했는데.

적의 시체를 포식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는지 맹수들이 기분 좋은 투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소란 때문인지 궁주가 기대 있던 거대한 몸집의 맹수, 천랑호표가 눈을 떴다.

……젠장, 뭐라도 해보자.

“호랑이 신랑으로 삼으십시오!”

“뭐?”

“남해에는 호랑이 신랑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천랑호표가 사람을 신랑 삼는다고요. 당당을 신랑으로 삼으십시오. 당가의 핏줄을 신수의 짝으로 맺어주면 당가가 남해의 발아래 들어간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먹힐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아하?”

궁주는 웬 헛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까의 날 선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일단 화제를 돌리기라도 하면 어떻게든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성도 놈들이 어린애들 겁주려고 천랑호표를 써먹는단 애길 듣긴 했다만. 그걸 진심으로 믿는 거냐?”

“진짜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당가를 맹수의 이빨로 물어뜯으시고, 그 직계를 호랑이 신랑이라는 이름의 인질로 삼으십시오. 그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궁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말입니다.”

무는 어리다. 아버지의 정치적 결단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그 말을 돌려 말하자 궁주가 침음을 삼켰다.

“불가하다.”

“궁주!”

“천랑호표는 신수다. 그런 일은 신수의 이름을 더럽히는―.”

그때.

천랑호표가 몸을 일으키며 울었다.

늑대인지, 호랑이인지, 아니면 사자인지 모를 울음소리.

그 소리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궁주는 천랑호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당황한 눈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천랑호표를 쓰다듬었다.

뭐지? 저 신수에게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천랑호표는 아랑곳 않고 발을 옮겼다.

네 발을 옮겨,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핥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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