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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98화 (298/350)

298화

“그래. 무 덕분에 내가, 우리가 살았다.”

나는 기력을 짜내어 무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무가 잇몸까지 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건 단순히 남에게 도움이 되어서 짓는 웃음이 아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사람의 미소였다.

내가 처음 홍령을 만나 의술을 펼치고, 인정을 받고, 그 길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지었던 표정을 이 어린 소년이 짓고 있었다.

“추격대가 돌아갔음! 대체 어떻게 한 거임?! 따라잡느라 혼났음!”

“이 속도면 반나절이면 남해의 영역에 도착합니다!”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당당이 전속력으로 달려 다시 합류했고 곽 표두가 조련사와 얘기를 나누며 도착 시간을 가늠했다.

“신생, 조금만 더 견뎌. 알았지?”

신생은 기절한 채 표사의 등에 업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직은 당가의 추격대가 따라붙을 수 있는 거리. 남해의 영역까지는 들어서야 시간을 들여 신생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무는 계속해서 말들을 독려했고, 일행들은 천하제일 금왕표국의 표사들답게 깊은 밤이 되어 어두워진 상황에서도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이끌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려 저 멀리 동쪽 하늘이 밝아져 올 무렵.

우리는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발을 들였다.

“여기부터 남해의 영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휴, 당가에서 추적대가 왔을 땐 여기서 죽나 했는데, 이렇게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다니…….”

나름 길잡이 노릇을 했던 조련사는 숲에 도착하자마자 감격스러운 듯 내뱉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도 않았는데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바람은 습했다. 숲속 그늘은 조금 나았지만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벌레 소리와 스산한 분위기는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런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이 아닌지, 곽 표두와 표사들 또한 반나절의 강행군으로 피곤했을 텐데도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다 왔어. 조금만 더 가자. 응?”

일행 중 가장 어리고 체력이 약한 무는 반쯤 감긴 눈으로 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말들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야? 이제 더 이상 무리인가?”

“으음, 아니. 안 가. 무섭대.”

무가 그 자리에 멈춰선 말을 토닥이며 말했다.

“저기 뭐가 있대.”

고사리 손으로 가리킨 곳은 깊숙한 수풀이었다. 동이 트고 있긴 했지만 볕이 들기에는 어둑한 밀림. 그 속에서 무언가의 안광이 번쩍 빛이 났다.

사람, 아니면 맹수.

혹은 둘 다.

남해태양궁이군.

사실 아까부터 그 기척을 느끼고 있긴 했다. 하지만 상대에게 선공의 의지가 보이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아마도 사람 하나에 맹수 하나, 둘 정도?

척후나 경비겠지. 아무래도 이쪽은 숫자가 많으니까 함부로 덤비거나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정찰을 하는 정도일 거다.

“더 이상 지남철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떡할까요?”

때마침 곽 표두가 곤란함을 토로하며 다가왔다. 수풀이 우거진 밀림에서 지남철, 그러니까 나침반이 고장 났다는 건 큰 위기지만…….

차라리 잘됐다.

“그만 지켜보고 슬슬 나오는 건 어때? 우리의 정체를 추리하려고 한참 그러고 있는 건 서로 손해 같은데.”

우리는 저들에게 낯선 존재다.

당당이 함께 있긴 하지만, 대다수 일행의 옷부터 사천 성도의 유행을 따르지 않았고, 말투도 억양이 달랐다. 사천과 호북은 억양에 차이가 컸으니까, 우리가 먼 곳에서 왔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거다.

눈썰미가 있는 자라면 우리 중 동물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겠지.

거기에 좀 더 아는 것이 많은 자라면, 곽 표두와 표사들이 입고 있는 것이 무복과는 좀 다른, 표행에 최적화된 표행복이라는 것이라든가, 색과 문양이 금왕표국의 상징이라는 것까지 알 수 있겠지.

만약 당당의 정체까지 눈치챘다면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대체 저 혼종은 뭐지? 싶은 기분이 아닐까?

거기에 뜬금없이 내가 말을 걸었으니―

“나는 태양의원의 금태양이다.”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저쪽에서 움찔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우리가 보호하고 있던 남해태양궁의 막내공자를 데려왔다. 우리를 궁주에게 안내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 있던 무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녀석들도 무가 말을 다루는 모습을 봤을 테니 내 말이 마냥 허풍이라고 생각하진 못할 터.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남해의 특색이 강하게 두드러진 얼굴을 가진 무인이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는 살쾡이처럼 생긴 작은 몸집의 짐승 두 마리가 사냥감을 보는 눈으로 말을 노리며 서 있었다.

“위험해. 말에서 내려. 따라와라.”

남해의 무인은 어눌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우리는 순순히 말에서 내려 그를 따라갔다. 조련사도 이 이상은 진창인 곳이 많아 말을 타고 이동하기 힘들 거라고 말했으니까.

그의 조언은 얼마 가지 않아 맞아 떨어졌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길 한복판을 지나갔지만 남해 무인의 발자국을 따라가자 말도 깊이 빠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거기에 그는 맹수의 안내를 따라 이리저리 복잡한 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맞는 길인 건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렇게 한 시진을 꼬박 따라가니 밀림 속 마을이 나타났다.

“지남철이 멀쩡했어도 여기까지 오기는 힘들었을 거 같습니다. 저자를 불러내길 잘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죠.”

마을은 규모가 작았지만 대지가 넓었다. 그리고 그 넓은 대지에는 사람과 짐승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껏 흉흉한 기색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맹수들의 기세에 말들이 기겁을 하려 드는 것을 무가 진땀을 빼며 달래고 있을 때.

우리를 데리고 왔던 무인이 어디론가 뛰어갔다가 이내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중 가운데 선 사람은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형!”

이제 쉬어도 된다며 말들을 다독이던 무가 사람들이 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반가운 얼굴을 하고 뛰쳐나갔다.

“무, 위험해!”

“괜찮으니까 그냥 두세요, 곽 표두.”

곽 표두와 표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무를 막으려 했지만 내가 그들을 제지했다.

우리에게 다가온 이들 중 내가 아는 얼굴.

김진으로서 검을 맞댔던 남해태양궁의 일 공자가 자신에게 뛰어오는 무를 보고 만면에 놀라움과 기쁨을 떠올리는 걸 봤으니까.

“다행히 무를 알아보는군요.”

무가 납치되어 태양의원에서 지낸 지도 벌써 일 년가량.

사실 저 나이 때 일 년이면 워낙 쑥쑥 자라서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위기의 순간 말들을 각성시키며 남해태양궁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무가 먼저 일 공자를 알아보았고, 일 공자도 자신의 막내동생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남해의 언어로 재회의 감격을 나누었다.

나는 그들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일 공자도 그런 나를 보고 무를 내려놓더니 내 앞으로 왔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내 동생을 돌보다가 데려왔다고.”

생각보다 유창하고 예의 바른 중원어였다. 덕분에 통역을 낄 필요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

“네. 우연히 기회가 되어 그렇게 됐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천천히 하고, 일행 중 하나가 많이 아파서 쉴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무가 슬픈 표정을 짓고 남해의 언어로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일 공자가 깜짝 놀랐다.

“내 동생을 대신해 고초를 겪었다니. 알았습니다. 약과 치료사도 내어드리죠.”

“제가 의원이니 치료사는 괜찮습니다. 약은 부탁드립니다.”

사정이야 천천히 설명하면 되는 거고, 거기에 무가 기억을 되찾았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당장 급한 건 몇 번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까무룩 잠이 든 신생이었다. 내단이 효과가 있어 급한 위기는 넘겼지만 빨리 눕혀서 안정을 취하게 하고 싶었다.

“이자를 따라가세요. 부족하지만 중원어를 익혔으니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일 공자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의 시선은 우리 일행 중 한 명, 당당에게 꽂혀 있었다.

“저자는 안 됩니다.”

“제 일행입니다.”

“누군지 압니다. 당가의 아들. 약속을 어겼습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당장 죽여도 시원찮습니다!”

친근했던 일 공자의 눈빛이 변하며 허리춤의 곡도가 소리 없이 뽑혀 나왔다.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빛이 반사된 그 검은 복수의 핏값을 받아내려는 듯 번들거렸다.

그의 격노에 주변의 분위기도 급변했다. 중원어를 아는 이들이 주변에 일 공자의 말을 통역하고 있었다. 몇몇은 반쯤 검을 뽑았고 몇몇은 자신이 다루는 맹수의 목줄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당가주가 한 짓입니다. 당가주는 우리를 억류했지만 당당은 우릴 도와줬어요. 녀석은 내 친굽니다. 무의 친구이기도 하고요. 당신 동생한테 물어보면 알 겁니다!”

무는 당당을 죽여야 한단 일 공자의 말에 울듯이 악을 썼다. 일 공자는 머리가 아픈 듯 얼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그날 독에 당한 친구들과 죽은 무인들의 넋을 달래야 합니다.”

“일 공자!”

“하지만 겨우 살아 돌아온 내 동생이, 당가의 직계를 좋은 친구라고 말한다면…….”

그는 눈을 꾹 감고 깊게 한숨을 내쉰 후 곡도를 내렸다.

“당장 베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손님으로 대접할 수는 없습니다. 가둘 겁니다.”

“당당은 손님으로서 여기 왔습니다. 녀석이 아니었으면 무를 절대 여기까지 데려올 수 없었을―.”

“그만. 난 괜찮음.”

그때 가만히 물러나 있던 당당이 앞으로 나오며 끼어들었다.

“어차피 여기로 오면서 그 정도는 각오함. 당장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잖음? 인질이 되겠음.”

“안 돼. 너도 여기까지 오면서 무리했잖아. 인질 대우를 받으면 악화될 수도 있어.”

당당도 여기까지 오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두건을 쓴 채 추격대의 발목을 붙잡고 일부를 혼자서 따돌린 건 당당이었다.

당가의 암기와 독, 추격술에 대해 잘 아는 당당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

녀석이 아니었으면 우리 중 일부는 그들의 독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신생은 당당이 챙겨온 해독약이 아니었다면 영단도 효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녀석을 인질로 내어준다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면서 나를 택한 친구를?

“그 정도는 알아서 치료할 수 있음. 너한테 많이 배웠으니까.”

당당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가 녀석에게 했던 것처럼.

“난 널 믿음.”

당당은 그렇게 말하고는 일 공자 앞에 걸어갔다. 그리고는 제법 그럴싸한 남해어로 일 공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 뜻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 공자도 당가의 직계가 남해어를 할 줄은 몰랐는지 일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사나운 얼굴로 당당을 쏘아보며 손을 들었다.

남해의 무인들 몇 명이 밧줄을 들고 우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당당의 손과 발을 묶었다. 보통의 밧줄이 아니라 짐승의 털로 만든 것 같았다.

“천랑호표라는 신수의 털로 꼰 밧줄 같습니다. 그 강도가 천잠사에 버금갈 정도라 웬만한 고수도 끊을 수 없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저게 진짜로 있군요.”

곽 표두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내게 작게 속삭였다. 표행에선 밧줄이 자주 쓰이니 어디선가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당당은 그런 밧줄에 묶인 채 남해의 무인들에게 끌려갔다. 무는 울면서 당당을 따라가려다 일 공자에게 붙들렸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녀석은 날 믿는다 했다.

“귀빈들은 이쪽으로.”

여기서 소란스럽게 떠들어서 억지를 부리고 앞으로의 일을 꼬는 게 아니라, 훨씬 자연스럽고 내게 유리한 방식으로 녀석을 구해줄 거라고 믿는 거다.

“알겠습니다. ……가자.”

그렇다면, 그 믿음에 보답하는 것이 친구겠지.

조금만 기다려라.

네 믿음대로 널 구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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