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나는 그곳이 어디일지 가늠하며 당가주를 따라 발을 옮겼다.
당랑의 표현을 떠올려보면 그곳은 지하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닐 것이다.
당당은 당가타에 지하 탈출시설 몇 곳이 있다며 그곳과 연결된 곳이 아니겠냐 추측했다. 전부 한 시진은 걸어야 하는 곳에 있고, 그곳에 식사 등 시설이 완비되어 있다면 우리가 여태 못 찾은 것도 아귀가 맞지 않냐 물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반대였다.
그렇게 먼 곳이라면 반드시 당가주가 당랑 등의 감각을 완전히 마비시켜 데려갔을 리 없다.
오히려 너무 가까우니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자면.
톡톡, 톡톡, 톡톡.
내가 앉아 있는 이 가주실 밑이라든가.
“뭐 불편한 것이라도 있소이까? 식사가 입에 맞지 않는다든가.”
당가주와 시답잖은 인사를 나누고(물론 금태양이 아닌 김진의 스타일로. 이런 상황만 아니면 자식뻘 고수의 건방짐을 애써 참으려는 당가주의 태도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간단하게 술과 안주를 들인 참이었다.
내가 술과 음식은 거들떠도 안 보고 바닥에 신경을 쓰며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자 당가주가 물었다.
“사천 음식은 맵고 짜고, 입에 안 맞아. 구미가 당기지 않는군.”
“허허, 본인이 큰 실수를 했구려. 다시 담백한 중원 음식을 만들어 오라고 일러야겠소이다.”
“그런 건 됐고. 구미가 당기는 얘기를 좀 해보지. 여기 오면 재밌는 상대와 싸울 수 있다던데?”
내가 다른 데 관심 있다는 걸 들켰을까? 하지만 나의 화제 전환에 당가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소협도 소문을 들었을 것이오. 곧 잔악무도한 남해태양궁의 야수와 무인들이 이곳 당가타를 침범할 거요.”
“아아, 그 녀석들. 별거 아니던데.”
“그날 소협이 상대한 이는 남해태양궁의 일 공자로, 아직 완숙한 무인이라 하기에는 어린 감이 있지.”
“나이야 내 또래로 보이긴 하더만. 우리 당가주께서는 왜 그런 어린 놈한테 고전을 하셨을까나?”
“하하. 김 소협을 낮춰 보는 말이 아니었소이다. 아무렴 실력에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자, 한잔 드시오.”
말꼬리를 잡으며 기분 나쁜 기색을 띠자 당가주가 진땀을 뺐다. 나는 그윽한 주향을 맡으며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래, 그땐 더 강한 놈이 오는 건가?”
“남해태양궁의 궁주는 중원의 고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상대요. 하물며 그가 부리는 맹수는 남해의 신수라 불리는 존재지. 우리의 독이 듣지 않는 것은 물론, 가죽은 강기가 듣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그 이빨은 검기를 씹어먹을 수 있소이다.”
“과장이 심한데.”
“한평생 남해와 영역을 맞대고 살아온 나의 말이 과장 같으시오?”
당가주가 쓰게 웃었다.
“믿든 말든 그것은 소협의 마음이오. 허나 무인으로서 영혼을 흔들 만한 강자를 찾고 있다면, 남해태양궁주는 결코 부족한 상대가 아닐 거외다.”
사실 당가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원래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남해였기에 남해에 대한 정보도 출발 전 열심히 얻어 놨다.
천하제일인까진 아니어도 천하십강(天下十强)을 뽑으면 반드시 한 자리는 차지한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강력한 새외의 고수가 바로 남해태양궁의 궁주다.
풍요로운 산물과 기후 때문에 중원을 침범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평가받는 상대.
객관적으로 내 상대는 아니다.
당가주는 나를 꼬드겨 그런 고수 앞에 세우려 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강하든 궁주 앞에서는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알면서.
정말 자기 가문의 안위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자다.
“바로 그 부분이 문제라는 거지.”
톡톡, 톡톡.
나는 바닥을 두드리는 동작이 나의 습관인 척 계속 손동작을 지속했다.
“당가는 약한데.”
톡톡, 톡톡.
“정말 궁주가 여기까지 올까?”
톡톡, 톡톡.
“들어보니 저번에는 남해도 싸울 생각 없이 온 거라며. 그럼 그냥 싸울 생각으로 보내면 될 거 같은데. 그러면 우리 약한 당가는 싹~”
톡톡, 톡.
느낌이 왔다.
두드리는 김에 살짝 내공을 바닥으로 쏘아보고 있었는데, 빈 공간이 느껴졌다. 꽤나 깊은 곳이었다.
“정말 궁주가 온다는 보장이 있나? 그런 거 없으면 나 좀 화날 거 같은데.”
“허허. 소협께서 꽤나 내밀한 부분을 물으시는구려.”
“뭐야, 비밀인가? 나도 비밀 있어. 하나씩 교환할까?”
“비밀이라 함은?”
“내 강함의 이유?”
그 말에 당가주가 호기심을 보였다. 그 이유를 알고자 남의 거죽도 벗기는 양반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리 없지.
“허허, 그런 것은 쉬이 남에게 알려주어서는 아니 되는 법인데.”
“알려줘 봤자 상관없거든.”
“물론 방법을 안다고 모두가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오만.”
“궁금해 죽겠다는 눈친데?”
“아니라고는 못 하겠구료.”
당가주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거래를 하겠다는 뜻이다.
“어릴 때 산속에 나무 하러 갔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거든.”
“거기서 기연이라도 만난 게요?”
“내겐 필연이지. 떨어지다가 누군가 손을 뻗어서 나를 절벽 안 동굴로 구했어. 그게 스승과의 첫 만남이었지.”
“호오. 혹 그분의 존함을 알 수 있을는지?”
“홍령이라는 여자인데, 알아?”
“……! 어쩐지, 그때 당가의 독술 사이에서도 종횡무진 하더라니. 그녀의 제자였는가?”
“흐흥, 아나 보네. 웬만해서는 밖에 가서 자기 이름 얘기하지 말라고 해서 여태 말한 적은 없어. 무공 좀 배우고, 뭐 그렇게 십 년 가서 스승은 죽었고. 나는 자유가 되어서 밖으로 나왔지.”
당가주는 내가 꺼낸 이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홍령의 이름은 금기인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전설이었으니까.
하물며 당가주는 홍령과 나이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비교를 당하며 살았던 세대일 것이다.
“혹시 그녀가 가르친 비급이나 그런 건―.”
“어허, 내가 뭘 모르긴 하지만 그 이상은 값을 꽤 받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거든?”
톡톡, 톡.
“이제 그쪽의 비밀을 내놔야지.”
“하하, 미안하오. 소협의 얘기에 푹 빠져버렸군. 그래, 이쪽의 비밀이라. 궁주가 온다는 확신을 보여 달라 이 말이오?”
“그래. 남해태양궁이 전력을 다할 만큼 비장의 한 수가 있다든가.”
“흐음, 그런 것이라면…….”
“참고로 나 많이 참고 있거든? 그때 일전으로 내 검이 망가져서 철몽둥이가 되어버렸다고. 근데 당신이 재밌는 걸 줄 수 있다고 해서 꾹꾹 참고 온 거야. 내 성에 안 차는 일이라면 내 검의 무게만큼 당가 사람들의 핏물을 흘릴 각오는 해야 할 거야.”
나는 거칠 것 없이 질렀다. 이 정도는 해야 당가주가 진짜를 내밀 것이다.
지하라는 걸 알았으니 그냥 때를 봐서 찾아도 되겠지만, 거기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물며 지하의 위치만 알았다 뿐이지 입구를 찾는 데 더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지금은 당가주를 밀어붙이는 게 제일이었다.
“좋아, 그대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지.”
고민하던 당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벽 한편을 가리고 있는 병풍을 치웠다.
“원래 이곳에 들어가려면 모든 감각을 잠재우고 내 인도에 따라야 하지. 허나 그대에게만은 예외를 두겠네.”
그리고 벽을 이리저리 조작하자 벽이 밀려들어 가며 지하로 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뭐야, 지하통로인가? 궁주가 와서 빠르게 쳐잡지 않으면 다 도망칠 수도 있다는 그런 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 평가는 일단 직접 가본 후에 얘기해도 충분하오. 그럼 가시지.”
당가주가 앞서 걸었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한참을 걸어 내려갔다. 내공을 쏘았을 때도 상당히 깊은 곳에 빈 공간이 있다고 느꼈는데, 그것보다 더 내려가는 거 같았다.
아니. 들어오는 자들이 방향을 헷갈리게 하려고 한 건지 길이 오르락내리락해서, 감각을 죽이지 않더라도 내가 얼마만큼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길도 하나가 아니었고, 방향도 제멋대로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다 왔소이다.”
마침내 당가주가 발을 멈췄다. 그 너머엔 굳건한 석벽이 있었다. 하지만 당가주가 무슨 장치를 만지자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벽이 열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시취(屍臭)가 코를 찔렀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냄새의 근원은 신생이 아니었다.
신생은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무슨 십자가에라도 고정된 것처럼 벽에 매달린 채였는데, 시신처럼 축 늘어져 있긴 했지만 분명 숨은 쉬고 있었다.
피와 얼룩으로 얼굴이 엉망이 된 터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신생의 거지 시절을 몰랐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거라.”
당가주는 한 편에서 물을 퍼와 신생에게 끼얹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성급하게 굴어선 안 된다.
당가주를 제압하고 탈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독과 기관이 발동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한 줌 핏물로 화할 뿐이다.
‘아버지에게는 당가 직계도 해독이 불가능한 독이 있음. 가주에게 대대로 내려온다고 들었음. 그렇게 비밀리에 감춰둔 곳이라면 분명 그 독을 설치해놨을 거임. 절대 조심해야 함!’
당당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할 정도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랬기에,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들키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졌다.
“이놈은 뭐야?”
“남해의 막내라오.”
“아, 납치됐다던? 당가는 아니라고 발뺌한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
“이 정도면 궁주를 달려오게 할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겠소이까?”
“근데 여기 숨겨놓으면 궁주가 어떻게 알아?”
나는 신생에게 가까이 다가가 머리에 툭 손을 얹고 헤집었다. 얼핏 보기엔 망나니 같은 행동이었지만 사실 두피의 혈을 짚어보는 행위였다. 진맥에는 보통 손목을 이용하지만 지금 그러기엔 너무 수상하니까 어쩔 수 없지.
……맥이 불안정해.
나는 짧게 맥을 짚고 손을 뗐다. 손에 묻어난 땀에선 화끈함이 느껴졌다. 독 기운을 미처 해소하지 못하고 땀으로 배출한 거다.
“이제 곧 밖으로 꺼내 선보일 거요. 볼일은 거의 마쳤으니. 어린 녀석이라 체질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아 제대로 된 성과는 없었지만 어쩔 수 없지.”
“선보인다면?”
“이 녀석을 포함해 성도의 모든 남해인들을 처형할 거라오.”
슬슬 때가 됐는데.
“그거라면 남해에서 필승의 준비를 하고 있는 놈들을 끌어들일 수 있지. 허면 우리는 준비가 덜 된 놈들을 쳐부수면 될 일. 그 전에 우선―.”
때가 됐는데. 왜 신호가 없지?
가주가 여기 들어와 있을 때 비상상황이 벌어지면 알 수 있어야 하니까 분명 신호체계가 준비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걸 상정하고, 내가 아래에 내려와 있을 때 위에서 당당이 일을 벌여 연락을 받은 당가주가 허둥지둥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할 때 기회를 노려 신생을 구출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이미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신호가 오지 않았다.
“―내 뜻을 거스른 자식 놈과 자식 놈을 꼬드긴 버릇없는 친구 녀석, 그리고 가짜를 처단해야겠지.”
“!”
어느새?!
내가 신생의 상태를 살피는 사이 당가주는 이미 문 밖으로 나가 장치를 움직인 후였다. 성인 남성 둘을 나란히 세워놓은 두께의 석벽이 빠르게도 닫혔다.
“몸이……!”
알아차린 순간 몸을 날리려 했지만 발이 말을 듣질 않았다. 몸의 내공도 제대로 모이질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막내는 내가 잘 타이를 테니, 네 녀석들은 그곳에서 당가의 가르침을 잘 받고 있거라.”
석벽 너머 당가주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벽은 닫혔는데도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검은 연기가 이곳 지하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