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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92화 (292/350)

292화

경악이 가득 담기긴 했지만 그 목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작았다. 그 덕에 밖에 있는 무인들은 당당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내가 들어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휴, 이제 좀 살 거 같다. 사천도 밤바람은 시원하구만.”하는 소리와 함께 곽 표두가 문을 닫았다.

“도대체 이 상황에 어딜 다녀온―.”

“너라면 어딜 다녀왔겠어?”

내 말에 당당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설마?’하고 물었다.

“다른 문파들이 근처에 없어서 그런가 경계가 별로 심하지 않더라. 나중에 네가 가주가 되면 좀 신경 써.”

은근슬쩍 가주 자리에 대한 얘기를 흘리자 당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가주가 차기가주에게만 전수하는 독과 암기술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면, 막내인 당당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어디부터 들은 거임?”

“신생의 행방을 물을 때부터 재차 물을 때까지.”

“거의 다 들은 거네.”

“그리고 그 얘긴 숨겨서 미안했다.”

내 사과에 당당이 화들짝 놀랐다. 그 얘기부터 꺼낼 줄은 몰랐다는 듯이.

“아, 아님. 네 상황이면 그럴 수 있음. 그냥 아버지가 얘길 꺼내서 생각났던 거뿐이고. 오히려 내가 미안함. 내가 당가타로 데려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거기에 신생도 어디 있는지 못 알아냈음…….”

녀석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당당은 내게 진심으로 미안해했고, 신생의 이름을 언급할 때는 걱정이 가득했다.

사실 사당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녀석의 입장을 확신할 수 없었다.

당당이 완전히 내 편이라 믿기에는 당가주가 너무 큰 걸 걸어버렸으니까.

십수 년 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녀석에게 차기가주 후보라니.

녀석을 아는 만큼 그 사실이 얼마만큼 큰 의미로 다가올지 짐작이 갔고, 녀석과 나의 친분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사당 안으로 들어온 순간 극도로 낮춘 목소리, 나와 신생에 대한 태도, 아버지와의 대화를 엿들은 것에 화를 내는 대신 부끄러워하는 반응까지.

“괜찮아. 계속 찾아보면 되지. 도와줄 거잖아?”

녀석은 차기가주 자리에 눈이 멀어 우리를 도매금으로 팔아넘기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 그래야지.”

“짐작 가는 곳은 없어? 뇌옥이라든가 멀리 떨어진 안가라든가.”

“뇌옥은 이미 뒤져봤음. 그리고 밖으로 나간 흔적은 없었음.”

“적어도 당가타 내에 있다는 거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신생, 그러니까 ‘무’는 당가주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다. 인질로서 가치가 있는 만큼 자신에게서 멀리 떼어놓지는 않았을 거다.

“그럼 이렇게 하지. 당가주가 나에게 수술환자를 맡겨보라고 했지? 그 사람들은 전부 당가의 무인들이잖아. 그들과 만나 접촉하다 보면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그들에게 은근히 탐문을 해볼 테니까, 너는 당가타 내에 사람을 가둘 공간을 뒤져봐.”

“어, 그건 내가 시간이 안 될 거 같음…… 아버지가 시킨 다른 일이 있음.”

“다른 일?”

“네가 듣기 이전에 했던 얘기임. 김진이라는 자를 찾으라고 했음. 찾아서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아아, 난 또 뭐라고.

그 앞에서 실력을 발휘한 게 꽤 큰 인상을 남겼나 보군.

“그자는 왜 갑자기 나타난 건지 모르겠음. 내게 빚을 졌다고 했다던데, 나는 전혀 감이 잡히는 게 없음. 지나가면서 얼굴을 본 적은 있지만 그게 다임. 말 한 번 나눠본 적 없는데 빚을 졌다니.”

“빚을 졌지. 피를 내줬잖아?”

나는 가면을 슬쩍 들어올렸다. 당당의 눈이 퉁방울처럼 불거졌다.

“덕분에 아까는 잘 썼어. 당가의 독은 확실히 보통이 아니더라고.”

“너, 너, 너―!”

“비밀로 해줘.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고 있거든.”

“아니, 그러면 대체 네 실력이?! 그러면 그때 소림에서 난리 난 것도 다 네가?!”

나는 잠자코 당당이 혼란을 수습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잘못된 결정일까?

내 신분이 두 개라는 건 상당히 중요한 무기다. 그걸 당당에게 밝히는 게 정말 잘한 일일까?

……아니, 이득을 따지고 한 얘기가 아니다.

신뢰를 산다든가, 내 편으로 끌어들인다든가. 그런 계산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보다 앞선 건 나의 감정이다.

“……무가 남해태양궁 막내라는 거. 내게 잠깐이지만 숨겼었음. 여기 온 목적도.”

녀석의 목소리에는 옅은 배신감, 속상함 따위의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의심하게 했다는 사실이 싫었다.

증명하고 싶었다. 우리가 친구라는 걸.

“하아, 진심 짐작도 못 했음. 다른 비밀도 있는 거 아님?”

“다 얘기해줄까? 너 나한테 귀신 들렸냐고 물어봤었잖아. 근데 그거 진짜야. 지금은 아니지만. 다른 비밀도 있어. 너 전생을 믿어? 사실 내가 말이지―.”

“알았어, 알았음. 그만하셈. 그걸로도 충분함.”

당당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물어봐 놓고 왜 안 믿는 건데? 진짜라니까?

“그러면 김진을 찾는 일은 됐음. 네가 김진이니까, 그 시간에 당가타 내부를 둘러보면 되겠음.”

“아니지, 반대로 해야지.”

녀석은 내 비밀을 알고도 당가주에게 귀띔할 기색이 없었다. 감정적인 선택이었지만 아직까진 그 선택이 틀리진 않은 거 같았다.

“당가주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 그리고―.”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앞으로가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당당이 내 편이라면 이 정도 위기는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성도에는 기묘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은퇴해야 할 줄 알았던 무인들이 훌륭한 치료를 받았다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보통 훌륭한 정도가 아닙니다. 한 명은 다리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을 다 뜯겼는데도 뼈가 붙고 살이 자라났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한 명은 맹수가 뱃가죽을 할퀴어 장기가 다 흘러내릴 정도였는데도 목숨을 구하고 벌써 성도 시내를 걸어 다닌다고 하더군요.”

“대단한 의술이군요. 당가에 그만한 실력자가 있는 줄 몰랐네요.”

“당가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당가의 실력은 아니라는 게 사람들의 의견입디다. 그런 일이 있을 때 당가에 찾아가도 진통제를 처방해주거나 약을 바르고 살이 돋아나길 기원하는 거 외에는 해준 것이 없으니까요. 어디서 실력 있는 외부 의원을 초빙해온 게 아니냐, 소문만 무성한 민초신의가 당가를 찾아온 게 아니냐. 사람만 모이면 요새 그 얘기로 말이 많습디다.”

“민초신의라니. 선배님에 비할 정도는 아닌데 부끄럽네요.”

나는 하오문 사천지부장의 말을 들으며 찻물을 음미했다.

내가 한 일의 결과를 확인하려면 사람들 사이에 어떤 말이 도는지 알아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하지만 일일이 객잔과 주루를 돌아다니며 얘기를 들을 순 없으니 하오문을 찾아온 것이다.

“어찌하오리까. 그 소문의 의원이 태양의원의 금태양이라 흘리리까?”

“아뇨, 그쪽은 당분간 더 두세요.”

괜히 말을 흘렸다가 당가가 눈치채면 하오문 사천지부가 곤란해질 수 있다. 벌써 사천지부의 행동반경이 좁아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원래 사람들은 미지의 존재에 대해 환상을 더 크게 부풀리기 마련이죠. 그냥 소문을 더 부추겨주세요. 당가가 초빙해왔다는 의원이 다른 사대신의인 건 아니냐. 그 정도로요.”

“그중에 금 의원님의 이름도 슬쩍 끼워 넣도록 하지요.”

늙은 기녀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일 잘하네.

“다른 소문은?”

“밤마다 성도 내 전각과 지붕들이 자꾸 부서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웬 무인들이 자꾸 싸움을 벌인다고. 당가의 영역 내에서 누가 그리 싸움을 벌이는 거냐, 당가도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돌더군요. 그 때문에 다치는 자들도 많아서 아까 그 의원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모양입니다.”

“그쪽은 적당히 때를 봐서 소문을 흘리도록 해요. 당가의 힘이 약해진 것을 노리고 날뛰는 낭인들이 있는데, 그자들을 잡느라 당가 삼 공자 당당이 힘을 쓰고 있다고.”

“알겠습니다.”

이건 당당을 추켜세우는 일이니까 당가에서도 하오문을 쫓지 않을 거다. 그리고 실제로 밤마다 날뛰는 건 당당이 맞았다. 쫓는 것이 낭인들이 아니라 나일 뿐이지.

우리는 밤마다 성도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일을 벌였다. 당가주에게는 당당이 김진을 찾았고, 당가로 오라고 설득하고 있지만 매번 술만 거나하게 대접받고 도망가느라 그런 추격전을 벌인다고 둘러댔다.

당당이 김진을 놓칠수록 당가주는 더 애가 탔다. 고급 술, 막대한 돈, 여자까지 뭐든 줄 수 있다며 어떻게든 설득해 오라고 강조했다.

그쪽에는 적당할 때, ‘김진은 강자와의 대결을 원한다. 그러한 대결을 준비해줄 수 있다면 당가의 손을 잡을 것이다.’라는 말을 흘릴 거다.

자신의 무력이 약한 당가주가 이 미끼를 지나칠 리 없다.

“남해태양궁은 하오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정보를 얻기 어렵긴 합니다만, 가장 최근의 소식으로는, 그날의 일이 남해에 전해졌고 궁주가 매우 격분했다고 합니다.”

남해태양궁이 곧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남해와 사천이 거리가 좀 있지만, 소식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온다면 충분히 왔을 시간인데.”

“큰 준비를 하고 있는 거지요.”

분노한 남해태양궁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준비를 한다. 그 준비가 무엇이겠는가?

“전쟁이라. 당가주가 꽤나 애가 타겠는걸.”

“당가주뿐이 아닙니다. 성도 사람들도 불안해하고 있습디다. 안 그래도 당가에 불만이 많았는데, 외부로부터의 침략도 막지 못한다면 당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이지요.”

“그 전까지 꽤나 횡포를 저질렀다죠?”

대부분의 문파와 세가가 그 일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보호세를 걷거나, 다양한 상업 활동을 쥐락펴락하는 식으로 주변에 영향력을 미치지만 당가의 경우는 좀 심했다.

우선, 모든 물건이 당가의 상단을 통한다.

소매상까지 당가가 하는 건 아니지만 주요 도매 공급을 당가가 좌지우지한달까?

그러다 보니 물가도 당가 마음대로다.

외진 곳이라 물건을 들여오기 힘들다 보니 다른 곳은 당가 상단과 경쟁조차 할 수 없다.

거기에 보호세를 걷는다.

다른 문파들처럼 시장 상인들에게만 걷는 게 아니라 성도 사람 전체에게 걷는다. 세금하고 같이 걷으니 안 낸다고 뻗댈 수도 없다.

“그 와중에 외부로부터 위협이 닥쳐오고 있고, 당가 무인들은 지난번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요. 당가주의 성격상 조만간 이에 대한 대책을 내세울 거 같긴 합니다.”

상황은 내 계획대로, 그리고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당가가 데려간 남해태양궁 막내에 대한 정보는, 더 알아낸 게 없습니까?”

신생의 행방에 대한 얘기였다.

벌써 며칠째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여차하면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다, 신생의 실력을 믿고 다른 쪽의 일을 우선 전개하고 있지만…….

솔직히 걱정됐다.

신생이 끌려가면서 곽 표두에게 [스승님께 제 걱정은 말고,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전해주세요.]라고 전음을 보냈다곤 하지만, 다른 부분은 내려놓고 신생을 찾는 걸 우선시하고 싶었다.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건 당가의 늙은이들이 술에 취해서 한 얘깁니다만…….”

“뭐든 좋으니 말해봐요.”

늙은 기녀가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특이한 체질의 외부인이 들어오면 그 체질을 분석하기 위해 갖가지 실험을 한다는 말을 했습디다. 몸을 가르거나 독을 붓거나, 그 체질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한 일이라고, 몇몇 세가의 약점은 자신이 찾아냈다며 무용담처럼 얘기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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