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나는 당황한 눈으로 방 안의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일행은 무사했다. 누구 하나 다치거나 함부로 대해진 흔적은 없었다.
특히 무는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했다.
당가는 무를 데려갔지만, 진짜 무는 여기 있다.
어색한 존댓말과 호칭, 당혹스럽지만 안도가 섞인 목소리로 나를 반긴 아이는 무였다.
“그래, 신생. 괜찮니? 다친 곳은 없고?”
나는 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곽 표두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상황을 설명해줄 만한 사람은 곽 표두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순간적인 일이었습니다. 금 의원님께서 계시질 않으니 일단 순순히 따랐습니다.”
곽 표두는 내 질문에 어색하지 않게 대답하며 전음으로 짧게 다음 말을 이었다.
[신생이 갑자기 자기가 무라고 주장하더군요. 그리고 무를 금 의원님의 제자라고. 그러자 그들이 신생을 데려갔습니다.]
신생의 판단이었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자리에 없는 상황이니 무보다는 실력이 있는 자신이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걸까.
“제, 제가 말해버렸습니다. 그 애가 무라고, 궁주님의 아들이라고…….”
조련사가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일 년 정도 지나서 저도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고 했습니다. 그새 얼굴도 덜 타서 하얘졌고, 태양의원에서 잘 먹어서인지 키도 컸다고. 큰 충격을 받아 기억을 대부분 잃은 거 같다고…….”
그렇게 말하며 조련사는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신생이 전음으로 그렇게 말하라 시켰다는 뜻일 터.
“당신이 한 짓은 꼭 되갚아 줄 겁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말은 이를 갈듯 했지만 표정은 아니었다. 조련사는 내 말의 진의를 알아차린 듯 안도하며 구석에 앉았다.
“금 의원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별일 아니에요. 그냥, 제가 좀 방심했습니다.”
그래, 방심했다. 사람 중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도 있다는 걸 잠시 망각했다.
그가 당당의 아버지이기에, 당당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오판해버렸다.
“일단은 다들 긴장 풀고 쉬세요. 그럴듯한 대접은 아니지만 우릴 뇌옥에 가둔 것도 아니잖아요. 당장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 거 같습니다. 이봐!”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밖에서 우리를 감시 중인 당가 무인을 불렀다. 그들은 내가 문을 벌컥 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놀란 눈치로 나를 돌아보았다.
“당가는 손님 대접이 겨우 이 정도인가? 뇌옥에 가둔 죄인도 식사와 물은 줄 텐데? 이제 곧 저녁이야. 무슨 오해 때문에 우리를 여기 가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삼 공자의 귀빈이다. 식사를 내오도록. 아, 점심에 먹었던 그 시뻘건 닭 볶음이 참 맛있던데. 그건 꼭 상에 올려주고.”
“……가주께 먼저 여쭤보도록 하지. 일단 들어가 있어라.”
당가 무인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말했고 나는 문을 닫았다. 문 너머로 녀석들이 작게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엄청나게 당당한걸? 식사를 갖다줘야 하나? 진짜 가주께 여쭤볼까?”
“이런 일로 가주께 갔다간 경을 칠걸. 실력은 우리 도련님들보다 아래인데 집안이 대단하다 들었어. 중원에서 돈을 쥐락펴락하는 집안의 자제라던데.”
“의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혹시 모르니까 밥 정도는 챙겨줘야겠군.”
“내가 다녀오지.”
우리 일행의 숫자가 적지 않았기에 몇 명이 자리를 떴다. 나는 머릿속으로 사당을 둘러싼 당가 무인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도착했다. 당당의 귀빈이라는 말을 강조해서인지, 아니면 내 신분 때문인지 꽤나 고급스러운 식단이었다. 내가 부탁한 대로 먹다가 죽을 만큼 매운 닭도 포함이었다.
“다들 먹읍시다. 뭐가 어떻게 되든 밥은 든든하게 먹어야지.”
내 일행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밥상 앞에 앉았다. 그래도 내가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하는 눈치였다. 불안한 표정의 무는 내 옆에 앉혀놓고 밥을 먹였다.
“걱정 마. 무는 반드시 구해낼 거니까.”
“저, 정말?”
“당연하지. 내 제자가 소중한 만큼, 무도 내겐 소중한 아이다. 무슨 일이 생기게 내버려두지 않아.”
무는 그 말을 듣고 안심한 듯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으라며 물을 챙겨주고는, 특별히 챙겨달라 부탁한 눈물이 나게 매운 닭 요리의 접시를 집어들었다.
어디 보자, 연기가 어디로 나가려나?
나는 그릇을 든 손에 삼매진화를 피워올리며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삼매진화로 달궈진 그릇에 매운 닭 요리가 가열되기 시작했다. 매운 연기가 솔솔 피어올라 어느 한 곳으로 스며들며 사라졌다.
저기가 통풍구군.
통풍구를 확인한 후 나는 품에서 비상약을 꺼내 닭 요리에 뿌리고, 물을 한 잔 부은 후, 통풍구 바로 아래에 그릇을 대고 삼매진화로 그릇을 가열했다.
약 성분이 매운 냄새와 뒤섞인 채 수증기가 되어 통풍구 밖으로 마구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왜 이렇게 공기가 매워?”
“아까 매운 닭 요리를 달라고 했잖아. 그거 냄새겠지.”
“하긴, 그거 볶을 때도 눈을 못 뜨고 있긴 하지. 독한 놈들, 우리 사천 사람들도 함부로 잘 못 먹는 걸 달라고 하다니.”
사당을 둘러싼 무인들이 눈이 맵다며 난리를 쳤다. 내가 사당 안으로는 냄새가 안 퍼지게 신경 썼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일행들은 든든히 식사를 마쳤고, 나도 충분히 매운 냄새를 퍼트린 후 그릇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소이다, 이제 가져가쇼.”
곽 표두와 일행들이 상을 들고 문을 열었다. 사람이 여럿이라 꽤 큰 상이 두 개나 들어왔기 때문에 이를 밖으로 빼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 순간을 노리고 문 위의 천장에 붙어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기에 야행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들이 상을 나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문틀 위를 붙들고 재빨리 사당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아이고, 눈 매워. 대체 얼마나 맵게 만든 거야?”
“저자들은 이런 걸 먹고도 눈도 깜빡 안 하네. 어우, 매워. 앞이 제대로 안 보일 지경이군.”
요리에 섞어 뿌린 비상약은 최루탄과 비슷한 계열의 약이었다. 이걸 약이라고 해도 되나?
내가 쓰려고 챙긴 건 아니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위험할 때 쓰라고 무에게 쥐여 준 물건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쓰게 되다니.
삼류 무림인은 눈도 못 뜨게 할 수준으로 농도를 맞춰 놓은 것이긴 했지만 당가의 무인들에게도 먹힐지는 확실하지 않았는데, 역시 다른 곳도 아니고 눈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그들에게 익숙한 매운 냄새에 섞은 거니 다른 의심도 못 하겠지.
“죽도록 매운 닭을 알려준 당당 녀석에게 감사해야겠군.”
놈들의 감시가 약해진 틈을 타 사당에서 벗어나면서 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감사 인사를 전하려면 당당 녀석을 만나야 한다.
어디에 있을까. 일단 녀석이 머무는 안채로 가봤지만 당당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별채로 가봤지만 그곳은 당당이 뿌린 독을 해독하느라 하인들만 바쁘게 오갈 뿐이었다.
당가타를 벗어난 게 아니라면 남은 곳은 하나.
본채 중 가장 큰 곳에 환히 불이 들어온 게 눈에 보였다.
하필 가장 감시가 삼엄할 거 같은 본채라니.
하지만 가봐야 할 곳이기도 했다. 당당을 만나려는 건 현재 상황과 당가주의 속내, 그리고 무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였다.
당당이 당가주를 만나고 있다면 당당을 만나는 것보다 확실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좋아, 가보자.”
나는 더더욱 기척을 죽이고 당가주의 거처에 접근했다. 경계는 삼엄했지만 담벼락을 넘고 나니 오히려 사람이 드물었다. 원하는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누군가에게 들키는 일은 없었다. 항주로 가는 동안 은 파파에게 달달 볶여가며 은신을 익힌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경우들처럼 엿듣기 좋은 곁방 같은 건 없었기에 나는 열린 문틈에 최대한 가깝게 귀를 대고 몸을 숨겼다. 다행히 청력을 돋우자 안에서 주고받는 얘기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태양이는 잘못 없음! 아버지, 제발!”
“안다. 그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오히려 고맙다고 할 수 있지. 남해태양궁의 막내를 우리 손에 쥐여주었으니 말이다.”
“무를 어쩌실 거……?”
“어쩌긴 어쩌겠느냐. 너무 걱정 말거라. 쓸모가 많으니 죽이진 않을 게다.”
“무는 집으로 돌아가야 함. 아니면 태양의원으로라도 돌려보내 주셈.”
“돌려보내다니. 허허, 당아. 네가 중원에 가서 실력만 늘어온 줄 알았더니 쓸데없는 인정도 늘었구나.”
“금태양은 친구임, 무도 내 친구임!”
당당이 격분해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허나 당가주는 이에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허허 웃음을 흘렸다.
“당아, 남해태양궁도 우리의 친구였다. 오랜 세월 거래와 교류를 지속해왔지. 허나 지금 상황을 보거라. 그들은 우리를 의심하고, 끝내 공격했다. 우리는 결백한데도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그건 오해 때문에―.”
“그 작은 오해 하나 때문에 틀어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친구라는 것이다. 너는 금태양이라는 자를 친구라 했지. 네가 생각하기에 그 녀석은, 더 중요한 것이 걸렸을 때 너를 버리지 않을 존재더냐? 아주 작은 일이라도 너를 속인 적이 없더냐?”
……왜 말을 못 해?
곧바로 아니라고 항변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 직후 당당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내 모기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가 남해태양궁 막내라는 거. 내게 잠깐이지만 숨겼었음. 여기 온 목적도.”
당가주는 그거 보라느니, 친구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느니 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그 침묵으로 네 말은 틀렸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건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얘기하기도 했잖아.
나는 억울했지만, 전음을 보내 항변할 수도 없었다. 기의 흐름 때문에 은신을 들킬 수 있으니까.
한참의 침묵이 이어진 후 당가주가 입을 열었다.
“너도 중원에 나가봤으니 알 것이다. 우리의 독은 강하지만 정도 이상의 고수들에게는 소용이 없다. 오대세가라 불리지만, 우리는 약하다.”
좀 의외였다.
오대세가라 불리는 가문의 가주가 자신들을 약하다고 하다니.
그리고 그 말에서 진심이 느껴지다니.
“물론 우리가 압도적으로 약한 것은 아니지. 우리보다 약한 자들은 얼마든지 많다. 그들은 우리의 독을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그 독과 해독약에 군침을 흘리지. 긴긴 세월 동안, 수많은 당가의 사람들이 중원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비전을 넘겨주고 쓸모가 없어진 후 배신당하거나 제거당했다. 그자들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이 사천에서 우리의 성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우리의 성에서 나가지 않고 우리의 비전을 꽁꽁 지키는 것뿐이지. 우리 당가는 그렇게 생존해왔다.”
“아버지…….”
“당아, 믿을 수 있는 것은 혈육뿐이다. 우리만이 서로를 알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지킬 수 있어. 그것이 바로 사천당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