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당당, 우린 친구지?”
나는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당당은 당황한 상황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정을 무시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내 추측을 들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으, 으응. 그렇슴.”
“그거면 돼. 한번 들어봐.”
맞다, 아니다를 말해 달라고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남해라고 그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진 않았을 거야. 둘은 원래 교류가 있던 사이니까. 거리도 멀고 문화나 풍습도 다른데 교류가 이어졌다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걸 갖고 있었단 뜻이겠지.”
녀석은 제법 순진하고, 친구인 내 앞에서 놀람이나 당황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니까.
“그간은 항의를 했어도 당가에서 위로 차원에서 더 얹어주는 식으로 넘어갔을지도 몰라. 사천당가라 해도 낭인들을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약 일 년 전부터 남해의 항의가 거세어진 거지. 궁주의 아들이 사라졌으니까.”
“!”
“처음엔 남해도 주변을 뒤지느라 당가에까지 화살을 돌리진 않았을 거야. 솔직히 쪽팔리잖아. 자기 앞마당에서 궁주 아들이 납치됐다면, 남해태양궁의 위신이 떨어지는 사건 아냐?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면…… 위신이고 뭐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에게 따질 수밖에. 남해 무인들의 눈을 피해 궁주의 아들을 납치할 만한 실력자가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구 낭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단, 당가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잖아?”
당당은 내 눈을 피했다. 하오문에서 들은 소문과 현재 상황을 얽어 만든 소설이 정답이라는 뜻이다.
“아니면, 그만한 실력자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걸 당가가 모를 리도 없고.”
“그, 그건 맞음. 아버지는 사천 인근에 다른 문파나 실력자들이 오고가는 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하셨음.”
별 상관없는 얘기라 생각했는지 당당이 대뜸 긍정했다. 덕분에 나는 당가주의 성격을 좀 더 알게 됐지만.
“당가는 그런 일 없다고 했지만 남해는 믿지 않았을 거야. 작은 충돌이 이어졌을 거고, 궁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을 테지.”
나는 조용한 당가타를 둘러보았다.
“당가주는 궁주와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러 갔을 거고.”
“흡!”
“그동안 무슨 문제가 벌어지지 않게 일반 세가원들은 외출을 삼가는 상태일 거야. 소수 인원만 끌고 갔으니 싸우기보단 평화적으로 마무리하려는 거겠지만, 만일을 대비해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
멀리서 숨죽인 기척이 느껴졌다.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지만, 삼 공자가 데려온 손님들에게 어떤 그림자도 붙지 않았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한 명이라. 그래도 적긴 하군. 이 정도면 우리 일행 쪽을 감시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겠다.
“그렇다고 당가가 하루아침에 사천 성도에서 사라질 수는 없지. 그건 당가의 세력권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당가의 직계가 손수 순찰을 돈다면 어느 정도 그 분위기를 잡을 수 있겠지. 성도 분위기는 별다를 거 없더라고.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그건 당가주가 원한 거겠지? 그래서 우리가 성도 안으로 들어올 때 검문도 심하지 않았던 거야.”
이제 당당은 놀라다 못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못 보던 새 귀신이라도 들린 거임?”
못 보던 새 귀신이 사라지긴 했는데.
나는 그냥 빙긋 미소 짓기만 했다. 괜히 하오문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느니 말해 봤자 쓸데없는 오해만 사겠지.
“이 정도면 비밀로 할 것도 없겠음. 네 말이 다 맞음.”
“그렇게 쉽게 인정해도 되는 거야?”
“다 맞는데 틀리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음? 아버지는 남해랑 타협을 하려고 외출하심. 멀리는 안 가셨음. 저기 야트막한 산 보임? 저 정상에서 만난다고 들었음.”
생각보다 멀리 안 갔네?
하긴, 아무리 당가가 의심받는 상황이라도 그 이상 멀리 가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겠지.
“그나저나, 그 신통한 능력으로 하나만 더 찍어 보셈. 아버지가 대체 어떻게 남해태양궁을 달랠까? 사촌들하고 내기하기로 했는데 난 잘 모르겠음.”
“네 사촌들은 무슨 답을 냈는데?”
“한 놈은 막대한 재물을 줄 거라고 했음. 또 다른 놈은 빙옥단을 십 년간 무료로 주지 않겠냐 하고, 또 한 놈은―.”
당당은 한참 동안 사촌들의 답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사정을 잘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이거다 싶은 답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궁주의 아들이 실종된 일이다. 그냥 재물이나 물건으로 좋게 넘어갈 거였다면 가주가 움직이는 일까진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근데 네 사촌들, 다들 어려?”
“응? 대부분 내 또래임. 아니면 나보다 몇 살 어린 정도?”
아하, 그래서 답의 수준이 이 정도에 머물렀군.
“그래서 뭐 획기적인 답이 떠오르는 게 있음?”
“획기적이진 않지만 당가주가 뭘 제시할지는 알 거 같은걸.”
“뭐임?”
“결혼이지.”
“엥?”
“사람이 사라진 일이잖아. 제일 빠른 건 사람으로 갚는 거지. 당가와 남해 사이에 혼사가 생기는 거야. 가족이 된다면 당가의 진정성도 증명할 수 있지.”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만, 어쨌든 혼인은 집안과 집안을 강하게 결속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러니까 전생에도 그놈의 대기업들이 비즈니스 결혼을 그렇게 많이 시킨 거 아니겠나.
심지어 그것도 내가 어릴 때쯤의 유행이었고, 내가 측근이 되었을 당시에는 그런 비즈니스 결혼의 폐단이 심해서 다른 방식이 도입된 후였다.
이득만 좇아 결혼을 하니 자꾸 애인을 만들고 이혼을 하려 들고, 그 자식들은 연애결혼을 하고 싶어 하니까, 어릴 때부터 점찍어놓은 상대끼리 운명처럼 만나게 계속 공작을 해서 사랑에 빠지게 만들더라.
“궁주의 아들이 실종된 일이니까 당가에서도 최소 직계를 내야 할 텐데…… 당랑과 당철이 딱 혼인하기 좋은 나이긴 하지? 당철은 힘들어도 당랑 정도면 뭐. 근데 그 둘은 당가주가 될 예정이니깐…….”
나는 당당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내 뜻을 알아들은 당당이 혼비백산했다.
“나임?!”
“그렇잖아. 남해는 아들을 잃었어. 그런데 딸까지 당가로 보내는 건 말이 안 되지. 이쪽에서 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너밖에 없잖아?”
“난,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됨!”
“그거야 가서 천천히 준비하면 되는 일이지, 뭐. 그쪽에서도 너보다 엄청 나이가 많은 아가씨를 내놓진 않을 거고. 또래라면 지내다 보면 정이 들지 않겠어?”
“하지만 나, 나, 나는―!”
“뭐야. 혹시 좋아하는 소녀라도 있어? 이 형님한테 말해봐.”
이렇게 반응이 좋으니 안 놀려먹을 수가 없네.
혼맥에 대한 의견은 거짓이 아니지만 그 상대가 당당일 거라는 건 장난이었다.
당가주가 바보도 아닌데,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직계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남해로 보낼까 봐?
꾸준히 교류를 했다지만 반대로 지금처럼 언제든 교류가 끝나면 앞마당의 적인 사이다. 그런 상대에게 당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직계를 내어줄까. 지금까지 하오문 지부장과 당당에게서 들은 당가주는 그런 성격이 못됐다. 그러니까 당당을 보내진 않을 거다. 기껏해야 당당의 사촌인 방계들 중 하나를 보내겠지.
“좋아하는 소녀는 무슨! 그 얘기가 아님!”
“뭐야, 그럼 뭔데?”
“남해태양궁엔…… 호랑이 신랑이라는 게 있다고!”
“호랑이? 잠깐만, 설마 궁주의 신수라는?”
“그래! 타 지역의 남자는 그 신수의 신랑이 되어야 함! 말도 안 돼!”
아, 그러니까.
나는 사람과 사람의 혼맥을 얘기했는데, 이 녀석은 호랑이 신수와의 혼인을 생각했다 이건가?
“그 신수는 신랑이 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뒤 신랑을 한입에 꿀꺽 삼켜버린다고 했음! 이건 거짓이 아님! 당가 사람이라면 다들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는 얘기임!”
미치겠다. 웃겨 죽을 거 같아.
하지만 나는 꾹 참았다. 당당 녀석이 이렇게 진지한데 혼자 빵 터질 수는 없잖아.
어머니들이 어린 애들 말 안 들을 때 하는 말을 여태 믿고 있다니.
“괜찮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애초에 문제가 된 건 궁주의 아들이 사라진 일이잖아? 그것만 해결하면 네가 호랑이 신랑으로 갈 일은 없겠지. 안 그래?”
“그건 그렇긴 함. 하지만―.”
“실은 여기 온 다른 이유가 있어.”
당가가 처한 사정을 들으며, 내가 무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당가의 협력을 얻어낼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당당이 내 편을 들어주려면 사정을 알고 있는 게 좋겠지.
“너, 무를 기억하지?”
“당연한 얘길 왜 함? 우리 꽤 친했음?”
당당의 말대로 녀석과 무는 꽤 친하게 지냈다. 당당은 뱀이나 파충류 등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무는 이를 포함한 동물 전체와 친화력이 높았다. 그러니 자연 둘이 어울릴 일도 많았다.
“무가 그 집 아들이야.”
“음? 그게 뭔 소리임?”
“남해태양궁 궁주의 실종된 막내아들, 그게 무라고.”
“……내가 지금 뭔 소릴 들은 거?”
“넌 무가 실종됐을 때 이미 사천을 떠나 있었지? 그러니까 용모파기를 볼 일도 없었겠지.”
나는 정왕의 코끼리 조련사가 무를 알아본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무를 집으로 돌려보낼 겸, 당가에도 들러 이런저런 협조를 얻을 계획이었다는 것도.
“아니, 방금 무슨 소리가―.”
“!”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당당이 일행이 있는 별채로 몸을 날렸다. 나도 뭔가를 느낀 순간 발을 박찼다. 그 찰나, 우리가 향한 방향에서 갑작스런 소란이 일었다.
“막아! 아니, 내가 막는다! 나머지는 무를 지켜!”
“곽 표두님! 저도 있어요!”
곽 표두와 신생이 외치는 소리와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수십? 수백? 수많은 기척이 별채를 에워쌌다.
“이, 이게 뭐야! 잡아, 잡아!”
“사람 살려!”
한 걸음마다 비명이 터졌다. 죽음의 비명은 아니었으나 정도를 넘어선 기겁이었다.
그리고 별채에 들어선 순간 나는 그 기겁의 이유를 알았다.
“미친, 이게 다 쥐야?”
쥐들의 군대가 별채를 장악하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종아리만 한 쥐들이 우리 일행들을 향해 돌진했다. 표사들은 기겁을 하면서 무기를 휘둘렀고 무는 비명을 질러댔다.
곽 표두와 신생은 쥐를 조종하는 거 같은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상한 종을 들고 있었는데, 그 종이 울릴 때마다 쥐들의 기세가 올랐다. 하지만 본인의 무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지 내가 가기도 전에 곽 표두와 신생의 공격에 쓰러졌다.
문제는 쥐들이었다. 검을 휘둘러도 수십 마리를 잡아도 이놈의 쥐는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금태양! 사람들 챙기셈!”
“알았어!”
나는 다친 사람들을 업었고, 무는 신생이 챙겼다. 곽 표두와 표사들을 이끌고 별채를 나서자 당당이 품에서 작은 독병 여러 개를 꺼내 주변에 던졌다.
“숨 참고, 멀리!”
그 말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독병이 깨지며 시커먼 연기가 퍼져나갔다. 쥐들은 그 연기에 휩싸이자마자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바닥에 몸을 늘어트렸다.
역시 저런 상황에선 화학전만 한 게 없네.
쥐는 더 이상 몰려오지 않았다. 나는 무를 살폈다. 다른 이들은 온갖 사건을 겪어서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무는 몸을 발발 떨고 있었다.
“괜찮아? 이리 와봐, 침을 좀 놔줄게.”
나는 무를 품에 안고 휴대용 침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혈에 침을 놨다. 무의 불안한 표정이 빠르게 부드러워지는 걸 보곤 나는 무를 곽 표두에게 넘겼다.
“곧 잠이 들 겁니다. 부탁해요.”
“예, 알겠습니다.”
사실 재울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나는 일부러 무를 재웠다. 곧 무는 빠르게 잠이 들었고, 별채에 독을 살포한 후 해독약을 제 몸에 뿌린 당당이 달려왔다.
“미친, 대체 이게 무슨 일임? 어떤 간 큰 놈이 사천당가에!”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고 있잖아?”
나는 쥐를 부리던 자의 정체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건 당당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때 신생이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저희를 보고 그렇게 말했어요. 역시 당가 놈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삼 공자를 모셔가겠다! 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