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녀석은 꽤 좋아 보였다.
얼굴과 태도에는 자신감이 넘쳤고(나를 보고 당황하기 전까진), 녹색 비단으로 지은 무복은 상당한 고급이었다. 전에도 오대세가 도련님다운 비싼 옷을 걸치긴 했지만 그때 입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뭣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녀석이 들고 있는 검이었다.
옷과 마찬가지로, 전에 사용하던 검도 분명 양질의 검이었지만 지금 녀석이 들고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창천 녀석이 같이 안 와서 다행이지. 다른 물욕은 별로 없는데 명검에 대한 욕심만큼은 하늘을 찌르는 놈이라, 당당에게 저 검을 걸고 비무를 하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대답을 하기 전에, 검이나 내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어? 아! 남해의 정보를 묻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달려왔음! 그놈들은 어디 있음?”
당당이 당가 무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가 무인들은 다시 의기양양해져서, 선생님에게 잘못을 고자질하는 어린애처럼 우리를 손가락질했다.
“맞습니다, 삼 공자! 이놈들이 바로 그놈들입니다!”
“뭐? 지금 내 친구들 보고 그놈이라 한 거임?”
나를 향했던 검이 당가의 무인들을 향했다. 그리고 검면이 목소리를 높인 자들의 정수리를 팍! 소리 나게 때렸다.
“뭐 함? 당장 당가의 별채로 데려감! 내 손님임!”
“아, 알겠습니다!”
당가 무인들은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삼 공자인 당당의 명을 속히 수행했다. 몇 명은 별채로 가서 손님 맞을 준비를 시키겠다며 달려 나갔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기,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삼 공자님의 손님인 줄도 모르고 그만…….”
“됐어요. 모르고 한 일이면 그럴 수 있지. 근데 우리 여기 세 냈는데. 음식도 방금 나왔고. 이건 먹고 가면 안 돼?”
“사천까지 와서 이런 구석진 객잔의 요리를 먹는다니, 당가의 직계로서 용납 못 함! 숙소도 별채가 훨씬 훌륭함!”
“야, 그렇게 말하면 열심히 준비한 숙수가 뭐가 되냐?”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당의 말처럼 기왕 사천요리를 맛본다면 사천당가의 요리를 먹어봐야 하지 않겠나?
“이 음식들은 주변에 나눠주든가 거지들에게 적선하든가 해요. 값은 지불할 테니까.”
“됐음! 내 동네에 온 친구한테 돈 쓰게 하는 거 아님! 점소이, 음식값은 당가로 청구하셈!”
당가의 무인들이 온 것만으로도 눈치를 보던 점소이는 아예 당가의 삼 공자가 나타나자 울먹일 기세였다. 저 심약한 점소이가 당가에 가서 음식값을 받아낼 일은 요원할 거 같아, 나는 적당한 은전을 점소이에게 쥐여주고 나왔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음? 다들 피곤해 보임.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가서 밥 먹고 좀 쉬셈.”
“그래, 고맙다. 당가타는 멀어?”
“아니, 저기부터 당가타임.”
당당이 가리킨 곳은 거대한 장원이었다.
아니, 저건 장원이라 부르기도 뭐한데. 거의 성 아냐?
정문의 크기와 담벼락 너머의 건물 개수만 대강 살펴도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대충만 잡아도 무한 구 금가장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 말을 증명하듯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당가타 내부만 돌아다니는 전용 마차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무공을 쓰지 못하는 세가 구성원이나 손님들을 태운다나.
우리는 타고 온 표국 마차가 있어서 손님용 마차를 탈 필요는 없었지만, 저런 걸 항시 대기시키다니. 당가의 위세며 힘도 대단하지만 그걸 주위에 부러 과시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너무 조용한데?”
사차선 도로만큼이나 뻥 뚫린 길은 좀 과장을 보태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한낮인데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 그건…… 그러니까, 그래! 다들 틀어박혀서 독 연구나 암기 연습 등을 하느라 그럼! 아, 저기가 별채임!”
방금 말을 돌린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
하여튼 우리는 별채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별채는 당당 녀석이 호언장담한 것만큼 좋았다. 특별한 귀빈만 모시는 곳이라나? 태양의원의 귀빈용 숙박시설보다 더 좋은 거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장담한 것, 식사가 곧바로 차려졌다. 마침 밥때기도 해서 조리가 오래 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서 앉으셈! 이게 바로 진짜 사천요리임!”
“와아, 잘 먹겠습니다!”
신생과 무, 그리고 표사들이 한데 둘러앉아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나도 당당과 마주 보고 젓가락을 들었다.
“매워―!”
“와아, 이 향신료 맛이 특이하네요. 이질적인데 먹다 보니 괜찮은 것도 같고.”
“당당 형! 형이 해줬던 것보다 더 맛있어요!”
당당이 자신 있게 대접한 사천요리는 그 명성만큼이나 맵고 자극적이었다. 태양의원이 있는 호북과는 확실히 음식의 스타일이 달랐다.
당당이 태양의원에 있을 때 종종 해줬던 사천요리를 먹어본 경험이 있는 신생은 곧잘 먹었고, 표사들은 잘 먹는 사람 반, 맵거나 이상한 맛이 난다고 젓가락을 내려놓는 사람이 반이었다. 무는 제법 잘 먹는 거 같았지만 역시 어린애 기준에는 너무 매운 듯해서 간이 덜 된 음식을 부탁했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 금태양 넌 그럴 줄 알았음. 잘 먹을 줄 알았다니깐!”
나는 표사들이 젓가락을 내려놓은 음식들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환생 후 몸이 아파서 자극적인 음식을 많이 못 먹은 데다 계속 북쪽에서 지내와 삼삼한 맛에 길들여졌지만, 전생의 난 그렇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에 내가 살던 곳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식문화를 가진 곳이었단 말이지. 매운 것이라면 익숙하단 말씀.
아니, 익숙한 걸 넘어서 맵지 않은 음식은 못 먹던 시절도 있었다고.
마라 같은 향신료도 내가 죽기 전 유행을 한 터라 그 맛에도 익숙하다. 전생의 마라 음식에 비하면 정말 본토의 그것이긴 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자자, 이것도 먹어 보셈. 다른 곳에서는 절대 못 먹을, 사천당가 특제 닭 요리임! 진짜 매워서 그 이름하야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운 닭’! 나 어릴 땐 형들이 이걸 먹을 수 있어야 진짜 당가의 직계라고 속인 적도 있음!”
당당이 내 앞으로 밀어준 그릇에는 붉은 홍고추가 수북이 담겨 있었다. 물론 고추만 있는 건 아니고, 닭고기도 들어 있긴 했는데…….
고추와 닭고기가 3대 1 비율로 볶아져 있는 걸 닭 요리라고 하는 건 양심이 없지 않나?
호기심은 생겼지만 도저히 범접할 수 없을 거 같은 비주얼이었다.
“형들 하니까 말인데, 당랑하고 당철은? 아까 무인들이 당가 직계가 온다고 해서 걔네가 올 줄 알았거든.”
나는 그릇을 다시 슬쩍 당당 쪽으로 밀면서 말을 돌렸다. 멀리 있을 땐 그냥 비주얼이 꽤나 엄청난 음식이네 정도로 생각했는데 가까이 있으니까 눈과 코를 찌르는 매운 냄새가 거의 독극물 수준이었다.
“형님들은 소림에 다녀온 이후 쭉 근신 중임! 그래서 내가 형님들이 하던 일을 대신 하고 있었음!”
“당랑과 당철의 일을? 아니, 왜 갑자기 근신인데?”
“둘이서 어린 동생 하나한테 졌냐고, 당가의 망신이라고 근신을 명하셨음. 그래도 나는 칭찬 받음. 내 검도 봐주셨음!”
“그래서 지금 그 검을 받은 거야?”
“멋지지? 대대로 당가의 검을 극성으로 익히는 후손에게 주어진다고 함. 그리고 암기술과 독술도 다시 배우고 있음. 왼손잡이용 암기와 독병도 따로 만들어주심! 이 암기들 봐, 대박임!”
녀석은 신이 나서 품에서 제 암기와 독병을 꺼내 자랑했다.
원래 남한테 자기 독문병기를 함부로 보여주는 건 아닐 텐데. 녀석이 날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했기에 나는 성심성의껏 암기와 독병을 구경했다.
“멋지네. 마비산에 대해서는 좀 알아봤고?”
당가로 떠나기 전, 당당은 본가에 돌아가 마비산을 수술에 사용하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아내겠다고 말하며 돌아갔다. 여태까지 그에 관한 연락은 받은 적이 없었다.
서찰로 썼다가 유출되면 안 되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 맞다. 미안. 너무 바빠서 거기까지 알아볼 정신이 없었음.”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약초 재배도 못 찾아봤음…… 진짜 미안. 갑자기 성도와 당가타를 지키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겨주셔서 도무지 짬이 안 났음. 조만간 형들 근신도 풀릴 테니까 그때 즈음이면 나도 한가해질 거임! 그때 찾아보겠음!”
“아냐. 마비산은 더 캐보면 좋겠지만, 밭에 심을 약초는 쓸 만한 걸 찾았어. 벌써 재배에 들어갔고, 판매는 아직이지만 태양의원에서 충분히 활용 중이야.”
“그, 그렇구나. 다행임.”
나와 한 약속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민망한지 당당은 내 눈을 피했다. 그리고는 내가 아까 은근슬쩍 그 앞으로 밀어놨던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운 닭’을 우적우적 퍼먹기 시작했다.
“흐윽, 흑! 매움―!!! 물―!!!”
몇 숟갈을 퍼먹던 당당이 입에서 불을 뿜을 듯이 외치며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더니 그 물로도 부족한지 주전자를 찾다가, 다른 사람들도 매워서 물을 다 비웠다는 걸 알자 물을 마셔야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먹길 정말 잘했군. 매운 것에 익숙할 당당 녀석까지 저럴 정도면 나는 한 입 넣자마자 불 뿜었겠는데.
“맵다. 나도 물 좀 먹어야겠네.”
나는 적당히 혼잣말을 내뱉으며 녀석이 후다닥 뛰어간 자리를 뒤따라갔다.
맵다는 건 거짓이 아닌지 녀석은 근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주전자에 붓고는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물을 마셔대고 있었다.
“나도 한 모금 줘. 역시 사천 음식은 맵네.”
“흐으, 매워……. 역시 이 닭은 먹을 수 없어…….”
녀석이 건넨 물을 적당히 마시고 돌려주며 나는 아직도 정신없어 보이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안 물어봐? 우리가 왜 남해태양궁을 찾았는지?”
“어? 아! 맞아, 그거 물어보려고 했음. 왜 찾은 거임?”
이 얘기를 하려고 물을 찾는 척 따라왔다.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누구보다 정확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당당뿐이니까.
“의맹회의 있잖아, 곧 열릴 거거든. 그거 때문에 남해태양궁의 표를 받으려고. 내 태양보도가 남해태양궁에서도 귀한 재료로 만든 거니까, 그걸로 어떻게든 끈을 만들어보려 했거든. 근데 여기 오니까 분위기가 좀 심상찮은 거 같더라?”
나는 일부러 무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고 돌려 말했다. 당당을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아는 게 많지 않은 상황에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도 아니었다.
“당가랑 남해태양궁이랑 뭔가 문제가 있는 거지?”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나한테도 비밀로 해야 할 만한 일이야?”
당당이 또다시 눈을 굴렸다. 아까는 먹다가 죽을 닭인지 죽을 만큼 매운 닭인지라도 있어서 딴청을 피우는 게 가능했는데, 여기엔 목을 축일 물주전자밖에 없었다.
“가주께서 비밀로 하라고 했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한발 물러났다. 나도 무와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은 상황에서 녀석을 몰아붙이고 싶진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 만해. 남해태양궁이 당가를 납치범으로 지목하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키울 필요는 없겠지. 괜히 당가의 위신에 흠집만 나고. 안 그래?”
“―뭐, 뭐, 뭐?! 어, 어떻게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