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먹고 사는 일에 별다른 왕도가 있겠습니까.”
소림승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는 저희가 가장 잘하는 것을 팔기로 했습니다. 소림의 이름 덕분인지 많은 이들이 주머니를 열더군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무슨 아이템인데?
“나중에 소림에 가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태양의원 같은 대업을 하는 이에게 말하자니 영 쑥스럽군요. 아직 수양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나 참. 뭐 별거라고 엄청 숨기네. 내가 남도 아닌데 말해줘도 되지 않나?
아니면 소림이 한다고 하기엔 너무 하찮은 일이라 그런 걸지도.
그래, 차라리 쑥스러워 비밀로 하는 쪽이 낫지. 상황이 안 좋았다면 쑥스럽고 자시고 다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을 텐데, 그게 아닌 걸 보면 정말 일이 잘 풀리고 있긴 한가 보다.
“안 그래도 이걸 어떻게 나눠드리나 했는데, 만나서 잘됐어요.”
나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방장스님을 보좌하시던 분이니 삼생화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죠?”
“예, 그렇습니다만. 이건?”
그가 소림에서 나름 급이 있는 승려였기에 나는 가타부타 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삼생초의 씨앗입니다. 이 땅을 회복시키고 사람들을 낫게 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왔습니다.”
그 말에 승려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마치 소림의 녹옥불장을 받아드는 것처럼 감격에 찬, 그러나 경건한 태도로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아아, 이런 귀한 것을…….”
“삼생화만큼의 효력은 낼 수 없지만 분명 보탬이 될 겁니다. 이 풀의 특징은―”
나는 그동안 태양의원의 의원들, 그리고 이 풀을 키워낸 농부들이 직접 알아낸 삼생초의 특징들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삼생화는 선계에서 피는 꽃. 그리고 이곳 인세에서는 유독 생기가 사라진 땅에서 잘 자라는 특성을 보이더군요. 그런 부분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곳 섬서에서 더 잘 자랄지도 모릅니다.”
사실 삼생초가 삼생초인 건, 삼생화처럼 꽃이 오래 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생화는 나무였는데 삼생초는 목질화되지 않고 일년생 화초처럼 빠르게 시들었다. 꽃도 잠깐 피었다가 씨를 맺고는 죽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라면 오히려 꽃을 피울 수도 있지 않을까?
“참으로 신기한 식물입니다. 보통이라면 이처럼 기를 잃은 땅에서는 살지 못할 텐데요.”
“그게 말이 기허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다른 종류의 기일 수도 있죠.”
“……! 자, 잠시만. 금 의원님,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예? 아니, 그러니까 이건 그냥 제 추측인데…… 우리가 느끼는 기 외에 다른 기가 이곳을 채우고 있어서, 그게 이런 기허의 땅과 선계를 채우고 있어 삼생화가 자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얘기였는데.”
“바로 떠나실 겁니까? 아니시지요? 하루, 아니 반나절만 머물러주십시오. 이보게들! 이리 와보게! 큰일이네!”
소림승이 갑자기 흥분해서 다른 승려들에게 후다닥 뛰어갔다. 그리고는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뭐라 얘기를 하니, 그 흥분이 전염이라도 된 듯 승려들이 난리가 났다.
“금 의원님, 그 말이 정말입니까?!”
“안 그래도 저희가 새로 방법을 고안한 게 있었는데, 본질적인 문제가 있어서 전혀 해결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책을 떠올리시다니!”
“아아, 이런 귀한 것을…… 부처가 여기 있으시다, 아미타불……!”
이 일대에서 사람들을 돌보던 소림승은 다 모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감탄을 하고,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불경을 외고, 몇몇은 아예 자리를 잡고 절을 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래?!
이러다 진짜 열반하겠다고!
“죄송합니다. 소림에서 오래도록 고민하던 문제가 덕분에 해결이 될 것 같아서,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일을 만든 소림승은 내 난감함을 배려하면서도 나를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들은 늙은 보리수나무 아래로 나를 데리고 갔다. 병에 걸린 것처럼 잎이 시들고 빈약했지만 여전히 그 붉은 열매를 점처럼 달고 있는 나무였다.
왜 하필 데리고 와도 꼭 이런 곳에.
하지만 햇볕이 내리쬐었고 적당한 그늘이 될 만한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뭐 때문에 이러는지 들어나 보자.
“사실 소림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오랜 시간 힘써왔습니다. 그 방편 중 하나로 연구하던 것이, 바로 내가기공입니다.”
“내가기공이라면, 내공을 쌓아 신체 활력을 도모하는 식입니까?”
“바로 아시는군요! 허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이곳의 기가 너무 허하여 내공을 쌓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혹은 내단을 써보기도 했습니다만…….”
“소용이 없었겠죠. 막대한 기를 불어넣어도 일시적일 뿐. 기혈을 뚫고 단전을 만들어도 그 기가 몸에 머물지 못했을 겁니다.”
“맞습니다! 박살난 독에 물을 붓는 것 같더군요. 허나 금 의원님의 말씀이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설마,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기 말입니까?”
“예! 그겁니다!”
소림승은 자신이 생각한 방안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섬서사변의 피해를 본 이들은 섬서 밖으로 나가도 오래 살지 못한다. 오히려 비실비실해도 차라리 섬서 내에서 수명이 더 길다는데, 그걸 생각하면 사실 다른 종류의 기가 그들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거다.
“설득력 있는 가설이군요.”
잠깐만.
설득력이 있다를 떠나서, 그게 정답 아냐?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다.
심상 속 화산은 분명 선계에 닿아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 다녀왔던 나는 탈태환골을 통해 정상 그 이상의 신체를 가졌다.
그 때는 심상 속 화산에서 쌓은 내공, 그리고 소림방장이 내게 쓴 삼생화의 기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이곳을 메운 기가 선계의 기와 같은 거라면, 그게 내 몸을 바꿀 만큼의 위력을 선보인 거라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림승들은 내 가설을 어떻게 적용해볼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하도 생각에 몰입해서 그 반짝반짝한 민머리에서 김이라도 올라올 것 같았다.
그 고민은 자신들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를 위해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 구제가 자신의 덕으로 돌아온다는 계산 같은 걸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마음이 그리 흐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
“잠깐, 제 얘기를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승려들은 자기들끼리 토론을 하고 설왕설래를 하다가 내 말 한 마디에 곧바로 내게 몸을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저는―.”
나는 그들에게 나의 태생을 말했다. 섬서를 떠난 내가 어떻게 그 나이까지 버틸 수 있었는지를 말했고, 그 과정에서 살기 위해 만들어낸 방편을 얘기했다. 또, 심상 속 선계에 다녀온 얘기를 털어놓았다.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그 결과가 눈앞에 있기 때문인지 그들은 내 말을 한 마디도 빼먹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경청했다.
“―거기에 최근, 무당신의께서 태양의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와 관련된 비사를 알고 있겠죠. 신의는 이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도 섬서의 사람들처럼 똑같은 신세가 되리라 자신에게 그 술법을 적용했습니다. 저는 그 술법의 일부를 전해 받았습니다.”
무당신의가 나와 같은 체질이 된 이유였다. 그는 속죄의 의미로 자신에게 똑같은 술법을 적용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무당신의를 질책했다.
그게 무슨 애 같은 태도냐고, 잘못을 했으면 그걸 해결을 해야지, 도를 닦는다는 사람이 자해나 해서 죄책감을 덜려 한 거냐고 한참을 화를 냈다. 상대가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든 말든 상관없었다.
무당신의는 내 앞에 고개를 들지 못했고 나는 화를 가다듬은 후 그걸 내게 넘기라고 했다.
올바르게 쓰지 못할 거면 내가 제대로 써주겠다고.
그 비술은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사실 저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 모릅니다. 신의도 잘 모르시더군요. 하지만 소림의 여러분이라면 이걸 분석할 수 있을 거 같군요.”
나는 혹시 몰라 베껴왔던 비술서를 꺼냈다. 책이라고 하기도 뭣한 아주 얇은 서책이었다. 진법 하면 당가도 꽤 안다고 하니까 당당 녀석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건데.
하지만 당가보다도 비술 등에 능한 것은 사실 소림이다.
“저희 소림은 그러한 비술을 막아내기 위해 오랜 연구를 해왔습니다. 불가의 진법 또한 그 묘리의 원리는 다르지 않으니,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보이겠습니다.”
그 원리를 파헤친다면 이들이 연구해 만들었다는 내가기공도 훨씬 보완될 것이다. 기허로 통칭되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기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거, 다른 무림인들이 알면 눈이 뒤집힐 일이겠군.
강해지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이 바로 무림인이다. 은거기인의 비급이나 귀한 내단을 놓고도 칼부림을 하는데, 아예 새로운 기에 대한 이론이라니.
소림이 이걸 분석해낼 수 있다면, 이걸 미끼로 제갈세가나 다른 이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겠는데?
이미 소림승들은 내가 건넨 서책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한 번에 여럿이 보지 못하니 한 명이 독경하듯 읽고 나머지는 바닥에 진법처럼 보이는 것을 그리며 제각기 의견을 주고받았다.
“엄청납니다. 다들 한순간에 빠져들었군요. 어쩌면 십수 년을 매달려도 보이지 않던 해결법이 나올 것도 같습니다. 이게 다 금 의원님 덕분입니다.”
처음 나를 발견했던 소림승은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이렇다 한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요.”
“아닙니다. 실제 사례와 경험, 거기에 새로운 시각까지. 이런 귀한 것들을 전해받았는데 답을 내어놓지 못한다면 소림이 소림이라 할 수 없지요.”
그의 말에서는 일종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하긴, 천년 소림이라니 무공과 기에 대한 연구는 무림문파 그 어느 곳보다도 뛰어날 거다.
소림을 보려던 게 아니라 그저 섬서의 땅을 한번 들러보려던 것이었지만 일이 잘 풀렸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조금 더 머무르면서 저희들과 문답을 하시지요. 저 내용을 숙지하고 나면 다들 금 의원님의 경험에 대해 궁금한 것이 늘어날 겁니다.”
“한 나절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나는 원래 이곳에 머무르려던 시간을 염두에 두며 말했다. 저들이 저 내용을 흡수하는 동안 나는 잠깐 이곳을 둘러보면 되겠지.
소림승의 안내를 받아 나는 안강 일대를 둘러보았다.
한때 화산과 종남의 제자들이 만나 회합을 다지기도 했다는 도시의 흔적을 둘러보며,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홍령과 좌수검, 그리고 마의의 과거를 상상해보았다.
전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 지금. 홍령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리고 좌수검과 마의와의 재회에서 무언가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삐이이익―!
홍령이 보고 싶다.
그 생각을 한 순간 또다시 귀에 익은 붉은 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게 열 번째인가?”
이곳으로 오는 그 짧은 시간에도 몇 번이나 행운의 편지를 받았다. 처음 몇 번은 짜증이 났고, 그 다음에는 귀찮아서 오자마자 다 태워버렸는데, 이쯤 되니 화가 났다.
스토커도 아니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그래도 일단 받은 쪽지는 펼쳤다. 태울 때 태우더라도 최소한 내용은 확인해야지.
그런데 이번 쪽지는 행운의 편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