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282화 (282/350)

282화

“……또 왔네.”

사실, 이걸 받는 건 처음이 아니다.

“그게 뭔데요, 스승님?”

“한번 볼래?”

무에게 우리가 경유해 갈 지역들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던 신생이 신이 나서 내게서 종이쪽지를 받아들었다. 저런 걸 보면 아직 어린애는 어린애라니까.

“나, 나도 볼래.”

무도 내가 받은 쪽지의 내용이 궁금한지 머리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한과 달리 중원의 문자까지 익히지 못한 무는 곧 울상이 되었다.

“못 읽어, 힝…….”

“읽어줄까? 스승님, 그래도 돼요?”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크게 읽어봐.”

“이 편지는 삼십여 년 전 영길리(英吉利)의 난돈(蘭墩)에서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이 편지는 사흘 안에 당신의 곁을 떠나야…… 이것을 포함해 일곱 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지 않거나 버리면 크나큰 불운이…….”

큰 소리로 편지를 읽던 신생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도 그 큰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스, 스승님! 이거, 빨리 보내야 해요! 지필묵! 여섯 통을 새로 써야 한대요!”

“무서워!”

“휴대용 지필묵 여기 있다, 신생. 잠깐 마차를 멈춰줄까? 그게 쓰기 편하겠지?”

마지막은 내가 아니라 곽 표두다.

표행을 오래 하다 보면 자신만의 미신이나 징크스가 생긴다는 얘기는 셋째 형한테 들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뻥인 얘기를 단번에 믿을 줄은 몰랐는데.

“됐어, 이거 그냥 장난치는 거야.”

나는 신생의 손에서 행운의 편지를 낚아채 삼매진화로 태워버렸다. 수술 도구를 소독하고 수술 부위를 지질 때 유용한 삼매진화는 이런 자잘한 물건을 태울 때도 참 편리했다.

“앗, 안 돼요! 버리면 더 큰 불운이 온다고 했는데!”

“이게 지금 일곱 통째야. 아무 불운도 안 와.”

그렇다. 이 편지는 처음도 아니었고 두 번째도 아닌, 무려 일곱 번째 도착한 행운의 편지였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전서응까지 보내면서 보내는 거냐고.

처음에는 잘못 도착했나 생각했는데, 내가 어디 있든 저 전서응이 매번 정확히 날아오는 걸 보면 수신인이 나인 건 확실하다.

“현건 녀석도 보증했어. 그냥 평범한 편지야.”

저주나 악의 같은 것이 깃든 물건을 감별하는 데 도사를 따라올 자는 없다. 그리고 현건은 무당의 삼대제자 중 대제자였다. 그런 녀석의 보증이라면 믿을 만했다.

무당신의께서 과거의 도력을 갖고 계셨더라면 더 확실한 보증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참고로 현건은 무당신의를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태양의원에 남았다. 무당에서도 대제자가 가출했네 뭐네 하는 것보다야 신의 옆에 붙어 있는 게 나을 테니까.

장문인은 녀석의 마음을 흔들어 일종의 첩자로 쓰려는 모양이지만, 나는 내가 보아 온 현건을 믿었다. 녀석은 그럴 수 있는 성격이 못 된다.

“현건 도장이 보증했다면 믿을 수 있지만…… 그럼 왜 보내는 거죠? 장난인가? 하지만 그냥 장난에 전서응 같은 귀한 걸…….”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하다.

전서응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전서구야 웬만한 무림문파들은 이메일 보내듯 쓰고 있지만 전서응은 대문파에도 몇 마리 없다고 들었다. 좌수검이 부리는 전서응도 과거 그가 종남의 대제자일 때 받은 거라고 하던데.

심지어 붉은 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저 매는 내가 편지를 확인하고도 한참을 내 머리 위를 빙빙 맴돌다가 사라졌다.

한 번은 쫓아가려고도 해봤는데 어느 순간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사라지더라.

“영물을 넘어 신수에 가까운 놈인 거 같은데 말이지…….”

금동이와 걸왕에게 쫓아보라고도 했지만 둘 다 실패했다. 그쯤이면 정말 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신수를 가지고 왜 장난 편지 같은 걸 보내냐고.

대체 누가, 왜?

“끄응, 찝찝하시겠어요.”

“그냥 받는 족족 태워버리면 그만이야. 이만 가자.”

여정이 시작부터 조금 찝찝해졌지만, 표사들은 이내 얼굴에 남은 불편한 기색을 털어버리고 말을 박찼다. 우리가 탄 마차도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우리의 일차 목적지는 사천 성도.

그곳에 도착해 당가에 방문하고, 이후 운남을 지나 남해 태양궁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

바로 그곳으로 달려도 꽤 오래 걸리는 여정이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경유지가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아이들은 저희가 잘 돌보고 있겠습니다.”

“무는 걱정 마세요! 제가 지킬게요!”

곽 표두와 신생이 자신들만 믿으라며 듬직하게 얘기했다.

원래는 함께 들렀다 가려고 했지만,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일에 무의 몸이 놀란 건지 밤새 열이 올라서 일행은 두고 나만 다녀오게 되었다.

그 편이 내겐 더 편하기도 하지만…….

혼자 움직이니 경공을 최대 속도로 펼칠 수 있어 목표하던 지점에 도착하기까지는 한 시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성.

그 성에는 안강(安康)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객잔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에는 그나마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비루먹은 개나 찌글찌글할 정도로 바짝 마른 쥐나마 보이기도 했다.

무너진 성벽을 벽 삼아 세운 움막에서 민머리에 가사를 입은 승려 하나가 어두운 낯으로 몸을 낮춰 나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아니, 금 의원님 아니십니까?”

승려는 깜짝 놀라 반색하며 내게 달려왔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소림이 섬서를 지원하기 위해 머물고 있는 일종의 전초기지였다.

진법의 중심지였던 서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땅이기에 피해가 적어 보통의 사람들도 접근할 수 있는 땅이고, 동시에 피해를 입었지만 목숨은 부지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이 바로 이곳 안강.

태양의원 본원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한 번 올 기회가 닿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뵐 줄은 몰랐네요. 소림에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나를 보고 반색한 승려는 소림에서 안면을 익혔던 자였다. 그는 내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곳에 오래 머물면 아무리 공력이 대단한 고수라도 타격을 입기에, 십 년을 주기로 제자들이 교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차례가 되었지요.”

“아아, 그렇군요.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승려들의 모습이 보였다. 난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자, 침과 뜸을 놓는 자,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숨진 이에게 독경을 외어주는 자…….

전부 나와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안 그래도 금 의원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소림을 떠나게 되어, 이 생에는 더 이상 뵙기 힘들겠다 하였습니다만. 이리 뵙게 된 것을 보니 부처님의 인도인가 봅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감사인사라니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어찌 한 것이 없다 하십니까. 소림은 금 의원님 덕분에 소생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바른 일을 한 것에 대해 너무 겸손하신 것도 독이 됩니다.”

아니, 겸손이 아니라.

뭘 했어야 자랑스러워하든 겸손해하든 하지?!

물론 소림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반야원의 비리를 파헤쳤고, 관자재암의 혈사를 막았고, 정왕의 딸이 무사히 출산하도록 도왔고, 소림에 불을 지르고 혈겁을 일으킨 모용갑을 쫓았다.

여유가 없어 삼대제자를 받지 못한 소림을 대신해 화산지회에 소림의 대표로 나가게 되기도 했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 이득과 결부된 일들이었다. 오롯이 소림을 위한 마음으로 한 게 아니었단 말이다.

소림의 입장에서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진짜 감사해하기엔…… 그 뒤에 소림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대웅전을 제외한 많은 것들이 타버린 상황, 소림의 위세가 전과 같지 않아 이를 빠르게 복구할 수도 없을 터.

나는 반야원처럼 무료로 중생구제를 하는 행위를 그만두고 사람들이 자생력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선에서만 지원을 하라고 조언했다.

거기에 소림도 옛날의 고고함을 버리고 돈을 벌라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이 원하는 꿈은 그저 꿈에 그칠 뿐일 테니까.

하지만 평생 산에 틀어박혀 불도를 닦고 사람들을 돕기만 하던 승려들이 언제 돈을 벌어봤겠는가?

“제가 금전적으로 자생할 수 있는 방도를 전해드린다 했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서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소림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운데, 제 공이 있다니 겸연쩍스럽군요.”

바로 항주에 갔다가 본원에 돌아와서는 태양의원을 돌보느라 바빴다. 솔직히 말해 내 마음속에서 소림은 제3, 제4순위 정도로 밀려 있었다.

거기에 나는 소림 방장에게, 금리에게 조언을 구하면 도움을 줄 거라고 얘기를 했었다.

근데 그에 관련된 서찰을 창천 녀석이 들고 날랐(?)단 말이지.

본원에 돌아와서 그와 관련된 얘기를 해놓긴 했는데, 내가 본원을 돌보는 과정에서 벌인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 그쪽까지 신경 쓰진 못했을 거다. 분명 나 몰래 며칠씩 밤을 새웠을걸?

조언만 해놓고 실질적인 도움을 안 주는 것만큼 얄미운 일이 없는데. 그걸 생각하면 소림한테는 미안한…….

……잠깐만, 이거 지금 나 돌려 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도와준다고 해놓고 안 도와줬다고?

“금 의원께서는 참으로 선량하십니다. 사람이란 무릇 자신의 발에 박힌 가시가 남의 피눈물보다 아픈 법. 허나 금 의원께서는 저희의 사정을 신경 쓰지 못한 걸 계속 마음에 담아두셨군요. 방장께서도 시주의 그런 부분을 꿰뚫어보시고 많은 것을 베푸신 것이겠지요.”

승려는 온화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호의는 진심이었다. 순간 돌려 깐다고 의심한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저희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것을 해주려 하면 아니 된다, 물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라. 스스로 일어날 힘을 기르는 것을 도와주어라…… 저희는 그 말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잠깐, 그렇다면―.”

“저희는 저희 스스로 방법을 찾았습니다. 금 의원님께서 나서주셨다면 더욱 효과적인 계책을 제시해주셨겠지만, 저희의 방법도 아주 나쁘진 않은 듯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신경을 못 쓰는 사이 소림은 자신들 스스로 자생할 방법을 실행에 옮긴 모양이었다. 승려들이라 돈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천년소림의 불도가 만류귀종으로 그런 쪽까지 통한 건가?

“그때 그 일이 아니었다면 소림은 결코 재기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겠지요. 부처가 다른 곳에 있겠습니까.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나섰으나 결국 우리 또한 중생임을 잊었던 어리석은 불자들을 깨우치신 금 의원님 같은 분의 마음속에 부처가 있는 것입니다.”

어, 그게, 감사합니다.

감사한데, 조금 닭살이 돋는군요.

……평범한 사람이 부처 소리를 들으면 몸이 배배 꼬이고 속이 불편하고 오글오글한 게 당연한 거겠지?

솔직히 너무 진심으로 하는 상찬이라서 아니라고 손사래도 못 치겠다.

“그래서 그 소림의 방책은 어떤 겁니까?”

말을 돌리자. 그냥 뒀다간 진짜 육도윤회를 넘어 열반에 들겠다.

소림이 마련했다는 자구책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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