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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81화 (281/350)

281화

출발 전까지 몇 가지 준비를 하는 데 며칠이 소요되었다. 빨리 짐을 꾸리고 얘기가 나온 당일 출발할 수도 있었지만, 먼 여정을 가는 데는 그만큼 충분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어른들도 그런데 아이들은 또 어떻겠는가.

사실 무의 입장에선, 태양의원에 정착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자마자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거다.

지금보다 어릴 적의 기억이 희미하니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무는 또다시 낯선 곳에 남겨지는 것이다.

두 번째 집이 생기는 거라고, 갔다가 다시 와도 된다고 했지만 사실 그게 말처럼 쉽겠나.

어떻게 보면 나는 무에게 어른의 사정으로 인한 거짓말을 한 셈이다.

그러니 떠나는 것만이라도 넉넉히 시간을 주는 수밖에.

사실 다른 아이들과 떨어지는 것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한이었다.

납치된 이후 인신매매 시장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던, 모두가 남매라 오해할 만큼 달라붙어 있던 두 아이.

둘을 떼어놔야 한다는 사실에 관련된 어른 모두가 불편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사정을 설명한다면 남해태양궁에서도 한을 받아주겠지만, 한의 체질은 결코 더운 지방에서 살 수 있는 체질이 아니었다. 함께 가는 것은 한에게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두 아이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둘이 헤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 일부러 여유롭게 준비를 한 건데…….

“부러워. 나도 두 번째 집 갖고 싶다. 왜 빨리 안 가?”

무가 떠난다는데도 한은 덤덤했다.

어리지만 무보다는 성숙한 아이였으니, 어쩌면 무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걸 이해했을 거다. 그럼에도 한은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나 가도, 너 괜찮아?”

“가는 거 아니고, 집 생기는 거잖아.”

“어, 그렇지.”

“그럼 빨리 가. 나중에 자랑해줘.”

한이 그렇게 말해준 덕분에 무도 머뭇거리는 대신, 두 번째 집에 간다며 여기저기 자랑을 하고 다녔다. 길을 떠났는데 혹시라도 집에 돌아가겠다고 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그럴 일은 없을 거 같다.

거기에 한은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저도 집 찾아줘요. 금 의원님은 알죠?”

한은 태양의원에 와서 안정을 되찾은 직후 빠르게 말을 익혔다.

아니, 그 전까지 중원 말을 못 하는 척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말을 모른 척해야 넘길 수 있는 위기도 있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생 수준으로 중원의 말은 물론 글자까지 아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대충 짚이는 건 있어. 하지만 괜찮겠니?”

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 겨울에도 서늘함이 느껴지는 체온, 남다른 오성까지.

무림에 발을 담근 의원으로서 한 가지 가설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의원으로서도 무림인으로서도 자격이 없는 것이다.

구음절맥.

체내의 기가 극단적으로 음기에 치우친 체질. 그 음기가 절정에 달하는 스무 살쯤 기맥이 막혀 목숨을 잃는 일종의 불치병이다.

그 대신 뛰어난 오성을 갖고 태어나는 편이라 체질에 맞는 무공을 익히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뿐더러 엄청난 실력의 무인이 될 수 있다고 전해진다.

뛰어난 오성 외에 시리도록 아름다운 미모를 타고난다고도 하지.

한의 경우는 구음절맥까진 아니다. 오음절맥 정도 될까?

그 정도도 보통에 비하면 위험한 거긴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훌륭한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며 잘 관리한다면 남들만큼의 천수는 누릴 수 있다.

원래의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고 태양의원에서 지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물어볼게. 괜찮겠어? 무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너도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냐. 여기서 살아도 괜찮단다.”

그리고 이러한 음기 절맥이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는 핏줄이 있다.

중원의 북쪽 끝, 그곳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있는 혹한의 땅.

그곳을 지배하는 새외의 세력, 북해빙궁.

북해빙궁의 궁주들은 대대로 구음절맥의 소유자이며 그 핏줄들은 그와 유사한 증상을 타고난다고 들었다.

무림세가들이 자신의 체질을 극복하기 위해 체질에 맞는 무공을 개발, 발전시킨 것처럼, 그들은 특유의 빙공을 익혀 혹한의 땅을 다스려왔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한이 태양의원에 온 직후지만, 나와 한의 맥을 짚은 의원들은 이를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네 진짜 집은, 궁주가 될 자가 아니면 다 죽임을 당한다 들었어. 우리는 네가 그 때문에 도망친 게 아닐까, 아니지, 너는 그러기엔 너무 어리니까. 너의 어머니나 다른 가족들이 너를 중원으로 보낸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지.”

한의 일은 무와는 다르다.

조련사의 말만 믿을 수는 없기에 개방과 하오문에도 확인을 요청했고, 바로 어제 개방에서 이를 보증하는 증거, 남해태양궁에서 운남과 사천 일대에 붙였다는 무의 용모파기를 받은 참이었다.

돌아간다면 무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에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한은…….

“언니가 있어요.”

“언니가 너를 도망치게 했니?”

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나중에 다시 데리러 온댔어. 언니는 강하니까, 이제 괜찮을 거예요.”

강하다, 나중에 다시 데리러 온댔다, 라.

한을 도망치게 한 언니라는 사람이 차기 궁주 후보쯤 됐나 보다.

본인이 궁주가 된다면 동생을 죽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이 부분은 알아보는 게 좋겠군.

“그러면 이렇게 하자. 한, 네 원래 이름과 네 언니의 이름을 알려주면, 네가 돌아가도 괜찮을지 우리가 확인을 해볼게. 어떠니?”

“좋아요. 나는 설한아, 언니는 설린아예요.”

“설한아, 그리고 설린아…… 좋아. 확인해 보고, 네가 안전할 거 같다 판단되면 북해빙궁에 네 소재를 알려줄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차. 그게 아니라면 한의 언니인 설린아는 궁주가 못 되고 죽었을 거라는 뜻인데.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어린애 앞에서 할 얘기가 아닌데 실수했다.

“……저, 그땐 여기 있어도 돼요?”

“당연하지. 당연하고말고. 여기가 네 집인데 왜 그런 소리를 해?”

순식간에 어린애다운 불안감을 드러내며 울먹이는 한을, 나는 한참 동안 다독여주었다.

* * *

그렇게 며칠의 준비 시간을 보내고 출발 당일.

“금 의원님 회진 시작하십니다!”

아침 일찍 오전 회진이 시작되었다.

회진은 입원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루 2회 시행하는 것으로,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처방을 조율하는 동시에 환자들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는 일이다.

신기하게도 내가 얼굴만 비춰줘도 상태가 호전되는 환자들이 있단 말이지.

명의라 이름난 의원이 자기를 한 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샘솟는 걸까?

전생에서도 죽을병에 걸린 환자가 희망을 갖고 치료에 임해 기적을 보는 경우들이 있었고, 위약 효과가 실제로 기능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좀 귀찮긴 하지만 안 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제일 효율 높은 치료 아닌가.

“오늘부터 한동안 회진을 돌면서, 의생들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선한 시각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정말 현명하신 생각입니다, 금 의원님.”

“그리고 각 주치의분들도 환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여과 없이 피력하시길 바랍니다. 요새 제 눈치를 보면서 무조건 제 견해를 따라가려는 분들이 계시는데, 저는 그런 방향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문제가 있다면 말을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는 한발 물러나 있을 겁니다.”

“예, 금 의원님.”

“그러면 갑시다, 오늘도 바쁜 하루가 되겠어요.”

나는 지붕 위에 몸을 숨기고 1번 금태양이 나를 대신해 회진에 나서는 모양을 보고 있었다.

1번 금태양의 실력은 태양의원의 다른 의원들에 비해 그렇게 떨어지는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현대인의 상식이 그에겐 없기에, 내가 없는 동안은 태양의원의 일원들에게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주라고 했다.

“나 어떡해, 떨려. 진짜 내 의견을 얘기해도 되는 건가? 풍 방에 있는 그 환자, 아무리 봐도 처방이 안 맞는 거 같았거든. 주치의원님은 내 주장이 말도 안 된다고 했는데.”

“밑져야 본전인데 뭐 어때? 한번 얘기해 봐. 금 의원님이 저렇게 얘기하셨는데, 뒤에서 뭐라고 하겠어?”

의생들은 그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1번 금태양의 뒤를 따랐고,

“좀 뜨끔하네요.”

“의원님도요?”

“솔직히 우리가 최근 금 의원님의 탁월한 발상에 기대는 면이 있었지요. 오늘은 금 의원님과 의견이 달라도 제대로 얘기를 꺼내봐야겠습니다.”

“박 의원님이 그러시니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군요. 사실 저번에 금 의원님이 제시한 처방보다 더 괜찮을 거 같은 방법이 떠올랐는데 말을 못 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먼저 선수 좀 칩니다?”

의원들은 그런 말을 주고받더니 이내 환자 앞에서 자신의 의견들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의생들도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 논의에 끼어들었다.

빠르게 훑고 지나가야 하는 회진의 원래 취지에는 맞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타개책이 나올 수도 있겠지.

의원은 이렇게 두면 한동안 걱정 없을 거 같군.

“그럼 난 분원으로 가볼 테니, 금 의원님도 보중하십셔!”

“이놈아, 평소에도 말투를 조심하랬지.”

“아, 아픕니다! 분원에 가서만 조심하면 되지, 왜 아는 사람들끼리 있을 때까지 이러신대?”

“어허, 이 녀석이?”

“아이쿠, 진짜 가보겠습니다. 안 그랬다간 뒤통수가 남아나질 않겠네!”

3번 금태양은 십이월의 한 사람인 노인과 분원 순회를 떠났다. 1번에 비하면 좀 탐탁잖아서, 혼자 보내기에는 솔직히 불안했는데. 십이월이 자청해 같이 가준다고 해서 걱정을 덜었다. 하오문의 전대 일원이었던 만큼 정보에도 빠삭하니 감당 못 할 상황까지 벌어지진 않겠지.

“그러면 우리도 가볼까?”

우리 일행은 나와 무, 신생, 그리고 조련사. 거기에 사천까지 가는 길을 책임질 금왕표국의 표사들이 있었다. 나와 신생만이면 모를까, 무나 조련사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차를 타야 했고 그 과정에서 길잡이 겸 표사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다.

“좀 떨리는군요. 사천은 처음이지만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나 데려갈 수도 있었지만, 이번 일에는 나와 가장 손발을 많이 맞춰본 제7표행단의 곽 표두와 그 수하들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원래 금왕표국의 전속 경비 겸 이리저리 부릴 수 있는 전담팀으로 장기 고용을 해둔 상황인데, 태양의원의 영역이 넓어지며 고용 인원도 몇 배로 늘었다.

그로 인한 비용이 상당한 상황이라 전담인력 정도는 자체고용을 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를 위해서 겸사겸사 얘기를 해볼 겸 주요 인원을 데려가는 것이다.

삐이이익―!

마차가 출발하려는데 하늘에서 날카로운 새 소리가 귀를 찔렀다. 고개를 들자 새빨간 색의, 무언가를 물고 있는 매 하나가 우리의 머리 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녀석은 정확히 내게 자신이 물고 있던 것을 떨어트렸다.

나는 떨어지는 것을 낚아채 물건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건 대나무로 만든 작은 서함이었다.

전서구 등으로 서찰을 보낼 때 쓰는, 손가락만 한 아주 작은 물건.

그 안에는 서찰보다는 쪽지에 가까운 작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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