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어어, 금 의원께서 함께 가실 필요까지는―.”
“나도 그 방향에 볼 일이 있거든요.”
안 그래도 사천당가에 대한 얘기를 하던 차다.
정회원이 되기 위한 표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당당의 근황도 살필 겸 당가에 한번 가볼까 생각은 했지만, 그것만 목적으로 삼고 가기엔 솔직히 사천과 호북이 그렇게 가까운 건 아니란 말이지.
남해태양궁은 사천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거리지만, 한 곳만 가려고 하면 엄두가 안 나는 길도 목적지가 두 군데면 갈 만하다.
“어차피 그냥 가셔도 금왕표국의 표사들을 붙여드릴 겁니다. 무는 우리 태양의원의 식구이기도 한데, 그 먼 길을 어찌 그냥 보내겠습니까?”
내가 안 따라가도 누군가를 붙일 거라는 사실을 강조하자 조련사가 생각에 잠겼다. 어느 쪽이 이득인가 따지고 있나 본데.
“……무, 안 가.”
그때 무가 조련사 옆에서 내 쪽으로 쪼르르 달려와 내 뒤에 숨었다. 그 고사리 손으로 내 옷자락을 와락 움켜쥔 채였다.
“나 살 거야, 여기. 내 집.”
“아, 아니, 도련님! 여긴 도련님 집이 아닙니다. 남해태양궁이 도련님 집이에요. 거기 궁주님하고 차기궁주님도 있고, 도련님 아버지와 할아버지요. 가면 여기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으실 텐데―.”
무가 내 뒤로 숨어 나오려고 하질 않자 조련사가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일부러 그 상황을 가만 내버려두다가 입을 열었다.
“무, 그러지 말고 한번 가보자.”
“꼭 가야 돼?”
“집이 또 생기는 거잖아. 좋지 않아?”
“또?”
어린애는 어린애의 언어로 다뤄야지. 신생이야 워낙 어릴 때부터 산전수전 겪은 아이라 그 나이 또래에 비해 훨씬 성숙해서 어른의 언어로도 대화가 가능하지만, 무는 아니다. 특히 납치와 인신매매라는 큰 고통을 겪은 탓에 또래보다 발달이 느렸다.
“집이 두 개인 거야. 신생 형아도 집이 두 개인 거 알지?”
“응. 여기 집하고, 거지 집. 두 개.”
거지 집은 항주를 말하는 거다. 저번에 항주에 다녀온 이후, 신생은 과거의 일에 대한 마음이 많이 풀린 모양인지 아이들과 놀 때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 스승님! 아니에요! 그건 그냥 제가 괜히 한 말이고, 제 집은 태양의원 뿐인―.”
쉿. 내 입에 검지를 갖다 대자 신생이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무언가 항변하고 싶어 했지만 당장은 무를 설득하는 게 우선이라는 걸 이해한 거다. 이거 봐, 얘는 어른의 언어가 통한다니까.
“그 집은 신생 형아네보다 더 크고 화려할걸? 신생 형아한테 거지 가족도 많은 거 알지. 거지 집에 사는 거지 가족.”
“응! 거기도 가족 있어?”
“그러엄. 무 아빠랑, 엄마랑, 할아버지랑, 사촌들도 많을걸? 남해태양궁이니까 동물 친구도 많을 거야.”
“동물!”
무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무는 다른 애들에 비해 특히나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동물들도 무를 잘 따랐다. 나 외의 인간은 크게 관심 없는 금동이도 무가 놀자고 하면 곧잘 어울려줄 정도니까.
남해태양궁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동물과의 친화력이 높다고 했다.
왜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못했을까?
바빠서 무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쓴 것도 있겠지.
“어때, 나랑 가볼래? 가서 마음에 들면 좀 놀다가 또 태양의원으로 돌아오는 거야.”
“우움…… 그럼 한은?”
한은 남매 중 여자애. 사실 우리가 남매라고 부르고 있긴 하지만, 둘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 필시 다른 경로로 팔려온 어린애 둘이 서로를 의지하며 붙어 있었던 것이리라.
“한은 더위를 많이 타잖아. 남해는 엄청 더워. 이번에는 나랑 가자.”
“응!”
갔다가 다시 올 수 있다고 말을 한 탓인지 아까와 달리 무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실제로도 나이가 차면 오고갈 수 있을 거고.
나는 봤지? 하는 눈빛으로 조련사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는 낭패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를 알아본 당신의 공을 숨기거나 축소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 그런 거 가지고 쩨쩨하게 굴 생각 없습니다.”
물론 저쪽은 쩨쩨하게 굴려고 했지만. 서민의 입장에서 잠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지.
“스승님, 저도 갈래요!”
“의생들은 어쩌고?”
“이제 다들 기본은 됐어요. 제가 없어도 된다고요.”
하긴, 의학원도 이제 기틀은 잡혔다. 나도 나 대신 민초신의가 상급반을 맡아줄 수 있으니 빠지는 거다.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관심이 많아 보이시더라고. 지금까지는 특강 형식으로 한 번 얼굴 비추는 정도였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시면 학생들도 좋아하겠지.
“좋아, 그렇게 하자. 함께 가는 거야.”
“야호! 신난다! 무, 나랑도 같이 가는 거야!”
신생이 무와 손을 잡고는 아이들에게 새 집이 생기는 걸 자랑한다며 뛰쳐나갔다. 조련사와는 가는 길을 간단하게 상의하고 내보냈고, 이제 금리가 남았다.
“삼촌.”
내가 조련사, 그리고 무와 얘기하는 동안 금리는 표정을 굳히고 문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화났나? 돌아온 지 얼마 안 된데다가, 당분간 어디 멀리 안 가기로 했는데 상의도 없이 말을 바꿨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미안해. 근데 가는 게 이득인 상황이긴 하잖아. 내가 당가의 표를 얻어올게.”
“……남해태양궁의 표도 얻어 오시면 확실할 겁니다.”
“응?”
금리는 한참 뒤적거리고 있던 문서를 내게 내밀었다.
“그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부분을 보십시오.”
“작은 글씨? 이거? 진짜 작게도 썼네. 어디 보자, 예외조항…… 새외 사궁을 명예 정회원으로 임명……?!”
“명예 회원에 대한 조항도 살펴보았는데, 한 번도 새외가 참석한 적이 없을 뿐 안건 투표권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 말없이 서류만 보고 있더니, 그걸 확인하고 있던 거였어?!
말이 서류를 봤다인 거지 이게 한두 장 분량도 아니다. 수학의 정석 같은 책이 열댓 권에 일반 문서가 수백 장, 거기에 죽편으로 된 내용은 산처럼 쌓여 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그 내용을 찾아냈다는 건 이미 이걸 전부 한 번 이상 읽었고, 어디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는 거다.
……인터넷이 안 부럽다. 살아있는 ctrl+F가 여기 있네.
내가 총관 하나는 잘 뽑았어.
“의맹회의 준비는 맡겨주십시오. 이미 논의한 구상이 있으니 이에 맞춰 최선의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당가를 넘어 남해태양궁까지 다녀오면 의맹회의가 코앞이겠지. 아직 무당이 타 문파에 연락조차 넣지 않기는 했지만, 우리를 곤란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 일정을 당길 테니까. 우리는 빠듯하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게 현명하다.
“그러면 준비는 부탁할게. 그나저나…… 완성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한데, 어쩔 수 없군.”
“그래도 필요할 때 쓸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바로 가서 확인해봐야겠어. 갔다가 출발 준비를 할 테니 그렇게 알아둬.”
“예, 다녀오십시오.”
나는 총관실을 나와 태양의원을 둘러싼 뒷산으로 향했다.
산보를 가듯 가벼운 걸음걸이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부러 그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주면서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내 스스로 걸음이 너무 느려서 답답할 지경이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밑밥을 깔아놔야지.
그렇게 느긋하게 가다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산중에 들어서서는 거리낄 것 없이 신법으로 몸을 날렸다.
내가 가는 곳은 이 산의 중턱에 있었다. 약초꾼들이나 찾을 법한 외진 길을 따라가던 나는 어느 지점에서 훌쩍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절벽에서 한참 밑으로 떨어진 계곡에 발 딛을 자리가 있었다.
“누가 찾아온 흔적은 없군.”
절벽 밑, 풀과 흙으로 가득한 주변을 살피면서 중얼거린 후 나는 삐져나온 나무뿌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흙으로 된 문이 벌컥 열렸고, 나는 그 안의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둠은 잠시였다. 모퉁이를 돌자 희미한 빛이 주변을 밝혔다.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낯짝을 그래 해가지고 사람들이 속겠어? 거 눈썹을 더 치켜 떠보라고, 그렇지, 잘한다!”
“에헴, 내가 좀 하죠?”
“이거 봐, 표정 좀 닮게 지어놓으니까 목소리가 틀렸잖아. 다시!”
늙은 노인과 나를 닮은 사내의 목소리.
“혀의 색은 엷고 설태는 없다. 맥이 느리고 기운이 허하니 생맥산 합 육군자탕가감을 십여 제 정도 처방한다― 역시 장중경 어르신은 위대해!”
의술 저서를 읽으며 활기가 찬 사내의 목소리.
나는 늘어진 발을 걷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는가?”
“어르신, 좀 어떻습니까?”
“어떻고 자시고, 내가 정한 기한 내에는 특별히 들를 일이 없다 했는데. 이리 도련님이 오신 걸 보아하니 이자들이 필요한 일이 일찍이도 생겼나 보군.”
“정답입니다.”
나는 웃으며 가져온 과자 바구니를 노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 노인은 항주에서 온 십이월 중 하나로, 여기 있는 두 사내에게 역용술과 연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금 의원님.”
“어서 오셔. 근데 나 목소리 금 의원하고 꽤 비슷해지지 않았나? 지금 말투는 김진을 흉내 내고 있었는데.”
그리고 여기 있는 두 사내는, 내 눈앞에서 나를 사칭하다가 딱 걸린 가짜 금태양들이었다.
“말씀한 기한까지 아직 반도 안 되었는데, 이 정도면 훌륭한데요?”
“그 꼬장꼬장한 할망구하고 일해 버릇해서 그렇지. 항상 기한보다 일찍 마치는 게 버릇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어찌나 쪼았는데.”
“그래도요. 역시 모셔오길 잘 했습니다.”
“뭐, 그래 봤자 내가 한 거라곤 간단한 연기나 말투 교정 정도야. 얼굴은 사실상 도련님이 손본 게 다지.”
그 말에 3번 금태양이 어깨를 으쓱하며 콧대를 세웠다.
얼굴이 괴이하고 성격이 거칠던 3번 금태양은 현재의 나와 나름 흡사한 얼굴이 되었다. 내 얼굴의 하위호환이라고 할까나? 신생도 얼핏 지나치면서 보면 헷갈리겠다고 할 정도였다.
인피면구나 내공으로 얼굴을 바꾼 것이 아니다. 성형수술의 결과였다.
심하게 손댄 건 아니고, 피부는 복약을 통해 완화하고 인상에 큰 영향을 주는 몇 군데만 살짝 손을 봤다. 이것도 다 삼생초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지.
“그리고 저놈은 할 것도 없었어. 말투야 원래 비슷하고, 의술 공부는 알아서 했으니까.”
1번 금태양은 의술 실력이 상당했기에 얼굴은 조금만 손보고 내가 의술 지도를 했다. 장중경의 의서를 비롯해 각종 의서를 던져주고 누가 물어보면 자판기처럼 척척 나올 정도로 공부를 시켰다. 다행히 의술에 있어서만큼은 진심인 자라 그 일에 불만을 가지진 않았다.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나를 대신해 연기를 할 겁니다.”
두 사람은 태양의원을 상대로 큰 사기를 치려고 했다.
금리나 장 의원은 호되게 혼을 내거나 죽음으로 본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그들의 다른 쓸모를 발견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상황, 그리고 넓어진 태양의원의 관리를 위해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한 번 당신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기회도 주었습니다. 내 아량을 배신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두 번은 없을 테니까요.”
내가 진상이나 거듭 나쁜 마음을 먹는 자에게는 용서가 없다는 것도 철저히 가르쳤다. 하긴, 그 부분은 십이월인 노인이 제대로 겁을 줬을 거다. 두 사람의 얼굴이 결연하게 물들었다.
“죽었어도 할 말이 없는 저흽니다. 허나 금 의원께선 저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지요. 전이었다면 꿈에도 못 꿀 공부를 하고 있으니, 어찌 그 뜻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나, 나도! 이 얼굴만 봐도 열심히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고!”
“이놈아, 흥분할 때 말투 조심하랬지?”
“아악!”
노인이 3번 금태양의 겨드랑이를 꼬집었다. 저런, 저기 급소인데.
“이놈들은 내가 두고 보면서 관리할 테니 그런 염려는 내려두고, 어딘들 편하게 다녀오시게.”
“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부재로 인한 걱정은 덜었다. 이제 가서 목표를 손에 넣는 것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