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의맹회의.
그 회의에서 무림맹 부속인 의맹의 정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회담을 진행한다.
회담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각 의문들의 연구 성과와 공동 연구주제 등이 대부분.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태양의원의 정회원 승격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만약 의맹회의를 태양의원에서 주최할 수 있다면, 정회원 승격에 큰 도움이 될 거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통하는 법이니까.
“……정왕 전하의 혜안은 놀랍사오나, 의맹 회의는 무림맹 회의와 함께 열립니다. 그렇다면 태양의원에서 무림맹 회의 또한 열려야 하니 그것은 무리한 제안입니다.”
“하지만 무림맹 회의는 화산지회와 함께 열려야 해서, 똑같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더 이상 난감한 척을 할 필요는 없지.
장문인도 이 모든 것이 내 계획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이 이상은 연기를 하기보단 내 뜻대로 끌고 나가는 게 맞다.
“의맹회의가 꼭 화산지회와 같이 열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돌아가는 정황을 봐서는 일 년도 더 걸릴 거 같은데. 그렇게 되면 중원의 의술 발전에 크나큰 차질을 빚을 겁니다.”
의맹회의에서 각 문파가 각자의 성과를 교류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건, 무당 장문인에게 ‘이런 명분이 있으니까, 해!’라고 말해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타 문파의 강력한 무사들을 상주하게 해준다는데, 이 정도 떠먹여주면 알아서 해야지.
일 년 더 연장해도 나는 나쁠 거 없다. 그동안 더욱더 태양의원의 입지를 자리매김하면 될 일이다. 솔직히 그간 의맹회의가 무림맹 회의와 함께 밀려서 나는 큰 덕을 봤지.
초반에 의맹회의에 불려갔다면 정회원 자격을 따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어떠한가, 장문인? 내 생각에는 이 사람 말이 크게 틀린 건 아니지 싶어. 이번에 우리 딸아이가 태양의원에 큰 신세를 졌는데, 그 과정에서 딸아이의 주치의를 맡고 있던 아미승이 큰 감명을 받고 태양의원에 의술교류를 하러 왔다네. 이게 다 의맹 회의가 늦어진 탓이 아니던가? 서둘러 회의를 개최해 성과를 주고받으면 모두의 명망이 더욱 높아질 걸세.”
정왕이 한 번 더 장문인의 등을 떠밀어주었다. 이 정도 명분을 만들어주었으면 장문인도 뒤로 물러설 수가 없다.
“크흠, 무량수불. 본산으로 돌아가 이에 관해 검토를 해보도록 하지요. ……허나 쉽지는 않을 거외다.”
장문인이 나를 보며 나직이 뱉었다.
태양의원에서 회의를 주최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내 뜻대로 원하는 걸 얻기 힘들 거라는 눈빛.
그간 대문파들에서만 열리던 회의다.
태양의원이 확실히 엄청난 성장세를 거두긴 했지만 역사나 전통 등의 면에서 무당이나 소림 같은 곳의 위세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어찌저찌 의맹회의를 열어도, 모인 사람들이 보기에 격이 안 맞는다 여겨진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논의가 끝났으니 신의와 잠시 얘기를 나누시고, 호위를 두고 돌아가시지요. 할 일이 많으실 터인데 시간을 오래 보내셔야 되겠어요.”
배려하는 척하기는.
그 정도도 계산 안 하고 세운 계획이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내 반응이 아니꼬운지, 장문인은 한참 동안 나를 뚫어져라 보다가 이내 무당신의에게로 몸을 돌렸다. 무당신의는 며칠 푹 쉬게 해두었으니, 장문인과 얘기 좀 나눈다고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지는 않을 터.
“저자들의 동태는 우리가 살피도록 하겠다. 그대는 그대 할 일에 집중하도록.”
좌수검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나는 감사의 표시로 꾸벅 인사를 하고 총관실로 향했다.
“어찌 되었습니까?”
기다리고 있었는지, 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금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끄덕이자 금리의 두 뺨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다행입니다. 무모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삼촌이라면 분명 계책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진정 동물들의 등장을 도사들이 신비로워하였습니까.”
“응, 생각 이상으로. 장문인이나 수신호위들을 흔들려고 한 일이었는데, 신의께서 껌뻑 넘어오시더라고.”
“정말 그랬습니까. 그렇다면 더 볼 일도 없었군요. 다행입니다.”
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여태까지 작성하고 있던 문서를 집어 들어 내게 내밀었다.
“그 계획이 먹히지 않았어도, 의맹회의 건은 나서서 해줬을 거야. 우리가 제대로 망신당하길 바랄 테니까.”
문서는 태양의원에서 의맹회의를 열게 될 경우 준비해야 할 부분과 예상효과를 정리해둔 것이었다.
“확실히 만만치 않은데.”
준비에 드는 품이 결코 적지 않았다. 정확히는 돈이 많이 들었다.
일단 사람이 온다. 구파일방에 오대세가만 합쳐도 열다섯 개다. 거기서 대표 한 사람만 올 리가 없으니, 최소 오백여 명은 온다고 봐야 한다.
거기에 이들만 오는 게 아니다.
정회원에 속하지 못하는 준회원들도 참석한다.
정회원들의 회의에 끼지는 못하지만, 의맹회의에서 진행하는 일반 의원들을 위한 행사도 있기에 이에 참석하러 오는 것이다.
무림맹 회의로 치면, 화산지회에 참석해 이름을 널리 알리려는 것과 비슷할까?
명망이 드높은 의원이 강론을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실험적인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뜻이 있는 의원들이라면 꼭 참석을 한단다.
“지난번 의맹회의에 참석한 일반 의원들이 삼천 명이라.”
“거기에 의맹회의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고려를 해야 합니다. 정왕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왕부나 귀족들도 주치의를 구할 겸 참석한다고 하더군요.”
“의원만 삼사천 명에 일반 구경꾼, 귀빈까지. 만 명은 잡아야 하는 거 아냐?”
“대문파가 아니라 참석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쳐도, 최소 그 정도 잡아야 할 겁니다.”
“엄청나네. 이거 어떻게 다 재워?”
일단 그들의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최대 관건이다.
우리가 공짜로 재워준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먹고 잘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거다.
“두 객잔과는 임시 숙소를 증설하자고 논의할 계획입니다. 진미당도 아직 건물을 올리지 않았으니 고모님과도 얘기를 해보고요. 옆 마을과 수시로 오고 가는 표마차를 두고 그곳에도 숙박을 확보해야 할 거 같습니다.”
“태양의원의 권역이 넓어지겠군.”
“예. 마침 그곳에 봐둔 작은 장원이 있습니다. 가격이 저렴한데, 풍광은 이곳에 못지않게 수려합니다. 그곳을 귀빈용으로 개조했다가, 나중에 분원으로 사용하면 될 거 같습니다.”
“비용은?”
“빠듯합니다만, 금왕전장에서 좋은 조건으로 출자를 받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빌리는 건 최소한도로 하고, 부족한 건 이걸로 해.”
나는 품 안에 넣어놨던 전표를 내밀었다. 장 의원의 집 지하에서 발견한 금괴를 전표로 바꾼 것 전부였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출처는 비밀이야. 그리고 다른 경로로도 돈은 마련할 수 있어. 금왕전장과의 관계를 위해서 어느 정도 융통을 할 필요성은 있지만 너무 많이 빌리진 마.”
나는 은 파파의 뒷주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반합에 대는 돈도 엄청나니 어느 정도 내 쪽으로 땡겨와도 되지 않을까?
……아니지, 잠깐만.
“아냐. 반대로 생각하자. 금왕전장에 넉넉하게 돈을 빌려. 이건 필요할 때를 위해서 아껴두고. 대신 누님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자고.”
“다른 묘안이 있으십니까?”
“금왕전장의 분점. 이곳 북촌에 분점을 내달라고 하자. 어차피 그 정도 큰 금액이 움직이려면 분점 하나 정도는 내줘도 괜찮잖아?”
처음에는 의맹회의를 위한 구색을 맞추려던 건데, 생각하다 보니 다른 쪽으로 머리가 굴러갔다. 일석이조, 도랑 치고 가재 잡는 방법 말이다.
“금왕전장의 분점, 거기에 금왕표국도 분점을 달라고 하자. 여기 통과하는 표행이 엄청나게 늘었잖아. 게다가 우리가 호위 명목으로도 표사를 쓰는데 못 할 거 없지 않겠어?”
“가능은 할 겁니다. 사업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이니 아버지께서도 두 분께 뭐라 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그래. 거기에 지금 손양 누나가 산기슭에 공방을 짓고 있지?”
금손양은 태양의원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특히 태양의원의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흥미로운 실험 등을 좋아했고, 이를 시도하기 위한 도구라면 얼마든지 만들어주겠다며 아예 공방 부지를 사 건물을 올리고 있었다.
무한의 금왕공방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크기가 결코 작지는 않았다. 듣자 하니 무한의 공방은 장인들이 너무 많아서, 연계가 잘 되는 건 좋지만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장인도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을 데리고 올 생각으로 꽤 크게 짓나 보던데…….
“금왕전장, 금왕표국, 그리고 금왕공방의 분점. 진미당은 아니지만, 풍월루가 진미당을 위한 곳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알지. 거기에 내가 차린 태양의원도 있고.”
나는 문서의 뒷장에 있는 북촌 지도를 보며 전장과 표국의 분점이 위치할 만한 자리를 손으로 짚었다.
“그렇게 되면, 이곳이 제2의 금가장이 되는 거야.”
집안의 골칫거리로 태어나 큰 형님의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던 이십 년, 집을 나올 때 겪었던 설움. 그 모든 것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둬 다시 금가장에 발을 들이면서 해소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손으로 일군 터전에 제2의 금가장을 만든다고 하니까 괜히 떨린다.
아니, 설렌다.
“제2의 금가장이라니요. 아닙니다.”
“역시 좀 그런가? 금왕상단이 안 왔으니까?”
“이곳은 금가장을 떠난 삼촌께서 직접 꾸리신 것. 금가장의 구성원들에게 분점을 내게 하는 것도 인정이나 가족으로서의 애정 때문만이 아닌, 삼촌의 능력에 기반한 것입니다. 제2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뭐가 좋다고 생각해?”
금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가 입을 열었다.
“신(新) 금가장.”
그리고는 그 예쁜 얼굴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금왕상단은 없어도 됩니다. 제가 있으니까.”
신 금가장이라.
맞네, 제2의 금가장이라고 하면 무한 쪽이 제1이 되니까. 이쪽이 무슨 분점 같잖아.
하지만 신 금가장이라고 하면 무한 쪽이 구 금가장이 된다.
새롭고 젊은 느낌, 그러면서도 무한의 본가와는 거리를 두는 이름.
“그래. 여기엔 내 조카가 있지. 신 금가장, 좋다.”
이름이란 참 신기한 성격을 가졌다.
의맹회의를 북촌에서 잘 치를 수 있을까 고민이 앞섰는데, 신 금가장에서 회의를 주재한다고 하니까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면 예산과 기획 부분은 이대로 진행하면 될 거 같고, 의원 행사는 장 의원과 한 의원이 맡아서 꾸려주기로 했고, 남은 건 하나군.”
의맹회의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태양의원이 목표했던 것.
“의맹 정회원, 과연 몇 곳이나 내 편을 들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