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이번 일에 있어서 내 목표는 하나였다.
최대한 평화롭게, 싸움이 벌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가져오기.
일단 전자는 해결한 거 같고, 그 다음은―.
“……믿을 수 없다.”
엥?
“무당검들이여, 검을 뽑아라!”
장문인의 말에 정자 아래 시립해 있던 무당의 무인들의 기세가 한순간에 돌변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검이었고 곧이라도 몰아칠 태풍 같았다. 깜짝 놀란 현건이 지친 기색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문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되다니. 무엇이 말이냐! 네가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제대로 마귀에 홀렸구나!”
“마귀라니요, 아닙니다! 금 의원이 한 말은 전부 진실입니다! 제갈 소저도, 민초신의께서도 보증하시지 않았습니까!”
“듣기 싫다. 어서 너도 검을 뽑거라! 네가 무당의 제자라면 그러고 서 있을 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이자의 목을 베어야 할 것이다!”
그래. 무림인이 이렇게 편히 넘어가 줄 리가 없지. 그럴 거면 뭐 하러 평생 검을 수련하겠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좌수검.”
내 나직한 부름에 지붕 위에 은신하고 있던 좌수검과 무인들이 바닥에 착지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곧바로 무기를 뽑으며 무당의 무인들과 대치했다.
“저자는―! 역시 네놈은 마귀와 한 패거리였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이 의원을 지켜야 하는 몸이라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뿐인데요.”
나는 태연하게 좌수검과 무인들을 고용한 고용주인 척했다. 어차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그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거라는 건 눈치채겠지만, 여기 나와 무당만 있는 건 아니니.
“무당 제일의 무인들이라는 태극검수들은 아직 폐관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니, 데려오신 분들은 그보다는 한 수 쳐지는, 당장 장문인께서 움직일 수 있는 수신호위들이겠죠? 물론 무당신의가 납치되었다는 사건이라면 태극검수들도 폐관을 깨고 나왔겠지만, 모두에게 진실을 밝힐 수는 없으니 가장 믿을 수 있는 수하들만 데리고 오신 모양인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의 검 홍령을 뽑아 늘어트렸다.
“어쩌실 겁니까? 제가 고용한 이들의 실력도 결코 부족하진 않습니다. 잘 아시죠?”
내가 처음 의원을 열었을 때, 좌수검은 무당의 비고에 침입했다가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무당의 태극검수들이 좌수검의 한 팔을 잘랐고, 내가 그 팔을 붙였다.
처음에는 관군이 쫓아서 뭔가 그쪽으로 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무당에서 관에 요청을 넣었던 거였다.
그런 과거가 있으니 무당도 좌수검과 그 일파들의 실력을 충분히 알고 있을 터.
좌수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내 그날처럼 그리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장문인.”
좌수검의 검이 빛났다. 눈빛도 남달랐다.
“이곳, 그리고 금 의원을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그날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나의 검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두 눈으로 목도하게 될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목소리만 진중한 게 아니라 진실 된 무게가 있었다. 장문인도 그것을 알았는지 작게 이를 갈았다.
“……과연, 과거 종남의 태을검수라 할 만한 기세군. 아니, 그 이상인가…….”
종남? 좌수검이 원래 종남의 무인이었다는 건가?
종남과 화산은 지리상 가깝고 종남 또한 섬서에 속해 있으니 생각해보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쿨럭, 그만들 두게. 이 늙은이 때문에 이게 다 무슨 소란인가.”
그런 대치상황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찰나. 기력이 쇠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당신의였다.
“사숙!”
장문인이 먼저 나를 제치고 그에게 달려갔다. 이번에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래, 장문인. 이 무슨 소란인가.”
“사숙, 얼굴이 왜 이리 안 좋으십니까. 이자들이 어떤 악독한 짓을― 당장 무당으로 모시겠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나는 아니 가네.”
“사숙, 정녕 그러셔야 하겠습니까?”
거봐. 내가 안 갈 거라고 했잖아. 나는 검을 거두고 그들 쪽으로 향했다.
이 한 번의 부딪침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가급적 그런 일이 벌어나지 않기를 원했지만.
그때를 대비해, 정자의 상황이 날카로워질 경우 무당신의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허어, 장문인. 너무 그러지 마시게. 신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게 척 봐도 보이지 않나?”
“정왕 전하! 이건 본문의 일입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내가 무림의 일에 끼어들려는 게 아니라, 신의쯤 되시면 우리 왕부에서도 자랑이라 할 만한 분이니까 하는 소리야. 심신이 쇠한 상태에서 이런 소요에 시달리시면 얼마나 힘이 드시겠나? 이러다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을 질게야?”
정왕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다 한통속이라는 걸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여기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또 몰라, 무당이 명분을 포기하고 과감한 수를 쓴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하지만 그 명분을 포기하고 무당이 더 이상 정파일 수 있겠는가?
“아아, 원시천존이시여…….”
장문인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도호를 읊조렸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생 대문파의 수장으로 하고 싶은 대로 다 살다가, 이제 와서 풀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 어때?
나도 있는 대로 조롱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일이 남았다.
뿌우우우우―!
“뭐, 뭐지!”
“상대의 함정인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친 동물 소리에 장문인의 수신호위들이 당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바닥이 쿵쿵 울리고, 몇몇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코끼리 중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닛, 목줄이 끊긴 건가?!”
정왕과 함께 따라온 무한성주가 깜짝 놀라 기겁을 했다. 성주에게 여기까지는 계획 공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놀라움은 진짜였다.
“다, 다치게 하면 안 된다!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코끼리다!”
계획대로, 내가 구한 코끼리가 아닌 황제의 하사품이 풀려나 날뛰었다. 성주의 말에 장문인이 수신호위들에게 눈짓을 했고 그들은 검을 거두며 당황한 기색으로 물러났다. 우리 쪽은 당연히 계획에 있었던 만큼, 너무 티 나지 않게 코끼리와 거리를 벌렸다.
“그, 금 의원! 저 녀석이 왜 저러지? 어떻게 좀 해주게!”
“네, 성주. 걱정 마세요.”
성주랑은 말을 맞춰놓은 것도 아닌데 아귀가 척척 맞았다. 혼비백산한 성주와 마찬가지로 혼비백산한 코끼리 쪽으로 다가가며 나는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야.]
나의 전음을 들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루먹은 듯 털이 숭숭 빠져 거죽이 드러나던 흉한 모습은 어디 갔을까. 털에는 반지르르 윤기가 나고 눈은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다.
백 살이 넘은 개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 개방의 신물로 불리는 개, 걸왕이 뚜벅뚜벅 내 옆으로 다가왔다.
냐아―!
걸왕의 등 위에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올라타 있었다. 타고나길 영물의 기세를 가진 짐승, 금동이가 걸왕 위에 위풍당당하게 선 채로 다시 한번 냐아―! 하고 소리 질렀다.
뿌우우―
흥분해 날뛰던 코끼리가 자신의 발톱만큼이나 작은 금동이의 울음소리에 멈칫하며 울어댔다. 거기에 걸왕이 고요하지만 강한 무게감을 담아 눈을 마주치자 코끼리는 어쩔 줄을 몰랐다.
냐! 냐아아!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금동이가 몇 번 더 울자 어디선가 동물들이 나타났다. 소림 일대의 산을 지배하고 있던 아름다운 사슴과 백호가 주위를 둘러쌌다. 토끼들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코끼리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코끼리를 한 곳으로 몰았다. 코끼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한구석으로 향했다.
냐!
그리고 마지막 한 방. 금동이가 주춤주춤하던 코끼리의 콧등 위로 날쌔게 올라타더니, 이내 그대로 빠르게 올라가 코끼리의 머리를 솜뭉치 같은 주먹으로 팍! 쳤다.
뿌우우……
그 한 방에 코끼리는 그대로 기가 죽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토끼들이 좀 놀라긴 했지만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금동이는 코끼리를 제압하는 일을 마치고 다시 내려와 내 어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마치 ‘나 잘했지!’ 하는 것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잘했다.
나는 금동이의 등을 토닥거려주고, 옆에 다가와 선 걸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사슴과 백호도 내 주변에 다가와 섰다.
홍령 없이 이들에게 제대로 말이 전달이 될까 좀 걱정했는데. 다행히 금동이와 걸왕이 제대로 해준 모양이었다.
“……장문인, 보았는가?”
여기서부터는 내가 짠 일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도를 닦고, 검을 수련하고, 의술에 매진했던가?”
“사숙! 저건 교활한 수작입니다!”
“바로 신선의 도에 이르기 위함이었네. 헌데 죽음을 결심하고 나니 내 앞에 신선의 경지가 나타났구나.”
무당신의는 진심으로 감탄한 눈치였다. 그래, 그 정도로 놀랄 거 같았으니까 이런 일을 꾸몄지.
“나는 가지 않을 것이네, 장문인. 선계가 그 어디도 아니고 여기 있는데 도사 된 바로서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돌아가지 않겠다는 무당신의의 말에 무게가 실렸다. 사실 여기까지는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신의 본인이 무당에 더 이상 힘을 실어주기 싫다는 입장이었다가, 태양의원에 있겠다, 로 초점이 바뀐 것뿐이었다.
“나는 신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
“……솔직히 나도 그래. 여기에 도가 있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영물들이 금 의원을 따른단 말인가.”
이 연극은 무당신의의 마음가짐만 바꾼 게 아니라, 장문인이 데리고 온 수신호위들의 마음도 흔들었다. 수신호위쯤 되는 지위에 오른다는 건, 장문인에 대한 충성심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무당이 추구하는 도교의 교리를 평생 동안 익히고 실천했다는 뜻이다.
그들이 평생을 꿈꾸었던 신선의 경지가 바로 여기 있는데 어떻게 안 흔들리겠냐고.
사실 엄밀히 말하면 연극도 아니지. 이 영물들이 나를 따르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아아, 원시천존이시여.”
그리고 수신호위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장문인도 눈치챘다.
이제는 명분을 포기하려고 해도, 수신호위들이 장문인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을 것이다.
무당은 처음부터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무한성주고 정왕이고 대중의 눈치고 보지 말고 태양의원을 향해 검을 뽑았어야 했다.
그러나 무당은 절대 그럴 수 없었고, 그 결과 내가 판 함정에 그대로 말려든 것이다.
“허허, 곤란하게 되었구려, 장문인.”
“……정왕 전하.”
“지금 보아하니, 신의께서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하시는 듯하군. 허나 장문인은 신의를 무당에 모셔 가고 싶어하고. 그렇지 않소?”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심쩍은 눈으로 정왕을 보았다. 이미 모든 것이 마무리된 상황에서, 나의 편이 분명한 정왕이 말을 꺼내는 것이 수상한 모양이었다.
“허면 장문인이 데려온 수신호위들을 신의께 붙여드리는 것은 어떠한가. 이대로 떠나느니 그렇게라도 하면 장문인의 마음이 편할 거 같네만.”
“전하, 그것은―.”
약속대로 내가 곤란한 듯 끼어들었다. 태양의원이 무림문파는 아니지만, 불편한 관계인 대문파 무인들이 상주한다는 건 결코 대외적으로 좋게 비쳐질 일은 아니었으니까.
“걱정 말게나, 금 의원. 그렇게 할 경우 금 의원이 곤란해진다는 것도 알고 있네. 내가 둘 다 마음에 쏙 들 만한 제안이 있다네.”
“제안이라 하시면?”
“듣자하니, 곧 의맹회의가 열린다지?”
그 말을 듣자마자 장문인은 내 계획의 종착점이 어딘지 깨달은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의맹회의를 이곳 태양의원에서 개최하는 것은 어떠하오? 각 문파에서 사람들을 보낼 테니, 무당도 사람을 상주시키는 것에 부담이 없지 않소이까?”
이번 일에 있어, 내 목표는 하나였다.
최대한 평화롭게, 싸움이 벌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가져오기.
내가 가져올 최대한의 이득은 바로 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