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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76화 (276/350)

276화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나네.

무당 장문인이 수염을 바들바들 떨면서 내 인사를 받는 걸 보니 자꾸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눈치는 빠르군. 내가 전부 세팅한 일이라는 걸 눈치는 챘나 보네. 하긴, 그 정도는 해야 무당쯤 되는 대문파의 장문인을 맡겠지.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일단 가시죠. 성주께서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겁니다.”

“아아, 그렇군. 가세나. 그래, 이 코끼리가 폐하께 하사받은 것이고, 뒤에 있는 것이 그 신부라는 코끼리인가?”

“예, 전하. 이번에 전하께 인사도 드릴 겸, 금 의원에게 진찰을 받게 하려고 데리고 왔습니다.”

“하하, 사람만 잘 보는 게 아니라 짐승도 잘 보는구만. 하긴, 무한에는 수의 출장소라는 게 있다지?”

정왕이 호쾌하게 웃으며 무한성주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무당 장문인은 자연스럽게 소외되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조금씩 구겨지는 미간을 보라지.

무당 장문인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보았겠는가?

평소였다면 정왕도 무한성주도 무당 장문인을 극진히 대접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정왕은 나와 한 배를 탄 몸이고, 무한성주도 우리와 손을 잡기로 했으니까.

그래서 지가 뭐 어쩔 거야.

저 두 사람 앞에서, 그리고 이처럼 내 편인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날 향해 검을 뽑을 거야?

“험험, 무량수불. 전하, 그리고 성주. 저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아, 장문인. 장문인도 가시겠소? 어디로 가던 중인지는 모르나 태양의원에 가서 약차 한 잔 받아 드십시다. 이 젊은 사람이 의약뿐 아니라 술이나 차에도 꽤 조예가 깊어.”

진짜 잘 맥인다, 잘 맥여. 저 정도는 되어야 왕인 건가?

무당도 당연히 약차와 약술 등을 판매한다. 태청의원이 있는데 그런 부가수입을 올리지 않으면 바보지.

그런 무당 장문인에게 우리 거가 더 낫다고 돌려 말하는 중인 거다.

홍령이 지금 저 얼굴을 봤으면 웃다가 배를 잡고 굴렀겠는데. 진짜 아쉽다.

대신 검 홍령이 깔깔 웃듯이 우우웅― 우우웅― 하고 울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무당신의 관련해서 따질 수도 없다. 정왕과 성주 앞에서는 웃는 낯을 했지만 그들이 돌아서자 장문인은 똥 씹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가시지요, 장문인. 정왕 전하와 성주님 일행 몫만을 준비해놓은 탓에, 무당분들을 대접하기가 여의치 않긴 합니다만…….”

“눈에 보이는 수작은 관두세. 두 분과 대화를 나눈 후 나와 독대할 시간을 냈으면 좋겠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나는 태양의원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시장의 몇몇 사람들과 눈을 마주쳐 신호를 보냈다. 이제 슬슬 철수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북촌이 많이 크긴 했지만, 무당의 장문인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면 더 큰 규모의 도시여야만 했다.

무당이 홀로 산 속에서 독야청청 이슬만 먹고 사는 게 아닌 이상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니까.

그래서 급하게 금왕표국에 사람을 보내 온갖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무한의 상인들에게도 큰 혜택을 주고 좌판을 깔라 요청했다.

먹고살기 좋은 큰 도시에 거지가 없는 것도 말이 안 되므로 개방의 거지들도 요청했고, 항주의 기녀들도 불렀다. 여자가 가는 곳에는 남자가 모이기 마련이니까.

금왕표국은 사람들에 더해 코끼리도 날랐다. 성주가 데리고 온 코끼리들이 그냥 걸어서 이 북쪽까지 오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는가?

특송표행에 돈이 꽤 깨지긴 했지만, 아까 무당 무인들의 반응을 보니 쓴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니, 데려올 코끼리가 더 있었으면 열 배의 돈도 냈을 것이다.

하, 역시 홍령이 그걸 봤어야 했는데. 다시 태어난 이후, 영상 기록이 불가능하다는 게 이렇게 아까운 건 처음이다.

“와아, 이곳이 바로 그 명성이 자자한 태양의원 본원이군요. 이렇게나 멋스럽다니 한번 와보기를 잘 했습니다.”

“그렇다네, 성주. 자네는 나와 저 뒤에 있는 별채에서 머물게야. 괜찮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와 함께 지내다니 영광입니다.”

내가 일부러 무당 장문인 앞에서 뻐길 필요도 없었다. 정왕은 아주 훌륭하게 바람잡이를 해주었다.

태양의원으로 오는 길에도 일부러 길을 잃은 척 대기소로 향해서 ‘태양의원의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보여주기까지 했으니까.

기존에 의원들 기숙사로 쓰이던 건물은 이번 일 때문에 급하게 특실로 개조했다.

그야말로 돈을 처바르다시피 했는데, 다행히 이 부분은 정왕이 꽤나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장인을 구해주는 것은 물론 건축비까지 대주었으니까.

도움은 안 받겠다고 했는데, 인부들을 살려준 보답에 염정에 대해 입 다물어주는 대가라며 떠넘기기에 적당히 거절하다가 받았다.

적당히 주고받기도 해야지. 너무 안 받거나, 또 너무 빚 지워두면 또 사람 마음이 상한다니까.

덕분에 무당 장문인이 봐도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귀빈용 별채가 완성되었다.

“어이쿠, 이걸 어쩌죠? 두 분께서 별채를 각각 하나씩 쓰셔서, 무당의 장문인께서 오셨는데 내어드릴 방이 없네요.”

“……오래 있을 생각은 없네. 볼 일만 마치고 갈 걸세. 적당히 대화를 나눌 자리로 이동하지.”

“아, 두 분과 함께 식사라도 안 하시고요?”

“더 이상 농을 치면 내 너른 아량으로 넘어가기가 힘들 것이야.”

무당 장문인이 이를 갈았다. 장문인을 오로지 이재에 밝은 기준으로만 뽑았나? 도사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수양이 얕아?

나는 더 놀려먹으려던 마음을 접고 그를 정자 쪽으로 안내했다. 어쨌든 준비한 것들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무당은 그분을 돌려받아야겠다.”

“돌려드리다뇨. 신의께서 물건도 아닌데. 그분께선 엄연히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자유가 있습니다.”

“말장난은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장문인이 거친 기세를 쏘아냈다. 현건 녀석의 기는 맑고 청아한, 그러면서도 압도적인 느낌이었는데. 장문인의 기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현건의 것이 깊은 산 속에 흐르는 폭포와 같다면 장문인의 것은, 뭐랄까…… 물 폭탄?

분명 같은 사문에서 같은 내가기공을 익히고 같은 장소에서 수련을 했을 텐데 기의 성질이 이 정도로 다른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태연하게 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썩 어렵지 않게 버틸 만한 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먼 길 오셨는데 계속 그러고 계시면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차라도 한 잔 드시고 천천히 얘기를 나누시죠.”

내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차를 우려 권하자 장문인의 미간이 더욱 일그러졌다.

지금쯤 밀가루를 봉지째 입에 털어 넣고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는 기분일 거다. 북촌에 들어와서부터 본인의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테니.

“자, 받으시죠.”

나는 장문인 앞에 잔을 놓으며 차를 따랐다. 그리고 그때까진 장문인의 기를 가볍게 흘리다가, 내 기를 마주 쏘아냈다.

다상이 부들부들 떨리고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됐다. 그 와중에도 내가 따르는 찻물은 휘어지거나 튕겨나감 없이 있는 그대로 찻잔에 또르르 채워졌다.

잔에 찻물이 찰랑찰랑 차오르자 장문인은 짜증스럽게 기를 거두었다. 더 이상 신경전을 펼쳐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뭐, 깨닫기야 처음부터 알았겠지만 그동안은 자존심 때문에 버틴 거지.

“……간악한 놈이로구나. 어떻게 이 정도 내공을 얻은 게냐?”

“정파에 토벌될 만한 일은 하지 않았으니까 쓸데없는 계산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허면 어찌하여 신의를 납치한 것이지?”

“납치 아니라니까요. 제 발로 오신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무슨!”

“그 얘기는 소녀가 설명드리면 될 거 같아요.”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제갈다영이었다.

그리고 제갈다영의 옆에는……

“그…… 그 일은 이 제자가 설명을 드리, 겠습니다…….”

파김치처럼 축 늘어진 현건까지.

녀석들이 처음 맞붙을 때 보고 동태를 살피러 나간 지 몇 시진 되지도 않았는데. 대체 얼마나 전력으로 부딪쳤기에 쟤가 저 모양 저 꼴이 된 거야?

반건조 오징어 상태가 된 현건과 제갈다영이 정자 위로 올라와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현건만 있었으면 분명 뭐라고 했을 게 분명하지만, 옆에 제갈세가의 여식이 있으니 장문인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둘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제갈 소저. 하나만 묻겠소이다.”

“네, 장문인. 물어보시와요.”

“어찌하여 인근의 무당으로 오는 대신 이 먼 태양의원까지 온 것이오?”

그건 제갈다영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들이 무당으로 갔다면 마의도 무당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마의의 정체가 사실 제갈세가의 일원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들통났겠지.

제갈다영은 그걸 피하고 싶어서 신의를 데리고 태양의원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한다면 무당에게 마의의 정체를 발설해야 하는 상황.

“신의께서 무당으로는 가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제갈다영이 생긋 웃었다.

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

“……그러한가.”

근데 더 놀라운 건 그 거짓말이 먹혔다는 점이었다.

“사숙께서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후우…….”

무당신의가 과거 섬서사변에 일조했던 일을 후회해 틀어박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장문인쯤 되면 그걸 몰라선 안 되겠지.

그렇다면 신의가 무당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거짓말도 설득력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을 텐데 저런 기지라니, 진짜 제갈세가의 여자란.

“허면 내가 뵙고 설득하겠다. 그분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라.”

“지금 신의께선 누굴 만나실 상태가 아닙니다. 집중 치료와 안정, 요양이 필수입니다.”

“몸이 안 좋으시다는 건가? 그렇다면 더더욱 무당으로 옮겨야겠다.”

“아뇨. 그건 주치의로서 허락할 수 없습니다. 가면 죽을 걸 아는데 어떻게 보냅니까?”

“주치의? 금 의원, 자네가 감히 무당신의의 주치의를 맡았다 망발을 하는 겐가!”

“그분은 지금 저밖에 치료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맞섰다. 무당신의를 고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그건 진실이니까.

“이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하지만 무당의 장문인이 이 사실을 믿게 하는 건 별개의 문제.

이 부분도 이미 준비를 해뒀다.

“상태가 좋지 않아 신의를 뵙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다른 분의 말씀을 들어보시죠.”

“다른 분? 하, 이 의원에서 일한다는 그 늙은 의원 말인가? 장중경의 후예라는? 비전도 끊긴 지 오래된 의원의 말이 내게 설득력이 있을 거 같나!”

장문인은 당장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는 노인에게 인사했다.

“환자를 보시느라 바쁘신 와중에 들러 달라 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

“……! 저분은……!”

“과연 아시는군요. 얼마 전부터 태양의원에 의탁 중이신 민초신의 선배님입니다.”

“오랜만일세, 장문인.”

“시, 신의께서 여기는 왜, 아니, 정말 사숙께서 위중하신 겁니까? 그걸 이, 이자가?”

민초신의의 등장에 장문인은 허둥지둥 일어났다. 말도 버벅거리며 꼬였다. 그만큼 당황한 모양이었다.

혹시 이렇게 쓸 일이 있을까 봐, 민초신의가 태양의원에 왔다는 정보를 여기저기 흘리면서도 무당 쪽으로 흘러가지 않게 최대한 막았거든.

이게 다 정보문파 둘을 옆구리에 끼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맞네. 나 또한 처음 보는 상태였으나…… 다행히 금 의원의 치료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네. 적어도 석 달이면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걸로 보이더군.”

“그, 그럴 수가…….”

장문인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떻습니까, 장문인. 이제 제 말이 좀 믿어지십니까?”

어떻습니까, 장문인. 이게 내가 지금까지 갖춰온, 태양의원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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