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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74화 (274/350)

274화

있는 줄도 몰랐던 대모의 정체 때문에 받은 충격을 잠시 가라앉히고, 나는 총관실로 향했다.

총관실에서는 금리가 내가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되셨습니까.”

“전부 잘됐어.”

“휴, 다행입니다.”

금리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내가 마의한테 해라도 입을까 봐 걱정했어?”

“그런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좌수검도 대기 중이셨고, 삼촌의 실력 또한 보통이 아니니. 거기에 저는 짧은 시간이나마 마의를 상대해봤습니다. 일견 미쳐 있지만, 또 일견으로는 굉장히 냉정하고 사리분별이 빠른 사람입니다. 삼촌이 준비하신 계책이라면 분명 우리 손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냥 빈말로라도 걱정했다고 해주지 그래?”

“걱정했습니다. 무당신의께서 수락하지 않으실까 봐요.”

무당신의를 설득한 결정적인 한 방은 나의 출생과 연결된 일이었기에, 금리에게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평생을 아버지 금왕의 아들로 알고 살아온 것처럼, 금리도 내가 진짜 삼촌인 줄 알고 있을 테니까.

쓸데없이 마음 복잡할 얘기는 굳이 할 필요 없지.

“하지만 적극적으로 환자를 보거나 하진 않을 거야. 그럴 만한 상태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태양의원에는 더한 호재라고 봐야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금리의 눈이 반짝였다. 평소에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 새삼 들떠 보였다. 워커홀릭이 이런 표정을 짓는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민초신의께서 오신 것도 매력적인 요소지만, 무당신의의 경우는 차원이 다릅니다. 무려 태양의원에서 신의가 치료를 받는 상황이 되는 거니까요.”

돈 냄새가 난다. 금리의 말에서 돈 냄새가 풀풀 풍긴다.

신의가 치료를 해주는 걸 넘어서서, 사대신의 중 제일로 꼽히는 데다 오랜 세월 칩거하느라 그 신비감이 최대치를 찍은 무당신의!

그런 무당신의가 무당도 아니고 태양의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내가 생각해도 솔깃했다.

내가 아직 아픈 상태였다면 천금을 짊어 싸들고 갔을 거다.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란 게 이런 거군.”

“삼촌께서 신의를 치료하실 실력이 되시니 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운이 좋았어. 그보다 무당은 어때?”

무당신의가 오게 된 제반사정을 확인하게 된 이후, 나는 바로 개방과 하오문에 연통을 넣어 무당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니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긴 했는데, 그게 옆 밭의 황금호박이란 말이지.

내가 무당이라면 절대 가만히 안 있는다.

거기에 무당신의로 인해 내가 이득을 보는 상황이 연출될 예정이지 않나.

무당신의가 치료를 못 받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데려가려고 할걸?

그래도 정파 대문파에 도사들인데 내가 너무 흰 눈 뜨고 보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아냐, 그놈들은 그러고도 남아.

“아직까지는 별 움직임은 없습니다.”

“어? 왜? 무당신의가 사라졌는데?”

“신의께서 은거해 계시던 곳이 무당 본산과 거리가 제법 있었습니다. 무당에서도 한 달에 한 번 식자재를 배달할 때 외에는 접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초반에 그런 문제로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무당신의도 여전히 신위를 발휘할 수 있던 때다. 아예 심기를 거슬러 무당이 못 찾을 만한 곳에 은거해버리면 무당도 곤란하니까 적당히 타협을 한 모양이군.

“그 식자재를 배달하는 때가 곧입니다. 아마 그때 확인하고 뒤를 쫓을 거 같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있다는 거군.”

“표국에 사람을 부탁할까요?”

금리도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상대는 구파일방 중 가장 세력이 큰 무당파. 중원에서의 명망과 성세는 감히 태양의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눈치만 보면서 살 수는 없지.

“아니, 그건 됐어.”

전면전은 피한다.

여기에 좌수검이며 창천이 있다고 해도 무당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모용세가를 조사하기 위해 보냈던 이들이나 정반합, 개방과 하오문, 청수채를 불러도 마찬가지다.

전력을 쏟아봤자 손에 떨어지는 이익은 미미하고 리스크는 지나치게 크다.

태양의원이 무림문파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해봤을 것이다.

무력이 곧 문파의 존재 이유니까.

하지만 여긴 의원이다.

그리고 나는, 이 태양의원이라는 브랜드를 책임지는 경영자다.

“대신 이렇게 하자. 표국에 사람을 보내. 그리고…….”

* * *

현건은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아직 나가야 할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그는 잠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몇 번이나 깬 터였다. 그냥 일어나 남는 시간에 검이나 휘두르는 게 속이 편할 거 같았다.

오늘 무당이 온다.

현건은 자신이 그 말에 부담을 느끼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그에게 닥친 현실이었다.

그는 책무를 내던지고 도주한 대제자일 뿐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돌아와 은거해 있던 사조를 업고 다시 한번 도망치기까지 했다.

‘지금 무당의 입장에서, 현건 소협은 도둑입니다.’

태양의원의 총관을 맡고 있다는 금태양의 조카, 금리의 말이 아직까지 귓가에 어른거렸다.

그 말이 주는 충격은 컸다.

물론 귓가에 어른거리는 이유가 그 충격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렇게 의관을 정제하고 밖으로 나갔는데 때마침 생각하던 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금리였다.

“……현건 소협. 일찍 일어나셨군요.”

“예, 금 총관께서도 기상이 이르십니다.”

“일어난 게 아닙니다. 지금 침상에 들러 갑니다.”

“예? 지금?”

현건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봤다. 해가 어슴푸레 뜰 무렵이다.

“금 총관도 곧 있을 일이 걱정되시나 보군요.”

“저는 늘 이 시간쯤 자러 갑니다.”

“예? 지금?”

자신이 똑같은 말을 똑같은 어조로 내뱉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현건은 당황하며 말을 우물거렸다. 현건의 원래 기상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한 시진 뒤다. 현건은 항상 그때 아침에 일어난 금리를 봐왔다.

그러니까…… 지금 한 시진만 자고 일어난다는 건가?

“실례인진 모르겠지만, 그리 주무시면 몸이 상하십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의원들로부터 검진도 받고 있고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건 너무 과중한, 금 의원에게 말씀을 드려보시지요.”

“아뇨. 저 혼자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원이 필요하면 삼촌께 충원을 부탁드리면 됩니다.”

‘내가 왜 이러지. 현명한 여인이니 자신의 일은 처리할 수 있을 터. 더 이상 말을 얹으면 간섭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현건은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잠시 뒤 있을 일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저도 돕게 해주십시오.”

“소협께서 말이십니까.”

“무당의 일이니 제가 그 짐을 덜어드리는 게 맞지 싶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현건은 자신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당과 관련된 일이니, 무당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자신은 무당의 대제자다. 지금 그는 태양의원의 극비를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친절하십니다. 허나 일은 제가 원해서 하는 것이니 괜찮습니다. 도움을 주실 요량이시라면…….”

“예, 뭐든 말씀하십시오.”

뭐든? 현건은 스승이나 장문인에게도 그렇게 말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듣고 사리에 맞는지 충분한 숙고의 시간을 거친 후 일을 진행했다. 이제 한동안, 현건은 왜 이 여인 앞에서는 자신이 자신답지 않은지 숙고의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물론 오늘의 일이 무사히 끝날 때의 얘기겠지만.

“가능하다면 제가 이 시간에 일을 마치고 잠든다는 것은 삼촌께 비밀로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허나 꼭 몸을 보중하십시오. 걱정 말고 푹 주무시고요. 제가 어떻게든 잘 해결하겠습니다.”

현건이 굳은 의지를 보이며 금리 앞에 다짐해 보였다.

하루에 한 시진을 자며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여인이 자신처럼 불안에 떨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됐다. 그것은 일종의 불의였다.

반드시 무당을 돌려보내리라.

현건은 검을 쥐고 의지를 굳혔다.

이건 그간 금태양에게 신세를 졌던 것을 포함해, 김진에게 받았던 영향, 그리고 태양의원에서 지내며 느낀 것들의 총체였다.

‘최악의 경우 사형제와 사숙들에게 검을 뽑더라도, 태양의원에는 해가 가지 않게 한다!’

현건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잡념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뭐지.”

“창천 소협, 연무장을 쓰고 싶소만.”

사실 검을 쓰려면 굳이 연무장이 아니어도 된다. 이곳은 산에 둘러싸여 있고, 산보를 하며 둘러본 결과 검을 수련하기 좋은 너른 공터도 적당히 있었다.

그러나 지금 현건은 태양의원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언제 무당이 올지 모르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우겠는가!

“이건 내 거야.”

“이곳은 태양의원의 연무장이지 않소. 청화 소저도 좌수검과 함께 종종 이곳을 이용하는 것을 봤습니다.”

“내 거라고. 내가 쓰는 시간이다. 가라.”

창천은 수련을 방해받은 것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검 끝으로 산 중턱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공터를 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현건도 물러나지 않았다.

“창천 소협은 항상 이 시간까지 연무장을 쓰고 해가 뜨기 전 자러 가는 것으로 알고 있소. 나에게 조금 일찍 비켜준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을 텐데?”

“……짜증 나는군.”

창천이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창천은 현건이 매우 거슬렸다. 거슬리다 못해 한 대 패고 싶었다. 한동안은 김진이라는 녀석이 제일 거슬렸는데 요새는 김진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날 정도였다.

눈앞에 바퀴벌레가 자꾸 기어 다니는데 엊그제 다른 동네에서 봤던 장수말벌이 생각이나 나겠나.

특히 현건이 금리와 나란히 앉아 무당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논할 때나, 얘기를 하긴 하는데 그게 뭔 소린지 못 알아먹을 때 제일 짜증 났다.

금리와 현건은 둘 다 글공부를 오래 했기에 고사성어와 논어, 장자 등을 이용해 대화를 나눈 것뿐이지만, 창천에게는 두 사람이 급속도로 친해지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게 아주 틀린 착각도 아니었다.

“올라와.”

“비무를 하자는 것입니까?”

“이기는 자가 쓴다.”

“좋습니다.”

현건이 연무장 위에 올라 검을 뽑았고, 창천이 기수식을 가다듬었다.

시작이라는 신호조차 없이, 두 검수는 눈빛만으로 서로를 파악하고 곧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 싸움은 단순히 연무장 사용권을 두고 겨루는 친선비무라고 하기 무색할 정도로 격렬해졌다.

그리고 연무장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잘들 논다. 오늘 무당이 도착할 거라고 분명 얘기해놨는데. ……아니다, 차라리 저 둘은 힘을 빼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금태양은 잠시 연무장 내에서의 치열한 소요를 보다가 한숨을 푹 쉬곤 저 멀리로 시선을 옮겼다.

새벽 어스름 사이로 작은 불빛이 피이이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점멸했다.

하오문의 신호탄이다.

“생각보다 빨리 오는걸. 하긴 신의의 일이니까 그렇겠지.”

“준비는 마쳤다.”

바로 옆에는 좌수검이 있었다.

금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디, 큰 손님을 마중하러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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