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우리는 일단 태양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인이 내 질문에 답을 하기엔 썩 좋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고 순순히 대답을 해줄 거 같지도 않았거든.
제대로 된 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노인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마의는 창고에 가두어 두었네.”
“일어나면 도망가지 않을까요?”
“창천이라는 자가 지키고 있네. 그 외에도 금제를 가해놨으니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거네.”
무슨 금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좌수검이 처리했으니 믿을 만하겠지.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노인뿐이다.
노인은 옆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연세에 그런 몸 상태로 몇 날 며칠을 도주해 왔으니 지칠 만도 하지.
하지만 내겐 노인의 정체와 기타 관련된 얘기를 해줄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정말 금 의원에게 말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판단이 안 섭니다.”
“뭘 고민하고 그래요? 어차피 시간이 가면 다 알게 될 텐데.”
현건의 말에 제갈다영이 핀잔을 주었다.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몸 상태도 좋지 않으세요. 정말 저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화등선 하시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면 금 의원에게 말해야 해요.”
“이렇게 돌아가시는 건 우화등선도 뭣도 아닙니다.”
“그럼 결론 나왔네요. 당신이 말하기 껄끄러우면 내가 말할게요.”
결국 현건은 제갈다영에게 키를 넘겼다. 제갈다영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무당신의를 아시죠?”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돼요? 저 노인께서 무당신의세요. 무당의 전설, 의술과 검 둘 다 지고한 경지에 오르신 그야말로 존경할 만한 분이죠.”
그에 비해 마의라는 작자는―, 제갈다영은 말미에 작게 중얼거리며 분을 삼켰다.
“믿을 수 없군.”
좌수검이었다. 그 또한 나처럼 그 노인이 무당신의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신의인 동시에 빼어난 실력을 지닌 검수다. 하지만 아까의 모습을 봤을 땐 전혀 그렇지 않더군. 그가 은거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그 정도 고수가 노화에 저렇듯 평범한 촌부처럼 힘을 잃을 리는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인의 몸 상태는 고수, 아니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겉으로 본 게 아니라 맥을 짚어 봤으니 더 잘 안다.
그의 몸은 보통 사람보다 약했고 기허(氣虛)가 심했다. 오죽했으면 아까 침을 놓을 때, 내가 환골탈태하기 전 경혈에 침을 놓던 기법으로 침을 놨을까.
“하지만 저분은 분명 저의 사조님이 맞습니다.”
“현건 도장께서 그렇게 말한다면 맞는 거겠지만…….”
제갈다영이면 모를까, 현건이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그것도 자기 사조에 관한 일인데.
그래도 저 상태가 진짜 말이 돼?
“뭔가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전부터 기력이 쇠해지신다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약해지셨을 줄은…….”
현건도 무당신의의 몸 상태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들을 얘기가 많겠군.
“그럼 우선 신의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 다른 얘기를 좀 듣죠. 어쩌다 저분을 모시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두 분은 마의를 쫓고 있었잖아요?”
“제 말이요. 근데 별 수 있나요. 마의가 무당으로 향했고, 정확히 신의께서 계시는 비동으로 찾아 들어갔는데. 그것도 엄청나게 흉흉한 살기를 띠고 말이죠.”
“마의는 사조님을 해치려 했습니다. 그리고…….”
현건 녀석, 원래도 좀 그런 편이지만 오늘따라 말문을 못 잇는 게 심하네.
“신의께서는 그 검에 그대로 죽으려고 하셨고요. 두 사람이 뭐라 말을 나누었는데 거기까지는 제대로 못 들었어요.”
심할 만했네.
사정이야 어쨌든 마두의 손에 제 사조가 죽으려고 목을 들이밀었다면 충격을 받을 만도 하지.
아까 보니까 현건도 몸에 상처가 많았다. 마의를 막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두른 게 분명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신의께 들어야겠군요.”
솔직히 내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이건 넝쿨째 굴러온 호박, 그것도 금으로 된 호박이다.
민초신의에 이어서 무당신의까지!
비록 무당신의 쪽은 민초신의처럼 환자를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이십 년 동안이나 칩거했음에도 그의 이름값으로 무당이 얼마나 많은 환자를 유치했던가!
민초신의처럼 태양의원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아니, 그냥 칩거를 여기서 하라고 설득할 수만 있어도 태양의원의 이름값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를 것이다.
거기에 마의.
말이 되는가? 지금 사대신의 중 세 사람이 지금 태양의원에 있다는 거다.
그 사실만으로도 호사가들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다만 마의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했다.
그가 일으킨 참상은 나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어릴 적 나를 찾아와 나를 치료해보는 대신 전신을 해부하게 해달라고 했던 부탁도 기억하고 있고. 최근 태양의원을 찾아왔던 이유도 나를 만나고 싶다는 거였는데, 그것도 수상하잖아?
하지만 단번에 결정을 내리지 않고 두고 보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신의께서 기력을 회복하시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다른 쪽 얘기를 먼저 해보죠. 제갈 소저?”
“네에?”
제갈다영은 분장을 관두고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표정도 말이다. 마의를 언급할 때마다 차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던 그녀는 다시 생글생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와 마의는 무슨 관계입니까?”
“네에?”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시고. 마의가 언급될 때마다 격분을 참지 못하는 게 눈에 빤히 보여요.”
“호호, 제가 그랬나요?”
“그는 지금 금제를 당해 기절해 있지만 그 옆엔 창천이 지키고 있습니다. 제갈소저 혼자 마의를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하하, 제가 왜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거듭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거야 세간에 유명한 마두니까, 살려두면 더 나쁜 짓을 할 게 뻔하잖아요. 이번에도 죄 없는 신의님을 죽이려 들었고요.”
“마의가 제갈가의 사람입니까?”
“―! 금 의원님!”
“어디서 듣자 하니, 제갈가에서 내놓은 망나니가 하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름이 천우라는 여인이던데. 굉장한 미인에, 의술 실력도 상당하다던가. 근데 어느 순간 종적을 감췄더군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저희 집안의 뒷조사를 하신 건가요?”
“딱히 뒷조사를 한 건 아니고, 제갈세가가 목적도 아니었습니다. 얻어걸린 정보라고 해두죠.”
정확히는 그 제갈천우라는 사람을 찾았던 거다.
홍령의 절친했던 친구 말이다.
홍령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대충 나이 대나 행적을 바탕으로 홍령과 함께 다녔을 만한 제갈세가의 여인을 추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근데 그 제갈천우의 행적은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뚝 끊겨 있었다.
그게 섬서사변 직후라는 건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
과거 제갈세가에서 일했었다는 늙은 하인은 제갈천우가 당대의 가주와 여러 번 충돌했다는 증언을 했다. 화산을 도와야 한다고, 홍령은 그럴 애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면벽동에 갇혔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이후로 행적이 묘연했다. 제갈세가에서도 제갈천우를 없는 사람 취급을 했고. 호적에서 지웠다는 정보도 있었는데 그거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
그가 희대의 마두가 되어 마의라는 이름으로 전 중원에 이름을 날렸다면, 제갈다영의 지금 반응도 이해가 간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 하나.
제갈천우라는 이름에 왜 좌수검이 아무런 반응을 안 하지?
홍령의 절친이었으니, 홍령의 남편이었던 좌수검이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다.
아까 마의를 봤을 때도 딱히 놀라는 거 같진 않던데.
“좌수검?”
“……천우는 미쳤다.”
내가 좌수검을 보자 그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때로부터 몇 년이 흐르고, 면벽동에 갇혔다던 천우가 나를 수소문해 찾아왔다. 그때 그녀는 이미 광인이 되어 있었지. 현실을 믿지 못했고 광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판단했지만 내가 한눈을 판 순간 사라졌지. 그리고 어느 날부터 마의라는 마두의 소문이 들려왔다.”
좌수검은 질끈 눈을 감았다.
“나는 알면서도 그녀를 향해 검을 들지 못했다.”
홍령을 잃고, 아이도 잃었다 생각한 상황. 하나 남은 친구가 미쳐버렸다고 해서 손쉽게 칼을 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나, 돌이켜 보면 그저 미친 척을 한 걸지도 모르겠군.”
좌수검이 다시 눈을 뜨고 내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제갈천우는 무당신의를 죽이려 들었다.
왜?
나는 그 이유를 안다.
무당신의가 과거 섬서사변에 의술적으로 큰 조력을 했으니까. 그가 없었다면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미친 척을 하고 적을 죽이러 다녔다, 그것도 말이 되네요. 거기에 만약 마의가 혈교에 대한 정보를 얻은 상태였다면 더더욱.”
“……! 마두로 이름이 난다면, 거기에 의술 실력이 탁월하다면 그들이 접근했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그런 일은 없었던 거 같네요.”
섣불리 죽이지 않기를 잘했군. 하마터면 홍령의 하나 남은 친구를 내 손으로 죽이라 했을 수도 있었다. 거기에 아까의 상황상 죽이는 건 좌수검이 됐겠지. 나중에 홍령이 알았다면 얼마나 슬퍼했을까.
“저기, 지금 그게 무슨 얘기예요?”
“비밀입니다.”
“뭐예요, 다 말해놓고 비밀이라고요?”
“소저도 제게 끝까지 마의의 정체를 털어놓지 않았잖습니까. 궁금하면 제갈세가의 힘으로 알아내세요.”
제갈다영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하지만 멀리 가진 않을 거다. 마의가 이곳에 있으니까.
“……금 의원.”
“예, 현건 도장.”
현건은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긴 했지만 다른 것은 묻지 않았다. 대신 그다운 질문을 했다.
“사조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괜찮으십니까?”
“솔직히 말해드려요?”
“예, 부탁드립니다.”
무당신의의 몸 상태.
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으면 보름 내로 돌아가실 겁니다. 아, 제가 침을 놨으니 한 달까지는 버티실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동안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실 겁니다. 마비산이나 점혈 같은 걸로도 어림없어요. 지금까지도 솔직히 힘드셨을 거 같은데, 역시 오래 수양을 닦으신 분이라 여태 버티신 거지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벌써 황천 갔습니다.”
“금 의원!”
“솔직하게 말해달라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을 때 그렇다는 말이고요.”
“그, 그렇다면?”
“제가 고칠 수 있습니다.”
“―!”
“아니, 이 중원 땅에 저걸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나는 유례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감이나 허풍 같은 게 아니었다.
무당신의는 지금, 환골탈태 전 나와 똑같은 몸 상태를 갖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