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마의를 쫓아갔던 현건과 제갈다영이 돌아온 것이다.
그걸 돌아왔다고 해야 할지 좀 애매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소식이 오기 전 우리는 한데 모여 밥을 먹고 있었다.
“이 망할 놈아.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 사람한테 밥을 하라고 시켜?”
“장 의원님 손맛이 그리웠거든요. 전 역시 내륙 쪽 입맛인가 봐요. 항주에서는 영 못 먹어서.”
물론 나는 해산물도 좋아하지만 장 의원이 끓이는 국수 맛이 그리웠던 건 사실이다.
항주에서는 해산물이고 자시고 바빠서 잘 챙겨 먹지 못한 것도 있고.
후루룩―
역시 이걸 먹어야 집에 돌아온 거 같단 말이지.
처음 나와 장 의원, 창천과 신생 넷이 있을 때 먹었던 장 의원의 국수.
이제는 사람이 늘어서, 그 멤버에 좌수검도 꼈고, 청화와 금리도 자리를 잡았다.
“떼잉, 문자 그대로 식구(食口)가 늘어나니까 간 맞추기도 어렵구만.”
“그 정도로 어려워하시면 어떡해요? 삼백 인분의 약도 한 번에 제조하는 분이.”
“이놈아, 그거랑 그거가 같아?”
장 의원은 연신 투덜대면서도 은근 의기양양한 태도로 국수를 먹었다.
사람이 늘긴 했지만 대화가 많은 건 아니었다. 금리나 좌수검은 평소에 과묵한 편이고, 그나마 말을 할 만한 멤버인 장 의원과 청화는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으니.
신생도 급하게 국수를 먹어대는 걸 보니 빨리 가서 교육원 사람들을 통솔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 대화의 물꼬를 튼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왜지?”
“뭐가?”
“그거 말이다.”
창천이 젓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이 자식이 남한테 대놓고 손가락질, 아니 젓가락질을 하고 있어?
“손 내려라. 너 지금 되게 무례한 거 알지.”
“무례는 네놈이 무례인 거 같은데. 항상 가면 벗고 밥 먹다가 갑자기 왜 가면을 썼느냔 말이다. 가면 벗고 먹으니 가면에 뭐가 안 튀어서 좋다고 했던 거 같은데.”
창천은 그 의문이 해소되기 전에는 밥을 먹을 생각이 없는 듯 나를 빤히 보았다.
“낯선 자가 있어서인가? 하지만 그 정도밖에 신뢰하지 않는 자를 네가 이 자리에 들일 리는 없을 텐데.”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좌수검 때문은 아니다.
다 너 때문이라고.
“크흠, 흠!”
장 의원이 티 나게 기침을 해댔다. 나는 찌릿 눈을 흘겼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내가 김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창천뿐이다.
저 녀석이 알게 되면 얼마나 귀찮아질지 뻔해서 다들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가면을 못 벗고 있는 건데, 평소에는 둔한 녀석이 왜 이럴 때만 예리해지고 난리야?
“헌데, 화산지회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되는 것입니까.”
내가 곤란해하던 차에 리가 입을 열었다. 자연히 창천의 관심도 리에게 향했다.
휴, 이번만큼 창천이 리를 좋아한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진 적이 없군.
“앞으로의 진행이라면?”
“제가 알기로는 예선이 거의 끝났다 들었습니다. 허면 본선 일정이 나와야 하는데 이에 대해 전혀 진척이 안 되는 거 같더군요. 여기도 본선 참가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으니 저로서는 알아두고 싶습니다.”
하긴, 창천이나 좌수검은 그렇다 치고, 내가 또 본원을 떠나야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예선 이후 관련해 연락을 받은 기억이 없다.”
창천이 말했다. 나도 소림에서 언질을 받은 게 없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아마 당분간 기일이 확정되기는 어려울 거요. 아니, 어쩔 수 없이 지연되고 있다고 봐야겠지.”
마찬가지로 예선을 통과했고, 동시에 정반합의 일원이라 다른 사람들보다 정보를 더 많이 접했을 좌수검이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좌수검.”
“이런 대회의 의의는 무인들이 서로 강함을 겨루어 자신을 증명하는 데 있지. 하지만 세인들이 가장 입을 모아 말하는 건 결승 그 이후네.”
“아, 설마?”
“그래. 결승 이후, 당대 최강자와 우승자가 친선 비무를 하지.”
당대 최강, 그 말이 나오자마자 창천이 눈을 빛냈다. 아니 거의 눈에서 불을 뿜는 수준이었다.
“당대 최강이라, 그게 누굽니까?”
“누구일 거 같나?”
나는 딱히 관심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고, 창천이 뭐라 말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창천도 미묘한 표정이었다.
“……당대 최강이 없나?”
“없다고 할 수는 없네. 허나 누구 하나 확실하게 당대 최강이라 말할 수도 없지. 과거 최강이라 불렸던 남궁가주는 은거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나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네. 그와 비견될 만한 자들도 운명했거나 행방을 알 수가 없지.”
“각 문파의 제일검이나 다른 오대세가의 가주들은요?”
“다들 남궁가주보다는 한 수 처지지. 세간의 인식도 그렇고. 당대 최강의 자리를 가져가기 위한 시도는 많았으나 진정 그만한 수준에 오른 자는 없네.”
“의외네요. 상당한 영예니까 거짓으로 꾸미기라도 할 법한데.”
“당대 최강이라 이름이 난 순간부터, 최강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이들의 도전이 이어진다. 거짓으로 꾸미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그 검증 또한 생애 내내 이어지지. 하물며 거짓임이 드러난다면 그 명예에도 큰 타격을 입네. 구파일방쯤 되는 문파라도 그런 일을 도모했다가 실패한다면 회복하기 어려울 걸세.”
날조와 선동이 먹히지 않는다 이거군. 하긴, 무당도 구파일방 중 제일의 세력을 갖췄지만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다. 당대 최강에게 도전하는 이들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으니 그 반향 또한 만만치 않은 거다.
“화산이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좌수검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마지막에 붙을 당대 최강이 없어서 본선이 미뤄진다는 거군요?”
“그래. 그러한 친선비무가 없다면 아무도 행사에 관심을 주지 않을 거다. 참가하는 모두가 가능성이 낮아도 그러한 기회를 기대하고 참가하는 것이고.”
“그래도 열기는 열어야 할 텐데.”
“현재로서는 모용가주가 가장 유력하긴 하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번번이 남궁가주에게 패한 전적을 전 무림이 알고 있는바, 최대한 남궁세가를 설득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군.”
영 소식이 없더라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
“이십여 년이나 봉문 중이라는데 화산지회 한다고 문이 열릴지 모르겠네요. 애초에 거긴 왜 봉문을 한 거지?”
“자세한 사실을 아는 이는 없다. 그저 내부 사정이라는 말뿐.”
좌수검이 저렇게 말한다는 건, 남궁세가와 섬서사변 간의 관계를 의심해 온 정반합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뜻이다.
은 파파조차 담을 못 넘었다는 거겠지.
……그게 가능한 건가?
천하제일의 무인이 지키고 있으니까?
당대 최강이라는 말이 썩 와닿지 않았는데, 은 파파조차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하니 새삼 그 강함과 무게가 느껴졌다.
동시에 은 파파마저 닿지 못한 비밀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제갈다영의 외가가 남궁세가라고 하니, 친족들끼리는 뭔가 전해지는 얘기가 있을지도?
근데 제갈다영과 현건은 왜 안 오는 거지? 직접 오진 않아도 뭔가 소식이라도 전할 법한데.
“금 의원! 큰일이오, 큰일!”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때, 밖에서 급하게 날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북촌객잔에 터를 잡은 개방의 거지였다.
“빨리, 빨리 가야 하오!”
“왜요, 무슨 일인데?”
“제갈가 사람과 무당의 제자가 긴급 연통을 보내왔소! 추적이 붙었다는데, 아이고!”
쾅―!
개방 거지가 아이고 소리를 냄과 동시에 나와 창천, 그리고 좌수검이 서둘러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뭔가가 부딪치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기파가 내는 소리였다. 기와 기가 부딪치며 공기를 찢어버릴 때 내는 파공음 말이다.
“저쪽!”
태양의원을 벗어나 산을 타고 오르자 점점 싸우는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저 멀리 치열한 싸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건이 누군가와 검을 맞대고 있었고, 제갈다영이 웬 노인을 보호하며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현건 도장! 제갈 소저!”
“금 의원! 위험하오!”
“도와줘요!”
두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좌수검과 창천이 현건 쪽으로 튀어나갔다.
상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눈을 홉떴지만 물러날 거 같지는 않았다.
“하, 이런 방해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오늘 저 노인네의 목은 내가 가져갈 것이야!”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인이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살벌했다. 그리고 실제로 싸움도 살벌해졌다.
나는 그 싸움을 좌수검과 창천에게 맡기고 서둘러 제갈다영에게 달려갔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노인의 낯빛이 심상찮았다.
“괜찮으십니까?”
노인이 누군지는 나중에 알아보면 될 일. 나는 빠르게 맥을 짚고 상태를 살폈다.
“―!”
뭐, 뭐야 이거?
“금 의원, 이분을 살려야 해요! 제발 힘써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나는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품에서 휴대용 침구를 꺼냈다. 그리고 몇몇 개 경혈에 침을 놓았다.
“상세한 치료는 가서 해야 합니다. 업히시죠.”
“……이 늙은이는 이 자리에서 죽어도 되네.”
“어르신! 무슨 그런 말씀을! 절대 안 되어요!”
제갈다영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죽고, 저 사람은 살아 돌아가는 것이 맞네. 그것이 순리야. 이보게, 젊은이. 저 사람을 살려주게. 저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야.”
노인이 나를 붙들고 애원했다.
상당한 실력자인 세 사람의 합공에 둘러싸인 추적자는 수세에 몰려 있었다. 여기까지 쭉 추적하며 싸움을 벌여왔던 걸까? 유달리 지친 얼굴이지만 그 와중에도 아름다움은 빛났다.
그제야 난 저 추적자가 누군지 깨달았다.
“마의?”
“금 의원, 저 사람은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해요. 이분의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네, 나는―.”
그때 좌수검이 내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곧바로 전음이 날아왔다.
[어찌할 건가. 그대의 뜻에 따르겠네.]
저자를 살려야 한다는 노인, 그리고 마의를 죽여야 한다는 제갈다영.
[사로잡을 수 있습니까? 가급적 큰 해를 입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능하네.]
좌수검은 나의 뜻대로 해주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마의의 후방으로 움직여 검면으로 경추 요혈을 기절할 정도로만 후려친 것이다.
현건과 창천이 있어서 무리 없이 가능한 거였겠지만 그야말로 놀라운 실력이었다.
아무래도 저 인간, 저번 비무 때는 봐준 거 같은데?
나는 재생의 검을 결까지 펼치며 좌수검을 몰아붙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 같다. 내 뜻을 읽고 그에 맞춰 움직여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방금 전의 몸놀림은 대단했다.
“금 의원! 죽여야 한다니까요! 위험한 인물이라고요, 마두요! 그 섬의 참상을 보셨잖아요!”
제갈다영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차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선은 이분의 말을 들어보고 싶군요. 어째서 이 마두가 살고, 본인이 죽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