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반으로 갈라진 가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미친.”
침묵 속,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정왕인가? 다른 무인일지도.
나는 그 누군가가 비속어를 뱉게 한 원인을 눈으로 훑었다.
그것은 나의 손에서 검으로 이어졌고, 이내 좌수검의 목에서 끝이 났다.
나의 검 홍령이 좌수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살짝 긁힌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나의 얼굴에서 흐른 땀이 바닥으로 투둑, 툭 계속해서 떨어졌다.
“내가 졌군.”
좌수검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담담하지 않은데?
급소를 허락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충격이 아니었다.
그의 흔들림은 나를 진심으로 공격했다는 사실에서 온 거다.
“제가 이겼네요.”
나는 가면을 주웠다. 사선으로 갈라져 반 동강이 난 가면이 내 목 대신이었다. 순간 좌수검이 이성을 좇지 않았다면 내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제가 이겼다고 할 수는 없죠. 저는 좌수검 당신의 약점을 이용한 거니까.”
내 결의 검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한 일 검을 위해 나의 많은 부분을 무방비하게 드러내야 했다.
거의 목숨을 던진 공격이었다.
파격적인 공세가 이어지고 빈틈이 보일 때, 그리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일 때.
상대의 약점을 노리지 않는 검수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마지막 순간 좌수검은 검을 꺾었다.
내가 그의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었기에.
“그러니까 이건 비긴 걸로 하죠.”
“아니, 그대가 이겼다. 그 검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의원으로서 성취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그 어린 나이에 화산의 검을 그 정도로 진일보 시키다니…….”
“어쨌든 제가 지지만 않으면 된 거였잖아요?”
나는 적당히 말을 끊었다. 재생의 검에 대해 너무 파고들면 곤란해진다. 심상 속 화산의 선인들의 심득을 전수받은 것이니 그 이론이나 깊이에 대해서 설명은 할 수 있지만, 깊이 들어가면 밑천이 바닥난단 말이지.
“어떻습니까, 여러분?”
마지막에 재생의 검을 펼친 건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기도 했다.
실전된 검 그 이상의 검. 그러나 화산의 제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명명백백한 화산의 검.
어린 시절 어렴풋이 남았던 화산의 정신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제자가 있으랴.
“회주를 따르겠습니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젊은 축의 무인들이 하나씩 무릎을 꿇었다.
“저희 또한 회주를 따르도록 하지요.”
또한, 화산의 속가이자 그 영향을 받았던 중년의 무인들도 무릎을 꿇었다.
이들로 하여금 나의 정통성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한 거다.
* * *
이후 나는 무인들에게 좌수검에게 했던 것과 같은 얘기를 요약해서 전달했다.
도개걸을 중심으로 하는 개방과 과거 섬서의 명사들이 혈교를 쫓고 있으니 그들은 모용세가를 추적해달라는 얘기였다.
좌수검을 납득시키는 데는 꽤 장황한 말과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화산의 검을 본 그들에겐 그 정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궁금해하거나 이유를 더 상세히 알고 싶어 한다면 좌수검이 설명해줄 것이다.
이미 남궁세가 등을 오래도록 쫓아온 이들인 만큼 그들은 순식간에 상세한 계획을 세웠고, 그 날 바로 일부가 모용세가와 섬서사변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떠났다.
좌수검은 남았다. 당장 많은 인원이 움직일 필요가 없어서도 있지만, 나와 함께 있고 싶은 눈치였기에 나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또 다른 사람.
“청화 소저.”
“네, 네. 넵!”
청화문의 젊은 문주이기도 한 청화가 남았다.
“낮의 비무는 어땠습니까?”
“아! 엄청났어요! 처음에 펼치신 검은 매우 정돈되어 있고,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진 흔적이 엿보이더라고요! 많은 이들이 어렵지 않게 배울 거 같지만 개인의 재능에 따라 상승검법에도 비견될 만한 변화를 보일 거 같았습니다. 후반에 보여주신 검은, 솔직히 제 수준에서는 따라잡기 힘들었는데요. 전반의 검과 이어지는 거 같으면서도 굉장히 자유로운 것이, 문헌에서만 봤던 심검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심검이라면?”
“특별히 정해진 공식대로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마음 속 심상에 따라 검을 움직이는 것 말이에요. 내가 폭풍 같은 기세를 마음에 담았다면 검이 그렇게 움직이고, 차분하고도 예리한 기세를 담았다면 또―, 아, 근데 이건 제 생각이에요! 너무 상승의 경지라 책을 보고 이런 게 아닐까 상상을 했을 뿐―.”
청화는 제 추측이 틀릴까 봐 이리저리 변명을 붙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청화를 흐뭇하게 보았다. 남을 가르치는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무공을 익히고 펼치는 쪽의 재능은 다소 부족하지만 무공을 꿰뚫어보는 눈은 훌륭했다.
“그러면 청화 소저, 아니, 문주가 익힌 검은 어떤 거 같습니까?”
“예? 제가 익힌 검이라면, 청화검이요?”
“아뇨. 연무장에서 몰래 연습하던 검 말입니다.”
“……!!!”
“매홍검이죠?”
“죄, 죄, 죄, 죄송합니다!!!!”
청화가 그 자리에서 내게 머리를 숙였다. 아니,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오체투지를 넘어서 땅을 파고 들어갈 거 같은 수준이었다.
“내 서재에서 무공서를 가져간 거죠?”
“그, 그게, 총관님의 심부름을 하러 들렀다가 잠깐 봤는데, 너무 멋진 검법이라, 저 혼자만 익히고 쓰진 않으려고 했는데, 제가 그만 도깨비에 홀렸나 봅니다! 제발 용서를, 아니, 용서 못 받겠죠……? 너무 큰 잘못이니까, 죗값을 받는 게 맞는 거겠죠? 이 목으로 사죄를!”
“아니, 갑자기 그러진 말고. 여기 피투성이 되면 그건 또 누가 치워요. 그것도 못지않게 잘못이지.”
“헉, 그렇네요! 그러면 나가서 목을 매야만!”
못 보던 사이에 사람이 왜 이렇게 급발진이 됐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청화의 두 어깨를 잡아 바닥에 눌렀다.
“침착하시고, 저 화내는 거 아니에요.”
“예? 그럼요? 화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상식적으로는 화를 내다 못해 생사결을 해야 할 상황이긴 하지.
“화를 내는 것보단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그게 어떤 무공인지는 압니까?”
“그게, 잘…… 매홍검이라는 이름도 말씀하셔서 알았어요. 제목이 없었거든요.”
“그건 화산의 실전된 무공입니다.”
“네? 헙! 딸꾹!”
청화가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공을 훔쳐 익히고 있었다는 걸 들켰을 때도 딸꾹질은 안 했는데, 그게 화산의 무공이라니까 딸꾹질을 하는 거다.
나나 정반합 사람들, 소림 같은 경우가 특이한 거지 보통은 이렇다.
“저, 저, 화산의 무공을 익혀서 죽는 건가요? 무림공적으로 몰리나요? 척살?!”
“그렇게 되게 하진 않을 겁니다. 이름을 바꿀 거니까요.”
나는 옆자리에 미리 준비해놨던 내단을 청화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복용하고, 더 정진하세요.”
“예에?!”
“어차피 익힌 무공 아닙니까. 솔직히 웬만해선 그게 화산의 무공인 줄도 모를걸요. 조금만 손보면 화산의 색도 많이 빠질 겁니다.”
“그, 그치만―.”
“받아주세요.”
내단을, 그리고 매홍검을.
“그 검은 화산에서도 원래 여인들에게만 전수되는 검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익히진 않았다. 홍령이 딱히 남자가 익혀봤자 득 될 게 없는 무공이라고 했거든.
하지만 여인이 익힐 때는 그 강점이 배가 된다.
이십사 수 매화검법을 기반으로 옵션으로 익히는 검이지만 홍령의 경우 빠르게 그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 실전에서 별로 쓸 일이 없었다고 한다.
화산에 여제자가 그렇게 많았던 것도 아니라 무림에 크게 알려지지도 않았다고.
뭣보다 여기에 있는 이 매홍검은 홍령이 한 번 손을 본 버전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나를 비롯한 몇몇만 입을 다물면 될 겁니다. 거기에 원래는 기반으로 이십사 수 매화검법을 쓰지만, 아까 보니까 청화검의 기반에 매홍검을 얹었더군요.”
“아, 네! 맞아요! 그 검만 펼치기에는 어딘가 반쪽짜리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럼 됐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겁니다.”
“예? 그치만?!”
“그 검을 다듬어서 청화문의 검으로 만드세요. 그리고 그 검을 널리 펼쳐 주세요.”
화산이 다시 재기에 성공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과거 어렸던 화산의 제자들이 장성해 있고, 내게는 실전되었던 비전이 있다. 심상 속 화산에서 익힌 선인들의 심득 또한 익혔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녔던 문파가 다시 옛 성세를 회복하는 게 재료만 있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은 후순위로 밀리다 못해 잊혀질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매홍검 같은 것들.
비전서로 남아 있으니 계속 전해지기야 하겠다만, 책으로 전부 전수가 가능하면 선생이라는 건 왜 있겠는가.
하물며 머리로 하는 일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매홍검은 처음부터 청화에게 전해주기로 홍령과 얘기한 바가 있다.
신세를 진 것도 있고, 태양의원도 무림문파를 하나쯤은 근거리에 끼고 있는 게 유리하니까.
나도 익히지 않았다 뿐이지 어떤 포인트를 중점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정도는 홍령에게 들었다.
그게 일이 좀 꼬여서 전달이 늦어졌는데, 웬걸, 주려고 보니까 이미 익히고 있는 상황인 거지.
물론 그 과정에서 무공비급 도둑질이라는 난감한 상황이 생기긴 했는데…….
나는 간단하게 원래 청화에게 주려던 무공 비급이라는 얘기를 했다. 화산의 색을 걷어낸 후 주려고 시간이 늦어졌다며 적당한 변명도 덧붙였다.
“그래도, 제가 잘못을 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요. 뭐라도 대가를 치르게 해주세요.”
아무래도 웬 떡이냐! 하고 넘어갈 거 같지는 않은데.
하긴, 이런 심성이니까 나도 홍령도 청화에게 이 무공비급을 주려고 했던 거지.
“그러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 뭐든 따르겠습니다!”
“청화검과 매홍검을 결합해 만들어질 새 검법, 그 완성된 검의 이름을 제가 정하겠습니다.”
“생각해두신 게 있나요?”
“홍령검.”
빽빽한 매화 숲 사이로 빨간 석양이 질 때, 춤추듯 너울지는 검이었던 매홍검.
유려한 체술과의 조화가 강점인 그 검을 마지막으로 피워 올렸던 검수의 이름이 영원토록 남기를 바라며.
“멋진 이름이네요.”
“그 이름에 걸맞은 검으로 완성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널리 알려주세요. 그 검을 배운 제자가 이름난 고수가 되어서 홍령검의 명성을 떨쳤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꼭 해보이겠습니다!”
나는 열의에 불타는 청화에게 내단은 얼마든지 더 내어줄 테니 당분간은 수련에 열중하라고 했다.
거기에 겸사겸사 좌수검을 지도 상대로 붙여주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였고 상대는 홍령이 쓰던 검법을 익힌 일종의 후계자니까.
청화에게 매홍검을 전수한 이유와 새로이 다듬어 나갈 홍령검의 이름에 대해 얘기하자 좌수검은 두 말 않고 청화의 지도를 약속했다.
명망 높은 고수인 좌수검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청화는 거의 태양의원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이후 연무장에서는 기쁨의 비명이 아닌 고통의 비명이 울려 퍼지긴 했지만, 그 스스로 원하던 바이니 불만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고 있던 와중, 예상치 못한 손님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