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269화 (269/350)

269화

우리는 태양의원 내 마련된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 연무장은 보통 창천이 쓰는 곳이었는데, 한동안 창천이 자리를 비워 먼지가 제법 쌓였을 거다.

겸사겸사 연무장의 먼지도 털어줘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선객이 있었다.

“청화 소저?”

“앗, 금 의원님!”

혼자 수련에 몰두하고 있던 청화는 내가 말을 걸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내게 인사했다.

잠깐, 그보다 방금 펼쳤던 그 검은…….

아니다. 일단은 좌수검과의 일이 먼저지.

“대련을 할까 하는데 연무장을 비워줄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청화는 검을 거두고 서둘러 연무장을 갈무리한 후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어디 가지 않고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청화 소저?”

“앗, 그게 혹시, 견식을 하면 안 되는 비무일까요?”

청화가 눈을 빛내며, 그러나 다소 주눅이 든 태도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을 내가 많이 못 챙기긴 했군.

의원들을 가르쳐 성과가 나오면 그에 따른 보상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내가 소림에 갔다가 예정 외에 항주로 가면서 일이 밀렸다.

돌아와서도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겹쳐서 청화의 일은 후순위로 밀려났고.

그 또한 태양의원의 식구이니 신경은 쓰고 있지만…….

“괜찮습니다. 그러면 겸사겸사 사람들을 좀 불러와 주겠습니까? 객당에 머물고 있는 정왕 전하와 무인들을 데려오면 됩니다.”

“네! 바로 다녀올게요!”

청화가 안도의 기색을 띠며 밝은 얼굴로 뛰어갔다. 여태 약속을 안 지키는 내가 야속할 만도 한데.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말이다.

청화가 의원들에게 호신무술을 지도하는 데 성공하면 내단을 나눠주기로 했던 것이 그 약속이다.

한 번은 실패했지만 나는 넉넉하게 기한을 주었고, 청화는 나와 약속한 것 그 이상을 해냈다.

의원들 하나하나를 무림인 수준으로 만들었다는 게 아니다.

태양의원 본원과 분원, 새로 가맹의원이 된 사람들, 의원에서 일하는 간병인과 기타 직원들에게도 이를 전수했다.

말하자면 초과달성을 한 거지.

거기에 일부 환자들을 대상으로 양생술의 일종인 오금희를 지도하기까지.

이 모든 것이 나나 금리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스스로 프로그램을 짜고 의원들과 환자들을 설득해 진행했다는 점이 훌륭했다.

특히 환자들에게 양생술을 지도한 점. 일부 환자들은 스트레칭과 적절한 근육운동을 평상시 지속적으로 해주면 낫는 병들에 괜히 시달리다가 의원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들도 의원의 수입이 되는 건 맞지만, 지금 태양의원은 정말 의원의 손이 필요한 환자만 보기도 바빴다.

양생술로 의원의 역량이 분산되는 걸 막고 그 자체로도 수입원을 만든다.

처음에는 돈을 받지 않았지만 금리가 그 사업성을 알아보고 아예 처방에 넣어 돈을 받았다.

돈이 많은 이들은 1대1 PT처럼 진행하기도 해서 제법 짭짤한 수입원이 되는 모양이다.

그 돈의 일부는 청화가 가져가니 그것만으로도 큰 보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돈이 목적이었다면 부러 짬을 내 연무장에서 자기 수련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다들 오면 시작하죠. 그 전까지 몸 좀 푸세요.”

“……정말 나와 대련을 하겠다는 건가?”

“무인들에겐 그게 제일 확실하지 않겠어요?”

좌수검을 따르는 사람은 척수부터 무인의 혼이 밴 사람들이다. 내가 아무리 좌수검의 친아들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내 사람이 아니라 좌수검의 사람인 것이다.

그런 이들의 마음을 사는 건 간단하다.

“하하, 대련을 한다고? 재밌는 구경을 하게 해줘서 고맙네.”

정왕과 무인들이 도착했다. 청화도 따라와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좌수검은 여전히 머뭇거렸고, 나는 그런 그를 잠깐 보다가 검을 뽑았다.

일단, 내키지 않는 사람을 무대 위로 올리는 것부터 해야겠군.

“여기 이 자리에, 내가 정반합의 회주가 되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무인들은 미동이 없었다. 그 정도로 감정 변화를 티 낼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말이 없었단 말이다.

대신 그들은 눈빛으로 말했다. 너의 말이 맞다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저는 좌수검의 친아들이지만, 거의 평생을 금왕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전대 회주와 금가장의 관계를 안 후 정왕 전하와 손을 잡았던 여러분께 저는 계륵과 같은 존재일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를 납득시킬 무언가를 필요로 하겠죠.”

내가 말을 늘어놓았지만 여전히 침묵이 이어졌다. 정왕만이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띠고 있을 뿐 표정 무인들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좌수검을 겨눴다.

“제가 지면 회주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금 의원…….”

“아들이라고 봐주는 일은 없깁니다!”

나는 보법을 밟으며 좌수검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검 끝이 춤을 추듯 움직이며 다섯 잎의 매화를 그렸다.

“매화검……!”

역시나 좌수검은 내가 펼치는 매화검을 알아보았다. 심상의 화산에서 익힌 재생의 검이 아닌 화산 무공의 기본, 이십사 수 매화검법 말이다.

그러나 역시 좌수검은 좌수검이었다. 한 팔만으로 고수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무인답게 그는 눈에 띄게 놀라움을 보이면서도 내 검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고, 재생의 검을 꺼낸 것도 아니긴 했지만 조금 놀랐다. 한 팔이 없으니 약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좌수검의 검에는 그 어떤 약점도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나 가볍게 호흡한 좌수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공서가 남아 있었다고는 하나, 이걸 어찌 이런 경지까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텐데요!”

나는 곧바로 좌수검을 추격해 들어갔다. 험한 화산의 산세를 뛰어넘던 보법에 다시 한번 이십사 수 매화검법이 가미됐다. 다만, 이번에는 일렁이는 자색의 검기와 함께였다.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 중 몇몇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그리고 반응을 보인 건 좌수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발짝 물러나 이런 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이더니, 이번에는 내가 내지른 검을 받아치며 내 쪽으로 파고들었다.

“이 정도는!”

나는 파고든 좌수검의 공격을 흘리며 사각을 찔렀다. 좌수검은 그 또한 예상한 듯 비껴났지만 검을 거두진 않았다.

역시 이 정도로 진짜를 끌어내긴 부족한가 보군.

내가 자하신공의 기운을 담아 검을 휘두르고부터는 좌수검도 검을 거두고 물러나진 않았다.

대신 우리의 싸움은 대련 그 이하, 고수가 하수에게 내리는 지도대련의 형태를 취했다.

하지만 이 또한 내가 의도한 바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되네. 실전된 자하신공을 어떻게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혼자 익힐 수 있는 게 아냐. 하물며 저 다듬어진 이십사 수 매화검법은, 사숙들이 펼치던 그것과 같아.”

“내 생각 또한 그렇다. 우리가 보아왔던 그 검이 분명해.”

무인들 중 몇몇이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것이 귀에 박혔다.

섬서사변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돌아갈 곳이 없는 무인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겠는가?

이들 중 일부는 화산의 제자다.

단, 그 당시 주력으로 꼽히지 않았던 어린 제자들이다.

사태 당시 빠르게 피신했거나 무슨 이유가 있어서 외부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겠지.

나머지는 섬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낭인이나 작은 문파의 일원이었을 터.

“어떻게 이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옛날 화 소저의 검이 떠오르는군.”

“작은 습관이나 이십사 수 매화검법을 변형한 부분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자하검수였던 그의 색이 묻어나는군요.”

나이가 좀 있는 이들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내 검을 눈에 담았다.

저들은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 섬서 무문의 생존자들이다.

하지만 섬서에서 무림문파를 운영한다는 게 어떤 뜻이겠는가?

거의 대부분이 화산의 속가거나 화산과 간접적으로라도 인연이 있는 자들.

홍령과 같은 시대를 보냈던 이들인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자하신룡 홍령의 아들이다. 내가 바로, 화산의 후예다.

그리고 좌수검에게도 그 뜻은 선명하게 전해졌다.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는 그의 검이 그 증거였다.

심상 속 화산에서도 이십사 수 매화검법을 익히긴 했지만, 사실 그 검은 홍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게 더 크다.

검은 개인의 개성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법.

특히, 그 검으로 주로 상대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천변만화 하는 법이다.

정도의 검을 대할 때와 마두를 대할 때의 검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홍령이 검을 가장 많이 검을 겨뤘던 상대는 누구일까?

“―방금 그건.”

좌수검의 옷자락이 잘려나갔다. 좌수검의 허수에 속지 않고 다음, 그 다음을 노려 찔러 넣은 한 수였다.

부부의 연을 맺을 정도로 인연이 깊은 상대였다.

거기에 둘 다 검으로 내로라할 정도의 후기지수들.

홍령과 좌수검은 그 누구보다 서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터.

홍령이 지도한 나의 매화검법은 좌수검을 상대하는 데 최적화 되어 있으며, 동시에 좌수검의 버릇까지 모조리 닮아있다.

“검으로 증명해 보인다고 했잖아요. 제가, 두 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좌수검의 흔들림이 더욱 커졌다.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수단이 없었는데 어떻게 두 부모의 버릇을 그대로 익힐 수 있겠는가.

하지만 믿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그 검이 바로 제 눈앞에서 휘둘러지고 있으니까.

여기까지는 맛보기다.

모두의 눈에 나의 이십사 수 매화검법이 익숙해졌을 무렵, 나의 검이 전혀 다른 궤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재생의 검, 그 첫 번째. 서의 검!

정신없이 자라난 매화 가지를 후두둑 잘라낼 때처럼, 파격적이고 거침없는 공세를 좌수검에게 쏟아부었다.

“―!”

그 검은 나의 검을 보고 넋이 나가 있던 좌수검의 신경을 바짝 곤두서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옷자락 끄트머리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찢겨나갔지만 그것도 한두 번, 좌수검은 마치 내 검에 춤을 추듯 응하기 시작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폭압적인, 그러나 한 수 한 수가 예기를 머금고 있는 검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바삐 걸음을 뗀 자리마다 작은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촘촘한 검을 쓰는데 이 정도 파괴력이 가능하다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내 친아버지에 홍령의 남편쯤 되는 사람이면 이 정도는 돼야지!

나는 이어 본의 검을 펼쳤다. 좌수검의 촘촘한 그물과 같은 검 사이로 적재적소에 검을 찔러 넣었다. 촘촘하면서도 힘 있는 그물의 틈새가 걸려 북 찢어졌다. 그 빈틈으로 검을 넣었지만 좌수검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해 내 검을 방어했다.

처음 서의 검을 펼칠 때 들렸던 무인들의 감탄사가 잦아들었다. 그들은 어느새 우리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끌 수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심상 속 화산에서 현생에 못지않은 시간 동안 수련을 했다지만, 나의 본질은 무림인이 아니다.

대련이 길어지면 그들은 이를 눈치챌 거다.

단숨에 끝내는 수밖에.

결(結)의 검.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의 감각에 몸을 맡기며 검을 휘둘렀다.

사실 결의 검은 완성되지 않았다.

온전히 이 검을 펼치면, 새벽 수풀 사이를 헤치고 걸어도 이슬에 옷자락이 젖지 않듯 상대의 검이 나를 해하지 못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나의 검은 정확히 한 곳을 향한다.

제대로 경지에 오르지 않았을 경우. 일점에 대한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자신의 빈틈이 드러나 목숨이 경각에 달릴 수 있다.

내가 이걸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뿐―

그거면 충분하다.

섬뜩함과 안온함 사이, 나의 감각을 줄다리기하듯 따라가며 검을 휘둘렀다. 눈을 감아 감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어느 한 순간, 무아지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찰나가 지나갔다―.

뚝, 뚝, 뚝……

바닥이 뜨거운 액체로 젖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눈을 떴다. 바람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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