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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68화 (268/350)

268화

그 잠깐 사이에 어깨가 축축이 젖었다. 애써 참는 듯 보였지만, 재채기와 사랑은 감출 수 없듯이, 이런 상황에서 눈물도 감출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아닙니다. 못 알아보는 게 맞죠. 저도 못 알아봤는데요.”

“그래도, 그래도. 나는 알아봤어야 했는데. 너를 의심하기만 했다.”

“처음에 잠깐이었잖아요. 초면이면 그럴 수 있죠. 이후에는 저를 쭉 도와주셨잖습니까.”

나는 좌수검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이래서야 누가 아비고 누가 아들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따뜻하다.

아버지 금왕도 항상 내게 친애의 감정을 전해 주었지만, 좌수검이 전하는 감정은 또 달랐다.

……홍령이 봤으면 기뻐했을 텐데. 아냐, 울었을지도.

울면서 웃고 웃으면서 울었겠지.

“……홍령이, 그녀도 네가 이렇게 잘 자란 걸 봤어야 했는데.”

걱정 마요. 홍령은 잘 알고 있어요.

차마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사실 좌수검을 만날 때 가장 고민한 부분이 이거였다.

친어머니인 홍령이 혼백이 되어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좌수검에게 말할 것인가.

허무맹랑하긴 하지만 좌수검이 내 말을 안 믿을 거 같진 않다.

둘만 아는 얘기를 말한다든지 하면 신뢰를 얻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홍령이 지금 내 곁에 없으니까 그건 불가능하다.

“지난번에 봤으니까 아마 잘 알지 않을까요. 물론 제가 아들이라는 건 모르고 있겠지만.”

“……봤다고?”

“예. 항주에서 혈교의 인사를 쫓아갔을 때, 그곳에서 봤습니다. 령주라는 자가 젊은 여인을 홍령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래서 적당히 각색해 전달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걸 한번 봐주시죠.”

좌수검이 오기 며칠 전, 동네에 새로 터를 잡은 화백에게 용모파기를 부탁했다.

반나절을 꼬박 붙어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덕분에, 완성된 용모파기는 내가 알던 홍령의 얼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좌수검의 눈도 떨렸다.

“……정말 이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인가. 홍령이라는 이름으로.”

“예, 그리고 화산의 검을 쓰더군요.”

“화산의 검은 이제 견식조차 불가능할 터인데. 어찌 알았지?”

“금가장은 뿔뿔이 흩어진 화산의 비전을 모아 숨겨두었고, 제가 그걸 찾아서 익혔습니다. 독학이지만 제법 경지에 올랐다 자부합니다. 그날 봤던 그 검은 분명 화산의 검이었어요. 그리고 이것도.”

나는 허리춤에서 검 ‘홍령’을 집어 좌수검에게 보여주었다.

“그 홍령이 쓰던 검입니다. 제가 그녀를 몰아붙여 빼앗은 것인데,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봐주세요. 좌수검이라면 진위를 알겠지요?”

사실 이 검은 소림에서, 그것도 심상의 화산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그것까지 좌수검이 알 도리가 있나.

나중에 언젠가는 진실을 말하게 되겠지만, 당장은 납득하기 쉬운 쪽으로 말을 꾸미는 것이 서로에게 낫다.

좌수검은 검 홍령을 한참 동안 살피다가 눈을 꾹 감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말도 안 되네. 이미 이십여 년 전에 그녀는 숨을 거두었어.”

“직접 보신 거 아니잖아요.”

“그렇다 해도, 아니야. 자네가 그린 용모파기는 젊은 시절 그녀를 쏙 빼닮았네. 허나 이십여 년 세월, 그녀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이를 먹었을 게 아닌가. 그러니 아니네. 그녀가 아니야.”

“좌수검처럼 그 시절의 홍령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그 모습 그대로 살려냈을 수도 있고요.”

그 말에 좌수검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에게서 검 홍령을 돌려받아 갈무리했다.

“령주와 홍령의 퇴로를 만들며 죽어가던 혈교의 무인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자신들의 원을 이뤄달라고. 그들의 소원이 뭘까요? 저는 알 것도 같은데.”

“……망자의 부활인가.”

“가능성이 높죠. 하물며 강시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사람의 육신을 만들어 혼을 붙이는, 진짜 부활 수준이라면 그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목숨을 바친 것도 이해가 가요. 다시 살아날 테니까 망설일 이유가 없겠죠.”

좌수검이 아버지의 얼굴에서 다시 무인의 얼굴로, 정반합의 좌수검으로 돌아갔다.

“령주의 얼굴은 없나?”

“용모파기요?”

“그래. 그자의 얼굴을 알아야겠다. 그가 어떤 이인지 안다면, 홍령과 관계가 있는 자라면 자네의 말도 근거가 있어. 그렇다면 노선을 틀어야겠지.”

“정왕 전하와 손을 잡고 단독행동을 하는 대신, 저와 함께 움직이시는 걸로요?”

“거기까지 눈치챈 건가.”

“딱히 친구 사이 같지는 않고. 그런데 저에 대한 얘기도 하시고. 좌수검에게 그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뜻을 같이하는 후원자밖에 없겠다 싶더라고요.”

“……미안하다.”

“어차피 그때는 제가 회주가 아니었을 때니까요. 은 파파 때문이었죠?”

“그래. 정반합에 흘러들어오는 돈의 출처를 추적했지. 금가장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돈을 받아 움직일 수는 없다 판단했다.”

“섬서의 일은 정왕 전하에게도 불안요소로 남아 있을 테니, 이해가 맞았군요.”

“하지만 네가 회주라면 얘기가 다르다. 우리는 너를 따를 거다.”

“저를 실질적으로 키워준 아버지가 금왕인데도요?”

“그 얘기 또한 전해 들었다. ……그가 그 나름대로 그때의 일에 대해 속죄했다는 사실도. 그걸로 그 울분을 다 없던 일로 넘길 수는 없다. 허나.”

좌수검이 다시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과 사랑했던 여인의 피를 이은 자식이 커온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나는 가면을 벗었다. 좌수검의 시선이, 나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많이 닮았구나.”

“그런가요?”

“어릴 적에는 무척이나 아팠다지.”

“네. 태중에 있을 시절 섬서사변을 겪은 탓이겠죠. 그때는 얼굴도 말도 못 하게 못생겼었고요. 아마 그 얼굴을 봤으면 좌수검도 뒤집어졌을걸요.”

“그럴 리가. 그래도 이렇게 살아남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겠지.”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네가 말도 못 하던 시절부터 지금껏 명을 유지한 데는 그자의 노력이 컸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좌수검의 얼굴은 개운치 않았다. 아무리 주범이 아니라지만, 조력도 엄연한 잘못이다. 방조도 죄가 되는데 조력이라고 그냥 넘어갈 수 있으랴.

좌수검은 성장한 나의 존재 때문에, 아버지 금왕을 용서하려는 거다.

“용서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감사는 제가 할 테니까, 용서는 안 하셔도 돼요.”

좌수검이 굳이 아버지 금왕을 용서할 필요가 있나?

나를 키워준 아버지지만 잘못이 있는 건 사실이고, 은 파파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좌수검이 개인으로서 감사하실 수는 있어요. 하지만 좌수검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진 마세요.”

섬서사변의 진실을 밝히고 복수와 섬서의 회복만을 위해 달려온 집단이다. 갑자기 노선이 변경되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혼란은 곧 갈등이 되고 조직의 힘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지.

“제가 회주가 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중요한 건, 이 조직의 근원이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죠. 좌수검이 공사를 헷갈리면 안 됩니다.”

뭐, 좌수검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공사 구분을 하라고 했지만 이들이 모인 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응분 때문이니까.

사적인 응분들이 모였을 때 공적인 일이 되는 거긴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좌수검이 그러면 조금 곤란하다.

“저는 지금처럼 할 겁니다. 정반합의 회주가 되었지만, 태양의원을 책임지는 몸이기도 해요. 도 방주와 좌수검이 전보다 더 움직여야 할 겁니다. 절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주세요.”

이건 좀 치사한가?

갓난아이인 채로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서 하는 부탁이라면 좀 과하게 치트 키긴 하지.

“……알았다. 그대 말대로 하겠다.”

“감사합니다.”

“허면 우선은 혈교의 잔당들을 쫓는 쪽으로 가야겠군.”

“예. 그 부분은 이미 도 방주에게 부탁해놨습니다. 좌수검에겐 다른 부분을 부탁하고 싶어요.”

“어떤 거지?”

“모용세가를 조사해주세요. 아니, 정확히는 모용세가와 혈교의 관계에 대해서요.”

“모용가? 일전에 모용가의 장자가 혈교에 발을 담갔다는 논란 때문인가?”

“그것도 있고, 좀 찝찝해서요.”

내 앞에서 터져나갔던 자들이 모용갑과 같은 방식을 취했다는 것도 있지만, 모용을의 존재도 그렇고 말이지.

“섬서사변과 관련해서 구파일방이나 다른 세가들은 어떤 부분으로든 관련이 있었어요. 무당처럼 반쯤은 가해자 편에 선 자들도 있고, 소림처럼 뒤늦게라도 도움을 준 곳도 있죠.”

그들처럼 본격적이진 않아도 다들 한 손 정도는 거들었다. 아미파나 종남 등은 피해자 구제에 힘을 썼고 팽가를 포함한 몇몇은 부가이득을 취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한 곳이 있어요. 두 곳이죠.”

“하나는 남궁세가, 또 하나는 모용세가지. 남궁세가는 때맞춰 이십여 년간 봉문을 한 관계로 우리도 예의 주시하던 곳이다. 그리고 모용세가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죠.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하지만 모든 문파가 한 발씩은 걸친 일인데, 모용세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거리상의 문제일 수도 있다. 모용세가는 요녕땅 먼 곳에 있으니.”

“거리로만 치면 공동파나 청성도 못지않게 멀죠. 사천당가는 또 어떻고요. 그때 그 일로 남해태양궁과 북해빙궁도 영향을 받았다 들었어요. 하물며 모용가는 위치상 육로 물류의 관문에 있잖아요? 섬서의 산물이 유통되는 게 전혀 없었다면 모를까. 전과 다른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그대는 모용가가 어떤 관련이 있다 확신하고 있는 듯하군.”

“착각은 아닐 겁니다.”

최소한의 연관성은 있을 거다. 그걸 감췄거나 없는 듯 군거겠지. 그렇다면 그걸 감춘 이유가 구리다는 걸 거고.

캐면 반드시 무언가는 나온다.

근거 없는 감이라 해도 좋았다. 이런 촉이 이끌 때는 반드시 정답이었다.

“알았다. 우리는 그쪽을 맡지.”

“부탁합니다.”

“……그대는 정말 금왕의 아들이군.”

어쩐지 이 소리를 할 거 같았지.

모용세가를 의심하는 말을 하는 내내 표정이 영 안 좋았거든.

그 의심의 근거가 금가장의 방식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이십여 년 세월 동안 보고 들은 게 그건데 쉽게 사라지겠냐고.

“서운하세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이런 말도 공사의 구분에 어긋나지만…….”

“뭐, 그럴 수 있죠. 이제 그쪽 얘기는 다 끝난 거 같으니까 슬슬 가실까요.”

“가다니, 어딜 말인가?”

나는 가면을 고쳐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아버지 아들인 것만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을 설득하러 가야죠. 말이나 명분이 아닌, 검으로 말입니다.”

아버지. 처음으로 좌수검을 그렇게 불렀다. 좌수검은 순간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리다가 이내 깨닫고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겸사겸사, 제가 당신의 아들임도 검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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