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267화 (267/350)

267화

“지금 그 말이 이 일대에서 제일 유명한, 젊은 명의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정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어지간히 당황스러운 말이었나 보다. 뒤에 앉아있던 좌수검도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리고 있으니.

하긴, 그러니까 나도 내내 머리에 힘줘서 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

“재능이 있고, 실력이 있다 해서 반드시 뜻이 있는 건 아니죠.”

그리고 사실, 이 재능과 실력은 온전히 내 것도 아니다. 거의 대부분은 홍령의 것이지.

전생의 상식을 기반으로 한 것도 있지만 나는 항상 그것을 ‘거들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고, 결과물을 낼 수 있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는 것은 좋다.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싫지 않다.

그래서 의원이 되겠노라 했다.

그런데, 그게 꼭 의술로만 가능한 일인가?

‘진짜’ 의술에 열의를 불태우는 태양의원의 의원들을 보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홍령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꺼내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무공 또한 살기 위해 익힌 것이었습니다. 그 또한 제 뜻이 있는 길이 아닙니다.”

강함은 즐거웠다. 내 힘이, 내 의지가 물리학 법칙을 찢어버리는 데는 분명 쾌감이 있었다.

옳지 않은 것을 힘으로 제압하고 다시 길을 바로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의원 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얻은 힘을 버릴 생각도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옵션일 뿐, 나를 이끄는 진짜 힘은 다른 곳에 있다.

“저는―.”

전생에서 있었던 일.

그건 지긋지긋한 미련이나 후회 따위가 아니다.

그게 바로 나의 근본이다.

“돈이 바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금왕은 토대를 쌓기 위해 지저분한 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생에 내가 모신 재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으면 큰 규모의 사업을 한다는 것이, 그만한 부를 쌓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처럼.

나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고 싶다.

경영이 사회에 해악이 아니라, 이바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누구에게?

지난 생에서 그 수단을 손에 넣기 위해 재벌가의 더러운 일을 대신 해주는 길을 선택했던 과거의 나에게.

“나도 꽤나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대가 생각하는 건 내가 생각하는 범주를 넘어서는군.”

“그렇습니까?”

“아까는 눈앞의 돈을 덥썩 선택하지 않은 게, 체계를 만들어 오래도록 번성할 기틀을 닦으려 한다 생각했네. 허나 지금 보니 알겠어. 내게 빚을 지지 않으려 했던 거로군.”

“투자를 받으면 그 이상의 이득을 돌려줘야 하고, 그러다 보면 무리하게 수익성을 추구해야 하니 말입니다. 저는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정왕께서 투자가 아니라 그냥 돈을 주겠다 하셨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실 겁니다. 저는 그게 싫습니다.”

“허나 지금 태양의원의 규모를 보면, 자네의 그 뜻을 펼치기 쉽지 않아 보이네. 아니 그런가?”

“알고 있습니다.”

정왕이 말하는 것은, 전생의 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중진국 함정이다.

소규모는 벗어났다. 하지만 거대하다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많아지는데 이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뿐인가? 규모가 커지며 겪는 시행착오도 적지 않다. 사람도 문제다. 시스템과 설비만 있다고 굴러가는 게 아니니까.

이 과정에서 잘못 삐끗하면 수익 성장률이 비용을 따라잡지 못해 고꾸라진다.

그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막대한 투자다.

투자를 통해 규모를 키우고 경력직 인재를 채용해 대기업으로 가는 길에 발을 얹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중소규모에서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전생에선 유망한 스타트업들이 그토록 투자에 목을 맸던 거지만, 동시에 투자는 기업이 목표를 이루는 데 발목을 잡는다.

결국 나중에 가선 상장 후 지분 팔기식의, 부동산 투자 같은 개념이 되어버렸지만, 그건 지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뭔가 생각해놓은 방도가 있나 보군?”

아무렴.

자본주의가 증명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을 두고 험로를 가겠다 결정했는데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봐.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건 힘이죠. 돈도 그렇고, 전하께서 가지신 권력도 그렇고요. 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힘이 있습니다.”

“사람인가?”

“좀 더 구체적으론, 특정인의 명성이죠.”

한 단어로 말하자면 스타(star)다.

스타가 있으면 사람도, 돈도, 협조도 알아서 모인다.

스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긴 하지만 그건 다른 기대를 바라고 주는 돈이나 협력과는 정도가 다르다. 주위의 애정을 기반으로 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은 어느 정도 스타가 되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김진이라는 아이덴티티로 이를 보강할 생각이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마다할 생각은 없다.

그 때문에 정왕에게 나의 목표를 솔직하게 얘기한 것이다.

내게 호감을 보여주는 이 협조자라면 내 길에 조건 없는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명성이라면 좀 더 파격적으로 가는 게 좋지 않나? 그편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 텐데.”

“이목을 끌고 끝이지요. 폭죽이 아니라 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명예는 항상 선(善)의 편에 있다는 말을 믿습니다. 악행으로 부와 권력을 이룬 이들도 종래에 가서는 떳떳해지기를 그토록 바라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래, 그렇단 말이지…….”

정왕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뭔가 내게 도움을 줄 건덕지가 있나?

“어떻습니까, 어르신. 이런 청년이라면 한번 손을 내밀어주실 만하지 않습니까?”

정왕이 뒤편 정자 아래를 보며 말했다. 역시, 보통 노인은 아니었나?

“저분은?”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라네. 세간에는 민초신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계시지.”

민초신의!

사대신의 중 한 사람, 그리고 아버지에게 전 재산을 준다면 나를 치료해주겠노라 했던 사람.

그게 저 노인이라고?

“까마득한 후배가 선배님을 뵙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은 어쨌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지극한 예를 올렸다.

내가 의술에 뜻이 있든 없든 나는 현재 의원이고, 이 사람은 이 분야에서 한 손에 꼽히는 위대한 사람이다.

하물며 지금 정왕이 이 사람과 나를 연결해주려고 하는 거 같은데 어깃장을 놓을 필요는 없지.

“선배라니, 과분하다.”

얼굴의 주름이 축 처져 눈썹이 눈을 가릴 지경이라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때의 그 아이가 이렇게 자랐구나.”

허나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 너를 키운 아비와는 다른 방식으로 돈을 추구하겠다?”

“예, 그렇습니다.”

민초신의는 그 이름대로 민초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의원이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그.

과연, 그가 내게 자신의 힘을 빌려줄까?

“……내 이곳으로 오며 태양의원이라는 이름을, 너에 대한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아니, 수도 없이 들었다 하는 것이 맞겠지.”

“그렇습니까? 어떤 얘기들이었습니까?”

“웃는 이도 있었고 우는 이도 있었다. 허나 그 웃음에 거짓이 없었고 그 울음에는 격랑과 같은 감동만이 있었다. 때로 화를 내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자들은 매사를 대함에 화를 내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 뿐이겠지.”

그렇게 말하며 민초신의는 잠시 먼 곳을 보았다. 무언가 회한에 찬 얼굴이었다.

“내 오랜 시간 어려운 이들을 위해 힘써왔다. 의술이 가야 할 곳은 그러한 방향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산 세월이 어느덧 백여 년에 가까워 신의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세상에는 여전히 도탄에 빠진 이들이 많고 나의 몸뚱이는 여전히 하나뿐이더구나. 허나 너는 달랐다. 다른 길을 택했고, 그 다른 길에 다른 사람들을 끼워 태양의원이라는 하나의 너른 호수를 만들었지.”

아아. 이 사람은 지금 그것을 후회하고 있구나.

“그래. 모르긴 몰라도, 내가 지난 긴 세월 좁고 깊은 하천을 파 살린 사람보다 네가 그 짧은 시간 구해낸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닙니다. 어찌 그 긴 세월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앞으로 십 년, 아니 오 년만 지나도, 네가 만든 뜰은 그보다 더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쩐지 황송한 기분이다. 대선배라는 말로도 모자랄 사람에게 이런 과찬을 듣다니.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해야. 혹 내게도 한 손을 거들 기회를 주지 않겠느냐?”

“선배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오히려 무릎 꿇고 부탁을 드려야 할 일인데요.”

“아니, 내가 부탁을 해야 한다. 오랜 세월, 나만이 옳다는 아집으로 살릴 수 있던 더 많은 사람들을 놓쳤던 이 부족한 늙은이의 남은 시간을, 이곳 태양의원에 의탁할 수 있겠느냐?”

* * *

민초신의가 태양의원에 합류했다.

그 사실은 다른 것보다 우선 태양의원의 의원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지, 지, 지, 진짭니까?!”

“아아, 신의님! 신의님께서 예전 하북 지역을 거쳐 가실 때 뵌 적이 있습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그러니까 대충 사십여 년 전인데. 저희 부모가 전염병에 걸려 큰 고초를 겪었는데 그때 신의님께서 홀연히 오셔서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대신의는 의원들에게 전설적인 존재인 데다가, 그중 민초신의는 민생을 위해 백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헌신했다는 점에서 일부 의원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의 합류만으로도 의원들의 열정에 불이 붙을 수밖에.

특히 장 의원은 그 감동이 남달랐다.

“이곳이 바로 의약방이라는 곳이군. 활명탕은 나도 인연이 닿아 먹어본 일이 있네. 나이가 드니 혼자 침을 뜨는 것만으로는 무리가 있더군. 쉽게 접할 수 있는 좋은 약이야말로 백 명의 명의보다 귀한 것이지. 참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구만.”

제일 먼저 의약방을 들른 민초신의가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민초신의의 전성기 때 가업인 의원을 이어받아 성장한 장 의원인 만큼 평소에도 민초신의에 대한 존경심을 가감 없이 드러냈었는데, 민초신의가 그 말을 하자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거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였다.

“고맙네, 금 의원. 내게 이 의약방을 맡겨주어 고마워. 덕분에 내가, 내가 신의께 그런 말도 들어보고…… 크흡……!”

실로 오랜만에 장 의원에게 이놈 저놈이 아니라 금 의원이라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 한동안 과중한 업무를 맡겨 밤을 새우며 고생한 것도 전부 잊어버린 거 같았다.

금리는 곧바로 하오문과 개방, 그리고 수다회에까지 정보를 보냈다. 모르긴 몰라도 보름이면 전 중원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모두가 놀랄 겁니다. 의원에서 일어난 소요는 아무것도 아닐 테지요.”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았던 민초신의의 정착.

그건 리의 말대로 이슈가 될 만했다.

거기에 그가 오랜 세월 살아오며 쌓아왔던 업적들, 그 모든 것들이 태양의원으로 향할 터.

하지만 그것은 다소 나중의 일이고, 당장 내게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제야 단둘이 있게 되었군요, 좌수검.”

정왕의 방문과 민초신의의 등장에 묻혔던 내 친아버지와의 재회 말이다.

“미안합니다. 선배님 덕분에 이리저리 새로이 생긴 일이 많아서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허나 좌수검은 나의 사과에도 별말이 없었다. 그 대신, 나를 빤히 보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성큼 다가와, 숨이 막힐 만큼 나를 꽉 끌어안았다.

“좌, 좌수검?”

“……살아 있어 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왤까.

이제 와 어색하다고,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건 함께한 시간이지 핏줄이 아니라고, 아마 전과 다를 거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왜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아 오르는 걸까.

“내가, 내가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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