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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66화 (266/350)

266화

“돈 말고 다른 것이라. 좌수검 그대의 아들이라기에 세상사에는 초연한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모양이군. 하긴, 금왕의 밑에서 컸다면 그럴 수 있지.”

내가 아들이라는 것도 얘기한 건가?

좌수검과 정왕의 사이가 새삼 달리 보였다.

그냥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아닌 건가?

처음에는 금손양을 통해서 일을 구한 수준인 줄 알았는데.

나름 비사에 속하는 얘기를 할 정도라면 개인적인 친분이 보통이 아니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래, 돈 말고 무엇을 원하나? 내 듣기로는 그대가 미혼이라 하던데, 내 막내딸이 마침 혼인적령기라네.”

“농이 지나치십니다, 전하. 제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농이라니. 나는 나름 진지한 제안이었는데. 그래, 황제의 핏줄을 이은 군주도 마다하고 원하는 게 뭔가?”

출산을 도왔던 정왕의 딸도 상당한 미인이었으니 그 동생인 막내 군주도 못지않은 미녀일 거다. 나도 한창때 남자인 만큼 미인에 동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짓단 붙들고 매달릴 일도 아니다.

“정왕께선 섬서와 감숙, 산서와 하남, 그리고 호북 일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다스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다만, 무한이나 낙양, 개봉 등 큰 도시는 내 손길이 닿지 않는다네. 빛 좋은 개살구지.”

“예, 알고 있습니다. 큰 상업도시나 소출이 좋은 곳이 빠진 곳들뿐이지요. 그런데도 왕부의 재정은 나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아까 정왕께서도 말씀하셨지만요.”

정왕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이 녀석이 무슨 얘길 하려고 그래? 이런 표정이었다.

“소금이죠?”

“……이보게.”

“좀 떨어진 곳에 염호가 있지만 그곳은 황실에 등록된 소금 산지죠. 하지만 그 지하수가 흐르는 곳에서 우물을 파고 말려 소금을 생산하기도 한다 들었습니다. 황실 몰래 소금 생산지를 여럿 확보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내가 이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정왕의 표정이 빠르게 분노의 5단계를 따라 변했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감정 조절이 대단하군.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내 멱살을 잡았어도 이상하지 않다. 황제의 눈을 피해 조성한 비자금 출처를 밝혀버렸는데 저렇게 온화하게 다시 미소를 회복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냐고.

“대단하군, 대단해. 어찌 알았나?”

“여러모로 조사한 것도 좀 있고요, 금가장에 있을 때 출처 불명의 소금이 계속 거래되는 것도 봤고. 결정적인 건 역시 이번에 실려 온 환자들이었죠.”

“그들이 무슨 말이라도 했나?”

“말을 할 여력이 있었을 리가요. 하지만 그들의 옷에 묻어 있는 소금 결정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아마 지하수가 흐르는 동굴에 우물을 파서 소금물을 길었을 거다. 대외적으로는 도자기용 흙을 파는 광산이라고 해둔 거겠지.

“그 정도로 간파당했다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겠군. 맞네. 워낙 척박한 땅을 떠맡은지라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저 사람들 치료비도 내주기 힘들다네, 하하.”

“그 돈을 좀 쓰시죠.”

“태양의원의 성장에 말인가?”

“아뇨.”

이걸 설마 이런 식으로 물꼬를 트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걸로 이 일대 백성들의 의료비 지원 사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보게, 금 의원. 그게 그렇게 말이 쉽지 않네. 의원에 가서 병을 고치라고 돈을 줘도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는 게 급한 사람이 있고, 술을 사는 사람도 있지. 본인이 쓰면 그나마 낫다네. 힘 있는 자에게 뺏기는 일도 부지기수야.”

“그러니까 본인에게 돈을 주지 말고, 의원에게 주십시오.”

“의원에게?”

“빈부에 따라, 나이에 따라, 질병과 건강상태에 따라, 여유가 있는 자는 자기부담금을 일부 지게 하고 아닌 자는 왕부에서 전액도 부담해주는 겁니다. 의원은 무료로 치료를 제공하고 그 돈을 왕부에서 받는 거지요.”

나는 전생의 건강보험 제도를 적당히 수정해 설명했다.

전생의 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곳은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으니까.

하지만 행정체제는 꽤 꼼꼼하단 말이지.

“―그렇게 제도가 자리 잡아 사람들이 꾸준히 의원의 관리를 받게 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호오, 그게 뭔가?”

“우선, 사람들이 건강해집니다. 몇몇 지역을 빼놓고는 소출이 좋지 않은 땅이 많은데, 자연의 일이야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사람이 힘을 내면 더 나아지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거기에 안전하게 출산하는 비율이 늘어나면 사람도 늘어나겠지요. 최근 태양의원이 개발한 신약이면 헛되이 죽는 산모도 획기적으로 줄어들 겁니다. 사람이 는다는 것이 곧 힘이라는 걸, 전하께는 깊이 설명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그렇지. 허나 그것뿐이라면―.”

“풍토병과 전염병에 대한 대응도 빨라질 겁니다. 일전에 무한에서도 타 지역의 동식물을 잘못 들여왔다가 큰 홍역을 치렀죠. 저도 그 일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암시장을 중심으로 퍼졌고 의원의 가격이 비싸 사람들이 쉬쉬하며 앓다가 수천 명이 죽어나간 후에야 관이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일은 기억하고 있네. 그렇지. 그런 부분을 미리 파악할 수도 있겠군.”

“거기에 또 하나.”

지금까지는 제도를 도입했을 때 따르는 다소 당연한 기대효과다.

하지만 이 부분은 예상 못 했을걸?

“왕부에서 돈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그 의원이 충분한 실력과 자격이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할 겁니다. 그렇죠?”

“……! 자네, 지금 의맹의 권한을 내가 빼앗아 오라고 하는 건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좋군. 굳이 제반 설명 할 필요 없이 한마디만 하면 되는군.

아마 홍령이 있었다면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요? 의맹의 권한을 빼앗아 온다고요?]하고 물었겠지.

지금까지 의맹은 무림의 의원들에게 자격을 발행함으로써 힘과 권위를 얻었다.

그들의 규칙을 따르지 않거나 비협조적일 경우 의맹의 뒷배, 무림맹의 무력이 위협으로 다가왔으니까.

모두가 무당처럼 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무시하고 영업할 수 있는 의원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우리 태양의원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나도 이런저런 사건을 통해 내 멋대로 할 권리를 얻어낸 거다. 보통 의원들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왜냐?

돈을 벌 수가 없으니까.

환자들이 오지 않으니까.

의맹 자격에 대한 환자들의 신뢰, 그게 그들의 무뢰배 같은 행동을 의원들이 용인하고 넘어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런데 그 돈을 준단다.

어디서? 왕부에서.

왕부가 의료비 지원을 해줄 만한 의원이라고 판단을 내린 의원에 한해서.

“전부 뺏기는 어려울 겁니다. 처음에는 협조도 안 하려고 할 거고요. 하지만 하나둘 지원을 받는 의원이 생기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당장 환자들이 달라진다.

자신의 사정에 따라 약간의 자기부담금만 내고 의원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돈만큼 사람을 움직이는 게 있던가?

거기에 그냥 돌팔이도 아니고, 무려 왕부에서 그 실력을 인증한 의원 아닌가?

“하나 둘, 왕부 인증을 받은 의원들이 성업하기 시작하면 위기감을 느낄 겁니다. 하나둘 왕부에 손을 내밀겠죠. 그러다 무당의처럼 가장 많은 의원이 있는 곳이 왕부 인증을 받게 되면―.”

“그들에게 가는 돈을 내가 쥐고 있게 되는 거군.”

“많은 무림 문파들, 특히 무당이 경우 문파를 움직이는 주요 수입이 태청의문과 그 휘하 무당의들에게서 나오죠.”

일이 잘 풀릴 경우, 정왕부는 대문파들의 돈줄을 쥐게 된다.

치료를 제공했는데 정왕부가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그들은 쫄쫄 굶어 죽게 되는 것이다.

“뭐, 그건 정말 희망적인 상황이고요. 대문파들도 쌓아둔 곳간이 있는데 자기들 명줄을 그대로 쥐여주진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까진 바라지 않네. 내 목이 위험할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느 정도 그들에게 제동을 걸 수 있다면 충분해.”

정왕의 눈이 빛났다.

말이 이 일대의 통치자요 중원에서 한 손에 꼽는 왕부 중 하나라지만, 동시에 이곳은 무림 대문파들의 입김이 가장 강한 지역이기도 하다.

정왕부가 염정(鹽井)을 파서 몰래 소금까지 내다 팔아야 할 정도인 이유 중에 치외법권인 무림맹 소속의 문파의 땅을 건드리지 못해서도 있을걸?

각 무림문파의 존재 때문에 저 위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오지 못하니 국방비 대신이라 친다지만, 당장 이 일대의 살림을 신경 써야 하는 정왕은 어지간히 불만이 많았을 거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행태에 불만이었고 말이지.

누군가는 너도 무림인 아니냐고, 태양의원의 업태 또한 무림문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거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난 역시 어느 정도 그들을 견제할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양의원 또한 마찬가지다.

감시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내가 해이해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전생의 대기업 오너, 재벌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으니까.

“나 또한 득을 보겠지만 그대와 태양의원이 얻을 이득에 비할 바는 아니군. 과연, 당장의 천금이 아니라 백년을 내다보는 대계야.”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그리되면 태양의원의 본업이 실로 바빠질 테니, 전하의 백성들을 치료하느라 전하의 주치의가 될 수는 없겠군요.”

“아,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하, 당했군, 당했어!”

정왕은 한 방 먹었다는 듯이 무릎을 치며 웃었다.

아주 달콤한 열매를 보여주었다. 정왕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냐고?

돈은 정왕에게 있지만 일을 추진하기 위한 키는 내게 있다.

정왕은 나의 협조 없이는 절대 이 사업의 첫 삽을 뜨지 못한다.

무림문파들의 힘을 뺏는 이 계획에 협조할 의원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테니까.

“참으로 재밌는 청년이군. 정말 우리 막내에게 관심 없나? 막내는 황제 폐하께도 귀여움을 받는 아이라네. 황실의 부마가 되는 건 쉽게 오는 기회가 아냐. 그렇게 된다면 자네 일도 훨씬 쉬워질 걸세.”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인연이라면 만나게 되겠지요.”

내가 전생에 재벌가 정략결혼의 폐해를 얼마나 많이 봤는데, 나보고 정략결혼을 하라고? 절대 싫다. 가끔 잘 맞는 부부도 있지만, 그런 결혼은 한쪽이 조금이라도 처지기 시작하면 있던 금슬도 다 사라진다고.

“이 사람아. 바른길을 간다고 수단까지 반드시 정도여야 하는 법은 아니야. 젊은 사람이 유연성을 가져야지.”

“정략결혼이 그리 그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제 가치관과 맞지 않을 뿐이죠.”

“허어, 자네의 그 가치관이라는 게 뭔가? 자네를 달리게 하는 원동력, 보고자 하는 이상 말일세. 자네가 그리는 그림을 좀 구경하고 싶군. 그래야 내가 어떻게 보조를 맞출지 생각할 거 아닌가.”

내가 그리는 그림.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

이상향.

사실, 일부러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움직여 왔다.

항상 나와 함께하는 존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제 뜻은…… 일단, 의술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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