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마음의 준비는 마쳤다.
좌수검이 예고 없이 왔다면 허둥지둥했겠지만, 언제 올지 알고 있었으니 그에 맞춰 생각을 다듬었다.
진미당이 아직 착공도 들어가지 않은 와중에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광산이 무너진 그 마을의 사람들을 데려온 것이 바로 좌수검을 따르는 무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도 참 운이 좋았지.
좌수검을 비롯한 무인들이 구조를 도와주고 점혈로 과다출혈을 막아 이송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환자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을 거다.
그들은 환자들을 이송하고, 후에 좌수검이 올 거라고 알려주었다.
왜 같이 안 왔냐고 했더니 볼 일이 좀 있어서 그 일이 처리된 후 온다고 했는데…….
아마 좌수검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겠지. 나 또한 그랬으니까 좌수검도 그럴 거다.
내가 좌수검 입장이었어도 솔직히 당황스러웠을 테니까.
솔직히 지금도 실감은 안 난다.
그래서 그냥, 평소처럼 대하기로 했다.
아무리 피가 이어진 사이라고 해도,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건 사실 핏줄보다는 함께 보낸 시간 아닌가?
게다가 우리는 동시에 정반합의 회주와 회원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친아버지라는 걸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홍령이 함께였다면 좀 달랐겠지만.
우웅―
기억이 없는데도 유독 좌수검의 일에 반응하고, 저도 모르게 내 몸에 빙의해 이름을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잖아.
미리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일부러 좌수검과 함께하는 자리를 더 만들고 시간을 보냈을 거다.
지나버린 일이니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좌수검이 있는 정자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엔 좌수검 외에 다른 사람도 함께 있었다.
“……오랜만이군, 금 의원.”
“그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좌수검. 조금 늦었습니다. 환자를 보던 중이라.”
“괜찮네.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아무래도 좌수검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인가 보군. 우리는 전과 다르지 않게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헌데 이분은?”
나는 고개를 돌려 좌수검의 동행인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오십이 좀 넘었을까?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인은 우리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뭐지? 보통내기가 아닌데?
여기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그의 차림새를 말한다.
화려함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심플한 장포를 걸쳤지만, 난 저 장포가 절대 평범한 장포가 아니라는 것에 태양의원 전체를 걸 수도 있다.
원래 진짜 비싼 물건일수록 심플한데 멋스러운 법이다.
유백색의 원단은 최고급 물건이고 솔기 하나하나 마감이 예사롭지 않다. 거기에 원단 자체도 직물을 짤 때 다른 소재를 넣어서 은은하게 비치는 무늬가 있다.
애초에 나다닐 때 입는 겉옷을 저렇게 유백색으로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것부터 보통이 아니긴 하지.
반지며 귀걸이도, 그냥 비싸다가 아니라 최소 보물이라고 칭할 만큼 귀한 것들이고.
아버지 금왕도 저 정도 물건은 한두 개밖에 소장하지 못했다.
거기에 보통 부자 정도라면, 좌수검이 윗사람을 모시듯 한 걸음 물러나 있지는 않겠지.
정자 아래에 이 사람을 모시는 듯한 노인도 하나 가만히 시립해 있는데 그 사람도 보통 기도가 아니었다.
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서 무림인은 아닌데, 살아온 공력 자체가 남달라 보이는 노인이랄까?
그런 이가 모시는 사람이면 절대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가만, 이 사람 누굴 좀 닮았는데.
혹시?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황족에 대한 예를 올렸다.
그러자 중년인은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어떻게 나인 것을 알았는가?”
역시 정답이군.
“손주분들과 많이 닮으셨거든요.”
이 중년인의 정체는 정왕.
황제로부터 이 일대의 자치권을 임명받은 황족이다.
소림에서 출산을 도왔던 군주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기도 하지.
“그런가? 그렇게 많이 닮았나?”
“예, 특히 눈이 똑같습니다.”
사실 닮았다는 건 뻥이다. 그 갓난쟁이들 얼굴을 내가 여태 기억하고 있을 리가.
그냥 정황 사정을 따져봤을 때 이 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라곤 정왕 밖에 없으니 던져본 것이다.
“헌데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애초에 나는 좌수검을 만나러 왔다. 다른 사람, 그것도 갑자기 일대의 지배자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많이 놀랐나 보군. 미안하네. 원래도 이리 신분을 감추고 성을 여기저기 시찰하는 편이긴 하네. 하지만 일정에 없는 움직임은 맞지.”
정왕이 신분을 감추고 시찰을 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렴, 사업을 벌이는데 그 지역의 통치자에 대해서 알아본 적도 없을까.
군주의 출산 이후에도 혹시나 그 아비 되는 이가 감히 군주의 몸에 손을 댔다고 불호령을 내릴까 싶어 정왕이라는 사람에 대해 면밀히 조사한 바 있다.
이렇게 몰래 시찰을 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 시대의 보통 황족과는 다른 사람이다.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고 그들의 삶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문제가 생긴다면 몸소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황족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
말하자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쯤 되겠다.
거기에 일대의 전권을 가진 왕이니 권한도 많고 한데, 아무래도 그 권한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황실의 권한이지 무림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아니지 않겠나?
반쪽짜리 권력이라는 거지.
이 일대에 무림세력이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반쪽도 후하게 쳐준 거다.
“사실 좌수검 이 사람이 나를 떠나 자네에게 간다고 하기에, 마침 명망을 떨치는 태양의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함께 왔다네. 그러다 오는 길에 한 마을에서 사고가 있었고, 나와 좌수검은 그곳에서 사고 현장을 시찰하느라 좀 늦었지.”
“그렇군요.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하, 과례일세. 어찌 그들이 산 게 내 덕이던가?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금 의원 덕분이지. 어디 보자, 듣자 하니 그들을 치료함에 있어서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 했다지?”
사실이다.
안 그래도 삼생초 수액을 시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개량 마비산을 본격적으로 투입한 것도 이번 일이 처음이었다.
전생에서도 신약을 처음 시험할 때는 돈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주면 몰라도. 돈을 낼 때는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어 케이스 모집을 할 때지.
게다가 이번엔 그들의 동의를 받을 새도 없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았지만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동의 없이 한 일에 돈을 받겠는가.
그러한 사정을 에둘러 설명하자 정왕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대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자고 하는 일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한 푼 이득도 없이 넘어갈 수는 없지. 또한 그런 일을 이 내가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고. 허니 이번 그들의 치료비는 내가 냄세.”
“예? 전하께서요?”
“아니 되나? 사람이 많으니 액수가 적지 않겠다만 정왕부가 그 정도도 감당 못 할 정도로 가난하진 않다네. 거기에 태양의원의 가격은 다른 의원들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들었네.”
“밥 먹듯이 올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아픈 사람이 맘먹고 올 정도는 됩니다.”
“그래, 그렇다지. 헌데 이 정도 수준이라―.”
정왕이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위가 뚫린 정자에서는 태양의원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진 않아도 질 좋은 재료를 쓴 건물과 항상 청결한 경내.
일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직책에 맞게 나누어진 깔끔하고 청결한, 활동하기 편한 제복을 착용하고 일했으며, 한 번 사용된 천이나 붕대, 솜 등은 청소부들에 의해 분류되어 외부의 세탁소로 운송되고 있었다.
한 곳에서는 수시로 불을 때며 쇠로 된 물건들을 소독했고 그 열은 난방이 필요한 병실을 덥혔으며, 주방에서는 양질의 재료로 만든 식사를 입원 병실에 날랐다. 간단한 간식을 만들어 대기 중인 환자나 보호자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청화에게 맡긴 아이들로, 의원에서 일하거나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부모라면 누구든 자녀를 무료로 맡길 수 있다. 아이들은 청화에게 글과 간단한 체술을 배우고, 재능이 있는 아이는 무공까지 익힐 수 있도록 지원 중이다.
그 하나하나에 정왕의 시선이 닿았다.
달리 어떻게 운영하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그 또한 일대를 이끌어가는 통치자인 탓인지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했다.
“내가 그 치료비를 낸다고 해도 썩 이문이 남을 거 같지 않을 거 같네만. 진짜로 돈이 되기는 하나? 무례한 질문인 것을 알지만 너무 궁금하군.”
“저희 태양의원이 다른 의원들에 비해 좀 저렴한 건 맞습니다만, 사정이 넉넉한 분께는 또 그만큼 받는 편입니다. 그러면 크게 무리는 없습니다.”
“하하, 이거 내가 내니까 더 받겠다는 뜻인가?”
“그렇다고 해도 무당 같은 곳에서 제시하는 금액보다는 저렴할 겁니다.”
“그런가? 부자라 돈을 더 받는다고 불만을 가질 수도 없겠군. 하긴, 그런 곳들이라고 있는 사람에게 더 받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니.”
정왕은 무슨 생각이 난 듯 제 턱을 가만 긁었다. 그리고는 잠깐의 침묵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더 큰 돈이 있으면 더 큰 일도 할 수 있겠어.”
응?
왜 저러지. 투자라도 하려고 그러나?
“어떤가? 내가 대신 지불할 치료비의 백배를 준다고 하면?”
잠깐만, 진짜?
“내가 백배를 내면, 어떤가, 내 주치의로 올 생각이 있나?”
“예? 주치의요?”
투자가 아니라?
“그래. 보아하니 이곳은 기틀이 잡힌 듯하니 큰 자금이 있으면 더 사업을 키울 수 있을 게야. 한 오 년만 내 옆에서 주치의로 일하게. 그러면 백배의 돈 그 이상의 지원을 해주지.”
갑작스러운 제안에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 황족이 대체 왜 그러지?
다친 이들의 치료비를 준다는 것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 내가 알기론 그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
지난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정왕은 돈으로 구빈을 하는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럴 돈이 있으면 오히려 재활을 하는 데 돈을 썼다.
비루먹은 말이 있으면 목에 깔때기를 박고 밥과 물을 넣어주는 게 아니라 뜯을 풀과 먹을 물이 있는 길을 익힐 때까지 부지런히 데리고 다니다가 어느 정도 체력이 붙고 길을 기억하면 놓아주는 식인 거다.
그냥 돈을 쓰는 것보다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내게 단순 보상을 넘어서 이런 제안을 한다고?
……시험인가?
“돈 말고 다른 것은 안 되겠습니까?”
좋다.
그러면 나도 정왕을 시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