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어머.”
“하아, 난 몰라…….”
“저, 저, 저 화상이 미쳤나―!”
금손양은 묘한 웃음소리를 흘렸고 양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공은은 기겁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진만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한 걸음 물러났다. 방금 전의 일에 대해서 어떤 거리낌도 없는 태도였다.
“잘 지내셨어요? 어째 금 의원님은 키가 더 큰 거 같은데, 아직도 성장기예요? 하아, 금 의원님 보니까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네요. 저희 여기까지 진짜 한숨도 안 쉬고 왔잖아요.”
“어…… 양진 스님도 잘 지내셨고요?”
“잘 지내긴요! 완전 바빴죠! 아미파로 돌아가서 관자재암에 있었던 일 보고하고, 금 의원님 제안도 위에 올려보내고! 꽉 막힌 사숙들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공은 사숙이랑 추명사고께서 힘 써주지 않았으면 저희 여기 못 올 뻔했다고요.”
“결국 오신 걸 보니 잘 해결된 거고요.”
“그럼요. 그 고생을 하고 나서 금 의원님을 보니까 정말 반갑기 그지없다니까요. 어휴.”
그럼 그렇지, 난 또 뭐라고.
하마터면 양진 스님이 날 좋아하는 건가 착각할 뻔했잖아.
출가한 지 오래되어서 남녀의 구별이 심하지 않아 거리낌도 별로 없고, 내게 꽤 친근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래, 양진 스님 정도면 나름 좋은 친구가 될 만하지.
“자세한 얘기는 한숨 돌린 다음에 하시죠. 별채로 안내해드릴게요.”
나는 금리에게 아미파의 손님이 왔다는 말을 전하고 남은 별채로 그들을 안내했다. 방을 정하고 짐을 푼 후 간단히 차라도 마시려는데, 또 전령이 태양의원의 대문을 두드리며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표행은 내일 저녁쯤 도착한다네. 빠른걸?”
아마 내가 먼저 와 있으니 늦장을 부릴 수 없어서 최대 속도로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물건에 별 이상이 없으면 좋으련만.
“모처럼 북적거리겠어.”
지금까지 태양의원에 사람이 적었던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관계있는 인물들이 한자리에 많이 모이는 것은 처음이다.
거기에 정파의 인물들뿐 아니라, 수적이나 하오문 같은 존재들도 함께.
다들 손님으로 온 입장이고 나와의 관계가 있으니 대놓고 적대감을 내비치진 않겠지만, 뭔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다소 혼잡하겠지만 새로움은 그런 곳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좀 기대되는걸.”
* * *
며칠 후.
항주에서 출발한 표행도 마침내 태양의원에 도착했다. 표사로 따라나선 이들은 객잔에 자리를 잡았고 의술을 배우기로 한 의생들은 집을 지어 나간 의원들이 기숙사로 사용하던 방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들을 곧바로 수업에 밀어 넣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몇몇 의원들은 가르치는 일은 적성에 안 맞는다며 발을 뺐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의원들이 새로운 교육체제에 관심을 보였다.
그간 한 명에게 A부터 Z까지 배우던 의술을 세세하게 과목별로 나눠놓는 일은 이미 끝내 놨으니, 거기에 각기 적성이 맞는 의원을 교수로 배정해주면 된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의원들은 대부분 제자 한둘 정도는 기본으로 키워본 사람들이었으니까.
물론 여러 명을 한 번에 가르친다든가 하는 일은 그들에게도 낯선 일이었지만 그건 의원들이 감각을 익혀야 할 문제였다.
“초급반의 수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중급반 시수를 짤 겁니다. 지금 수업을 배정받지 못한 분들은 중급반에 투입되실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항주에서 데려온 이들, 그리고 내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한 이들 중 기초도 안 되어 있는 이들이 초급반이다.
개중에서도 문자를 익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들은 기초반으로 두어 동네 학당에서 글을 함께 배우게 했다.
중급반은 어느 정도 의술을 익힌 이들이 대상이었다. 태양의원의 의원들이 개인적으로 제자로 받았던 이들도 포함이었다.
고급반은 아직 받지 않았는데, 이때부터는 전생의 인턴처럼 태양의원 각 분원에서 의원들의 지도를 받으며 실무를 한다.
그리고 연수반은―
“―그러면 금 의원님은, 종양의 크기에 따라 시술을 할지, 수술을 할지, 약으로 치료할지를 결정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시술을 하려고 절개했는데 생각보다 부위가 클 경우 수술로 변경할 수도 있고, 약을 쓰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미파는요?”
“우리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큰 경우는 약을 쓰지 않고 일정기간 절식을 권해요. 스스로의 의지로 힘들다면 아미파의 단식원에 들어가게 하죠.”
“종양 또한 섭취한 음식물을 양분 삼아 자라니, 그것도 효과가 없진 않겠군요. 하지만 그 때문에 환자가 활력을 잃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 텐데……?”
“그러니까요! 태양의원처럼 확 째버리면 그 사람들 그 고생 안 해도 됐을 텐데!”
“수술이 무조건 정답은 아닙니다. 아미파처럼 단식도 고려해볼 만하군요.”
기존에 태양의원에서 진행하던 세미나에, 의술 교류를 하러 온 아미파 의원들, 새로 가맹의원이 된 의원들이 더해져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논의, 연구를 하는 장이 되었다.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면서 분란이 생길까 우려했지만, 다행히 심각한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을 믿고 아주 손을 안 댄 것은 아니고 미리 방비를 한 것인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쓰읍, 좀 심심한데. 잠도 안 오고. 우리 슬쩍 나가서 뒷동산에 오를까?”
“거긴 왜?”
“왜긴 왜야? 아미의 비구니들과 하오문도들이 그곳 연못에서 목욕을 한대잖아.”
“에라, 아서라. 한 놈이 여편네들 뒷간 훔쳐보겠다고 나갔다가 곤죽이 되어서 돌아왔던 거 기억 안 나냐?”
의생이 된 수적이 몸서리를 쳤다. 표행에 참여해 태양의원까지 왔던 수적 중 하나가 버릇을 못 고치고 뒷간을 얼씬거리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불쑥 떨어진 김진에게 전신에 피멍이 들도록 얻어맞은 것이다.
“두목은 진짜 신출귀몰하다니까.”
“그러니까. 우리 대화도 듣고 있을지도 몰라. 입조심해.”
“끄응, 내 맘대로 말 한 마디도 못 하고. 답답해 뒈지겠구만.”
“그러면 넌 배로 돌아가든가. 청수채는 그래도 여기보단 풀어주잖아.”
“에이씨, 나는 투덜거리지도 못하냐? 잠이나 자!”
수적 의생들이 구시렁대며 자리에 눕고 이내 요란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를 떴다.
참고로 버릇 나쁜 그 수적은 일부러 표행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본보기를 보이려고 말이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복작복작하게 어우러진 것이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의원에 소란스러운 일이 생겼다.
갑자기 열댓 명쯤 되는 사람들이 대거 태양의원으로 실려 온 것이다.
그것도 그냥 실려 온 게 아니었다. 다들 팔다리 하나쯤은 곤죽이 되어 있었다. 귀나 코가 함몰되거나 내장이 터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날붙이로 인한 상처가 아니었다. 곤죽, 문자 그대로 강한 힘에 의해 뭉개진 상처였다. 이런 건 떨어진 신체 부위가 있어도 이어 붙이는 데 한계가 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동굴이 무너져서, 크흡……!”
따라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근처에 광산으로 밥을 벌어먹는 작은 마을이 있는 모양이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흙을 캐는데, 갑자기 갱도가 무너져 광산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전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그나마 죽은 사람은 몇 안 되고 대부분 이런 식으로 떨어진 바위에 신체 부위가 짓눌린 상황.
“지나가던 무인분들이 점혈을 해줄 테니 어서 이곳으로 옮기라고 해서 달려왔습니다요. 아이고, 의원님. 제발 우리 마을 사람들 좀 살려 주셔요, 흑……!”
“저희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다들 응급처치는 됐겠지? 위급한 순으로 수술 들어가!”
항주에서 실어온 마약을 아낌없이 쓸 때가 왔다.
순도 높은 마약은 장 의원의 조제를 통해 수술 현장에서 쓸 수 있는 훌륭한 마비산으로 재탄생 된 후였다.
원래 사용하던 마비산은 당당이 만들어주고 간 당가의 비전.
거기에 나와 당당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면서 당가 마비산의 개량 버전을 만들어냈다.
당가 비전이 기반이긴 하지만, 당가에서 그 사실을 안다 해도 많은 부분을 손봤기 때문에 태양의원에서 조제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거기에 부작용은 적고 효과는 더 좋단 말이지.
“끄응, 금태양 이 망할 녀석 같으니라고. 나보고 이 많은 환자들의 마취를 다 책임지라니. 아주 노인공경이 아니라 노인공격을 예사로 아는 놈이라니깐, 쯧!”
장 의원은 혀를 차면서도 일일이 환자들에게 마비산을 복용시키고 그 정도를 확인하러 바쁘게 돌아다녔다.
“뭉개진 부위를 절단하고 처치 시작하겠습니다.”
“코뼈 재조형 들어갑니다!”
“날카로운 바위에 찍혔나? 생각보다 깔끔하게 절단됐는데. 여기 한번 붙여보겠습니다!”
만일을 대비해 확보한 수술실마다 의원들이 수술을 집도하기 시작했다.
과거라면 점혈을 할 수 없어 탁월한 수술 기술을 갖고도 제 실력을 뽐낼 수 없던 이들이 자신 있고, 동시에 신중하게 수술에 임했다.
태양의원 특제 마비산은 그들이 최대치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 또한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였다.
가장 넓은 수술실에 다섯 명을 동시에 수술대에 올려놓고 수술을 시작했다.
지혈을 위해 점혈을 하려면 섬세하게 혈도를 짚어야 한다.
마비산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으니 한 번에 다섯 명 수술이라는 기행 아닌 기행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
“와아, 금 의원님 손 움직이는 거 보여? 난 하나도 안 보이는데.”
“야, 조용히 해. 집중 흐트러지시면 어떡해?”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하셨잖아. 오히려 잘 보라고 하셨는걸.”
의생들은 모든 수술에 참석해 이를 참관하고, 손이 모자랄 때는 잔심부름이라도 하며 기술을 훔쳤다. 수술을 마친 후 맥을 짚고 이에 따라 세세하게 처방을 내리는 모습도 보고 익혔다.
이런 배움은 중원 무림 그 어디에서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 그 수액은 확실히 효과가 있는 거 같더냐?”
긴급 수술들이 마무리되어 가면서 장 의원이 마지막으로 남은 내 수술방에 들렀다.
수술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번 꼼꼼하게 세척과 소독을 해야 하는데, 귀찮다고 노래를 하면서도 들른 것을 보면 어지간히 그 효과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액, 그러니까 삼생초를 짜내어 만든 즙을 실전에 적용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운 좋게도 사고 직후 점혈을 통해 지혈을 했다지만, 사고 직후의 출혈이나 수술 중의 실혈은 무시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건강하고 무공을 익힌 이들을 중심으로 부작용이 없는지, 혈액을 대체할 수 있는지 실험을 해왔지만 정말 피가 부족한 상황에서 써본 적은 없다.
그랬던 것을 이번에 과감하게 투여 결정을 내린 거다.
아직 마지막 한 사람의 봉합이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수술 부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장 의원에게 천천히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 엄지, 엄지로구나!”
그래,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