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좌수검뿐 아니라, 좌수검을 따르는 무인들도 함께다.
도개걸의 말로는 그들 또한 섬사사변의 생존자들이고 좌수검에 못지않은 실력자들이라고 한다.
솔직히 의원을 지키라고 부르기에는 아까운 실력자들인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그게 더 효율이 좋을 거 같아서 불렀다.
일을 함에 있어서 무척 까다로운 사람들이라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 부분은 내가 좌수검의 아들이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솔직히 아직도 내가 그 사람 아들이라는 실감은 안 나지만.
좌수검이 뭐야, 홍령이 내 어머니라는 것도 낯설다고.
어쨌든, 지금은 눈앞의 일을 마무리해볼까.
“자, 회장 당신이 밭에 심어서 결과를 낼 약초는 이런 물건입니다. 어때요, 마음에 듭니까?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보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정말 이걸 맡아도 되겠습니까?”
청년회장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이, 이런 걸 줄은 몰랐어. 기껏해야 좀 귀한 약재일 줄 알았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키우게 될 줄은. 아닙니다, 아니에요.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안 됩니까? 회장 노릇은 딴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지시를 들으며 성실히 일을 하겠습니다. 나는 그릇이 작아요. 더 정신을 맑게 하고, 믿음을 갖고 기다렸어야 ,했는데……!”
“아뇨, 나는 스스로가 흐트러지면서까지 새로운 기회를 기다렸던 그 진심을 믿고 싶습니다.”
나는 청년회장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 마을은 이제야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기에 젊은 사람을 회장 자리에 추천했습니다. 이 삼생초 또한, 처음으로 인세에 뿌리를 내리는 상황이죠. 조금 흔들려도, 미숙해도, 문제가 생겨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자라가자는 마음가짐으로 해주세요.”
나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 또한 믿지 않는다.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언젠가 최후의 순간에 크나큰 역풍을 맞아 쓰러질 뿐이다.
“지, 진짜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나는 그물을 믿는다. 바람이 불어도 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갈대를 믿는다. 태양의원은 나 혼자 세운 이름이 아니었다.
함께라면 충분하다.
“언제든 어려우면 저를 찾으세요. 그리고 같이 돌파구를 찾아봅시다. 아, 술도 그렇고요. 몇 년은 절대 입에 대지 말고 주기적으로 의원을 찾아 몸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절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할 겁니다!”
나는 흔들리지만, 동시에 눈을 빛내는 청년회장의 손에 삼생초의 씨앗을 건넸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장 의원님도요.”
“흥, 자라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보름?”
“예. 하지만 그 전에 제가 화분으로 키우던 게 도착할 겁니다. 그걸로 먼저 연구를 시작하시죠.”
“하아, 이놈이 나가면 일거리를 벌어온다는 걸 까맣게 잊었구만. 아니지, 잊은 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 웃었을 뿐이지. 이번에는 내 차례로구만.”
말로는 온갖 핀잔을 주고 있지만 장 의원의 눈도 청년회장 못지않게 빛났다. 아니, 보다 진중한 눈빛이라고 할까?
“내 선조의 이름이 있는데 그냥 물러날 수는 없지. 내 무조건 네놈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보이마.”
“믿겠습니다. 장 의원님 없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하아, 야 임마! 내가 이제 겨우 가정을 꾸렸는데! 한시도 집에 못 들어가고 일만 하게 생겼잖느냐!”
“가족이 생겼으니 열심히 일하셔야죠. 수당은 제대로 챙겨드릴게요.”
“그냥 수당만 갖고 될 줄 알어? 추가수당도 내놔!”
“당연하죠. 곧 오신다는 양아들 일거리도 마련해드릴게요. 다른 건 걱정 말고 연구에만 매진해주시면 됩니다.”
“기다릴 거 없이 지금부터 시작해야겠구만. 회장놈아! 거 씨앗 몇 개만 줘 봐라! 그 단계에서부터 좀 살펴봐야겠다!”
청년회장이 장 의원에게 삼생초 씨앗을 약간 나눠주고, 장 의원은 빨리 돌아가서 살펴봐야겠다며 노구를 움직였다. 청년회장도 작은 밭에서 시범적으로 시작을 해봐야겠다며 서둘러 돌아갔다.
“……삼촌께 은혜를 입은 무인이라면, 좌수검 그분이 오십니까.”
“응.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 않았습니까. 이해합니다.”
태양의원의 호위와 관련된 일은 총관인 금리의 일이기도 했다. 미리 말할 수도 없었지만, 사실 지금도 이에 관해서는 좀 고민이 있었다.
“현재 태양의원의 규모로 봤을 때 한 분이 오시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몇 분이나 오십니까?”
“음,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겠는데. 와 봐야 알 거 같아.”
“함께 오시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는 아십니까.”
“……오면 얘기할게.”
그들은 정반합의 일원, 섬서사변의 생존자다.
그들에게 금리는 섬서사변을 원조한 지원가의 손녀.
나야 원래의 핏줄이 다르다지만 그들이 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좀 생각해 볼 부분이다.
나보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클 내 조카가 과연 아버지의 과거를 납득할 수 있을까?
심지가 굳은 아이지만 나조차도 당황스러운 과거였으니…….
“제게 얘기하기 전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신 듯하니 기다리겠습니다. 허면 다른 이야기를.”
“그래. 아까도 간략하게 얘기한 의원 양성에 대한 것 말인데―.”
“하지만, 한 가지만은 기억해주십시오. 당신의 조카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합니다. 당신께서 부재하신 동안도 이곳을 잘 지켜내지 않았습니까?”
“……!”
“그 언제가 되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때야말로 삼촌과 조카를 넘어서, 금 의원님께 총관으로서 진정한 신뢰를 얻는 날이겠지요.”
“리야, 난 지금도 너를―.”
“어, 저기 있다! 태양아! 금태양!”
갑자기 저쪽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마차가 대로를 지나 북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마차 위에서 크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누님이잖아?”
아니다, 정정하겠다. 누님 아니고 ‘누님들’이다.
나를 발견하고 목청 좋게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은 내 손윗누이인 금간양,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은 진양 누님,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고모님들이시군요. 가서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누님들이 오기로 되어 있었던 거야?”
당황한 나와 달리 리는 담담했다. 리한테 말하고 놀러 온 건가?
“아뇨, 저도 몰랐습니다. 다만 간양 고모가 보내는 서찰에서 낌새가 느껴지긴 했습니다. 그간 건물의 증축을 맡길 때 금왕공방을 통해 사람을 구했던지라.”
하긴, 리는 그곳의 총관이었고, 금왕공방은 사람이 손으로 하는 모든 것을 다루는 공방이다 보니 건축을 하는 장인도 있다. 최근 북촌에 이것저것 공사를 할 일이 많았으니 그쪽으로 알아봤나 보군.
진양 누님이야 금간양 온다고 할 때 겸사겸사 내가 사는 곳을 보고 싶다고 따라온 거 같지만…….
저 사람은 대체 왜 온 거지?
마차는 한두 대가 아니었다. 사람을 태운 마차가 네 대, 그리고 각종 짐을 실은 마차가 수도 없이 이어졌다.
전이었다면 이게 무슨 진풍경이냐며 호들갑을 떨면서 구경하러 나왔을 북촌 사람들은, 이제 이 정도 일에는 단련이 됐는지 “또 태양의원에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더 이상 민박을 줄 집도 없을 텐데, 저 사람들은 어디서 자려고 저렇게 몰려들 왔대.” 같은 시답잖은 소리나 하며 제 갈 길을 갔다.
“태양아!”
“진양 누님, 어서 오세요.”
진양 누님은 마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해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이구, 잘 지냈니? 어디 보자. 어째 키가 좀 더 큰 거 같구나, 내 착각인가? 리의 편지에는 네가 없어서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보니 꿈만 같구나!”
“네, 어떻게 때가 맞았네요. 누님을 뵈니까 저도 기쁩니다.”
진양 누님이 처음 내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태양의원은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어떤 점에서는 전생의 엔젤 투자자 같은 존재지. 그런 점에서 내가 먼저 누님을 모셨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야, 진양 언니만 반겨주고 나는 하나도 안 반겨줘?”
이어 내 옆에 도착한 마차에서 의족을 착용한 금간양이 부축을 받아 천천히 내렸다.
“자기 볼 일 있어서 온 사람이랑, 내가 없어도 일부러 이곳에 온 사람이랑 같을 리가.”
“물론 내 볼 일 있어서 온 거지만! 그래도 섭하다잉?”
금간양이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다. 예전에는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내가 태양의원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고, 무한에서의 일을 마친 후에는 그럭저럭 평범한 남매 사이가 됐달까.
“적당히 해. 나도 체면이 있는데.”
“어이구, 이놈 좀 봐. 그래, 여기가 네 동네라 이거지? 예전엔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제법 번듯하네? 그치, 언니?”
금간양이 언니라 부른 존재는 진양 누님이 아니었다. 금간양을 부축해 마차에서 내린 사람. 고요하고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모두의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태양아.”
“예, 오랜만입니다. 손양 누님.”
금손양. 진양 누님보다 어리고 금간양보다는 나이가 많은, 우리 집안의 여섯째다.
우리 집안의 형제인 만큼 그 또한 금가장의 사업 하나를 받아 일하고 있는데, 사실 그 사업이 다른 사업들에 비해 그리 각광받는 일은 아니어서 금가장에선 그리 큰 지분을 차지하지 못하는 존재인데…….
“오랜만입니다, 고모님.”
“그래, 리야. 여기 와 너도 보게 되니 참으로 반갑구나.”
말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라, 금가장 내의 제 입지에 대해선 큰 불만이 없다 알고 있다. 나와는 얼굴을 마주할 일이 별로 없어서 그냥 데면데면한 정도.
그건 금손양이 하는 사업이 밤낮이 뒤바뀐 일이기 때문이다.
“손양고모께서 오셨다는 건, 이 북촌이 진미당(珍味黨)이 생길 만큼 성장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내가 예의상 차마 대뜸 묻지 못했던 것을, 리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진미당. 그건 금가장의 요식사업에 해당한다.
상단과 표국을 운영하다 보면 곳곳에 객잔이나 주루를 거점으로 두고 움직여야 하는데, 아버지는 하오문과 사이가 애매했으니까.
과거에는 크게 흑자가 나지 않는 진미당을 왜 금가장에서 따로 운영하는지 이해를 못 했지만, 아버지의 역사를 알게 된 지금은 그 이유를 알겠다.
“그 정도로 큰 곳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한단다.”
손양 누님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근데 왜 그게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예전에는 그냥 무던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은 파파와 도 방주가 너를 도울 새로운 거점을 만들어 두라 연락했단다. 자세한 것은 둘이 있을 때 얘기하자꾸나.]
응?
은 파파와 도 방주?
그렇다는 건, 설마?
[합의 회주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너의 과거에 대해서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내 동생으로 생각한단다.]
……아버지의 진짜 핏줄 중에서도 정반합의 일원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