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수술은 어렵지 않게 마무리됐다―, 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일단 적출해야 할 종양이 너무 컸다.
자연 수술 범위가 커졌고, 출혈이 늘었다.
점혈로 최선을 다해 실혈을 막았지만 곯은 살에는 점혈도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충분히 시험해보고 사용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다행이라면 내가 이런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수단이 있었다는 점일까?
“이걸 말의 혈관에 연결하라고? 그리고 이걸 짜 넣어?”
갑자기 불려온 장 의원은 내가 내민 가죽주머니와 주사기를 받고 당황했다.
“예, 빨리요!”
“아, 알았다.”
장 의원은 내가 시킨 대로 움직였다. 실혈양에 맞게 혈관에 가죽주머니에 든 붉은 액체를 주입했고, 말의 맥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든 액체는 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속도를 내 수술을 마무리했다.
“한 주머니 더 드릴게요. 말이 상태를 회복할 때까지 계속 넣어주세요. 아, 속도는 아까보다 천천히 부탁드릴게요.”
“그건 어렵지 않다만, 이게 대체 뭐냐? 그 정도 출혈이었으면 죽었어야 정상인데.”
수술을 도운 남 의원도 가죽주머니의 내용물이 궁금해 죽겠다는 듯, 지친 얼굴에 눈만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태양의원의 비밀무기가 될 물건입니다. 조만간 알려드릴게요. 하지만 당분간은 이 물건의 존재에 대해서 비밀로 해주세요.”
“알았다.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줄 게지?”
“그럼요.”
“쩝, 환골탈태를 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솔직히 그 미끈한 얼굴이 네놈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는데. 수술 실력이며 이런 진귀한 물건까지, 이게 네놈이 아니어도 네놈이 진짜라고 내가 우기고 싶은 심정이구나.”
장 의원이 복잡한 표정으로 꿍얼거렸다. 나 참, 솔직하게 축하해주진 못할망정.
수술이 끝난 다음 날 아침, 신생도 도착해 내 진정성(?)을 증명해주었다.
“뭐라고요?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세상에, 좀 힘들어도 스승님이랑 함께 올 걸 그랬어요! 그 망할 놈들 다 어디 있어요?! 내가 가만 안 둬!”
가짜가 있었다는 사실에 길길이 날뛰는 신생을 진정시키고, 나는 리와 장 의원 등 태양의원의 주요 요직에 있는 이들을 소수 모아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보고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된 거야.”
“그렇군요. 정말 환골탈태를 겪으셨다니. 그 과정에서 고생이 있으셨지만, 이제 삼촌의 몸이 건강하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감축드립니다.”
리는 정말 기뻐 보였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아이인데도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도는 게 보일 정도였다. 원래도 예쁜데 웃으니 더 예쁘네.
“달라진 얼굴을 이용해 두 가지 신분으로 움직이셨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삼촌의 기지가 실로 대단합니다.”
“은 파파의 계책이지. 언젠가는 진실을 밝히겠지만 한동안은 더 써먹게 될 거야. 그러니까 당분간은 비밀로 부탁해.”
“어찌 비밀로 한다더냐? 대문 앞에서 가짜들과 소란을 피울 때 네 녀석 얼굴을 본 환자며 의원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것도 포함해서요. 입단속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항주에서의 일은 어떻게 된 거냐면―”
특히 이 부분은 금리와 장 의원이 상세히 알아야 했다. 항주에서 오는 마약은 원재료 그 상태로 처방할 수 없다. 다른 약재와 섞어 부작용을 억제하고 원하는 효과만 얻을 수 있게 정제해야 한다. 원물로도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걸 마약이 아닌 약으로 사용하려는 거니까.
“일 났구먼. 지금도 일이 많은데 또 일이라니. 어엉? 금태양 이눔아, 너는 나가면 남 일 시킬 생각만 하며 돌아댕기지? 이 늙은이 뼛골이 삭겠다. 네놈이 할 것도 아니면서 뭔 일을 그렇게 많이 만들어 왔어?”
“힘드세요? 그러면 의약방 내려놓고 좀 쉬시고요. 하긴, 나이가 있으신데 이제 쉬실 때도 됐죠. 안 그래도 새로 가맹이 된 의원님들 중에 제약에 재능이 있는 분이 꽤 있다던데―.”
“누, 누가 쉰대! 어딜 내 일을 뺏을 생각을 해! 네놈이 더한 일을 가져와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감히 그럴 생각은 하덜 말어라!”
그럼 그렇지. 의약방의 총 책임자라는 감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아는데, 어디서 강짜를 놓고 있어.
“그럼 다행이네요. 지금 이 일 말고도 또 다른 일도 있거든요.”
“뭬, 뭬야?!”
“그 일 얘기도 할 겸, 좀 나갈까요? 바람도 쐬고 마을 구경도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리와 장 의원은 영문을 모른 채로 내 뒤를 따라 나섰다. 천천히 오라고 했더니 마음이 급해선 빠르게 내 뒤를 쫓아온 신생은 더 쉬라고 엄포를 놓았다.
“어라, 여기도 집이 생겼네요?”
태양의원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
전에 이곳은 그냥 산길이라 아무것도 없고, 그저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길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에도 집을 지을 수 있는 작은 평지마다 옹기종기 집이 지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산골에 있는 초가집 같은 게 아니었다. 제법 번듯하게 지어진 데다 어떤 집은 이 층, 삼 층으로 건물을 올렸다. 평지가 작은 대신 층수를 높인 모양이었다.
당연히 저런 건 건축비가 비싸다. 자재도 싸구려는 아닌데. 평균보다 좀 좋은 정도?
삼 층짜리 제일 좋은 집을 보며 왜 이런 곳에 이런 집이 들어섰지 보고 있자 장 의원이 내 뒤에서 엣헴, 하며 헛기침을 했다.
“어떠냐? 괜찮아 보이지?”
잠깐만, 설마?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장 의원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고개를 쳐들었다.
“내 집이다. 네놈 떠났을 즈음에 삽을 떴는데 얼마 전에 완공했지. 이제 새벽에 일이 끝나도 반 각이면 집에 온다 이 말이지.”
“장 의원님네 집이요? 왜요? 숙소 좋은 데로 드렸잖아요?”
태양의원은 의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멀리서 왔거나 혼자 사는 이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기숙사 개념으로 장원 내 방을 제공하고, 가족이 있는 경우 작은 별당을 제공했다. 객잔에 장기 숙박을 할 경우엔 숙박비를 일부 제공했고.
그중에서도 장 의원은 본원의 주요 멤버인 만큼 방 두 개짜리 작은 별당을 혼자 쓰게 제공했다. 제약방 특성상 새벽까지 일을 하거나 또 새벽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내 나이에 거기서 잠자는 것, 밥 먹는 것까지 일일이 감시받아야 쓰것느냐?”
“그래도 이 집은 혼자 쓰기엔 너무 크지 않―.”
“어, 하라부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삼층집의 맨 위층 창문이 열리더니, 어린아이가 장 의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장 의원도 아이를 발견하고는 헤실헤실한 낯으로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옹야, 더 자거라! 이 할애비 일한다!”
“……저 모르는 사이에 어디서 애를 낳아오셨어요?”
내가 알기로 장 의원은 가족이 없다. 어린 나이에 가업을 이어야 했기에 필사적으로 살았고 그 때문에 결혼할 시기도 놓치고 홀로 살았다. 그가 자신의 제약에 대한 기술과 선조의 유산을 넘겨준 것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삼촌께서 떠나신 후, 의원에 방문하던 분과 합가하셨습니다. 혼식은 아직이고요.”
리가 내가 없는 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전해주었다. 상처(喪妻)하고 먼 도시에 가서 돈을 벌러 간 남자가 어미에게 손주를 맡겼다는데, 아이가 아파 태양의원을 찾았다가 장 의원과 마음이 맞았단다.
허나 먼 곳에 살아 매번 얼굴을 보러 왕래하기 힘들어 장 의원이 아예 집을 장만했다고.
“잘됐네요. 이제 장 의원님 홀애비 소리는 안 들어도 되는 거죠?”
“이눔이?”
“너무 그러지 마세요, 삼촌. 혼식은 삼촌이 오시면 하고 싶다고 미루고 계셨습니다.”
“그러셨어요?”
“……이게 다 네놈 덕분이니, 적어도 네놈이 있을 때 해야 할 거 아니냐. 떼잉, 오지랖 넓은 놈이 있어야 경사가 났다며 혼사비도 대주고 그럴 거 아니냐! 그 때문이지 딱히 다른 이유로 네놈을 기다린 게 아니야!”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장 의원의 목소리에 또 창문 밖으로 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하라부지, 화내? 나한테는 화내지 말라구 했잖아!”
“아, 아니다! 더 자래두!”
아이의 순진한 물음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장 의원은 영락없이 아이 앞에서 찬물 못 마시는 어른이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저기는 시장인가? 아직 장 설 날짜가 안 된 거 같은데?”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선 벌써 가판을 세우는 상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처음으로 이 마을에서 의술을 선보였던 시장이니 그 날짜를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필요한 물자나 식료품 등을 공급할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분명 장이 설 날짜가 아니다.
그뿐이 아니다. 뜨내기 상인들의 가판대들 사이, 장의 중심부에는 아예 상점이 들어서 있었다.
“이제 상설 시장이라 보시면 됩니다. 주요 생필품을 파는 곳은 가게가 들어섰고, 가판대지만 매일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전히 때가 되면 장이 서지만 그때는 정말 특수한 물건들을 가져오는 장돌뱅이들이 추가되는 정돕니다.”
“그만큼 장사가 되나?”
“물론입니다. 저길 보십시오.”
리가 장터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드문드문 거리를 두고 자리했던 집들 사이, 다른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언덕에만 집이 세워진 게 아니었다.
“출발 전 지시하셨던 대로, 태양의원 내에서 처리하기엔 일이 너무 많아지는 것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권하여 따로 사업을 꾸리게 도왔습니다.”
“의원에서 사용하는 천의 세척과 고순도 술 제조 등 말이지?”
“예.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은 금왕공방의 힘을 빌렸고, 현재는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됐다는 말이군.”
“예. 가맹 의원을 많이 받아들인 데다 분원의 수요도 늘어서 삼촌이 계획하신 것보다 더 많은 고용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일자리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부근의 촌락에서 많은 이주민이 오는 실정입니다.”
“과투자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딱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졌군.”
“물건의 생산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만, 시일이 더 지나면 잉여 인력이 생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오나?”
“태양객잔과 북촌객잔이 계속 증축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새 객잔 하나가 더 필요할 정도입니다. 현재는 일부 주민들이 자신의 집을 민박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만…….”
“거주 문제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네가 걱정하는 건 먹거리 문제지?”
“예. 두 공방은 현 상황에서 더 이상 인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저희의 손해가 커집니다.”
태양의원의 일거리 중 몇 가지를 분리한 건,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있지만, 태양의원의 경영 효율화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봉사가 아니란 말이다.
“일자리를 확보하는 수밖에 없겠네.”
“하지만 뚜렷한 묘안이 없습니다. 혹시 괜찮은 생각 있으십니까?”
“크게는 두 가지 있지.”
지금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상황을 타개할 괜찮은 방법이긴 하다.
“일단 밭으로 가자.”
“밭이요?”
“우리 비워둔 밭 있잖아.”
거친 땅에 효율이 안 나는 곡식 대신 약재를 심자고 농부들을 설득해 비워둔 땅.
한동안 땅에 맞는 약재를 찾지 못해 땅을 놀려 왔었다.
“내가 거기 심기에 딱 좋은 약초를 찾아왔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