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오래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면 항상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새벽 일찍 도착한다든가 아니면 부러 태양의원으로 바로 가지 않고 마을을 먼저 본다든가.
마을의 변화는 내가 없는 동안 의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직관적인 지표였다.
마을의 생활과 밀접하게, 북촌과 함께 발전하는 것이 바로 태양의원이니까.
다른 분원을 낼 때도 항상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의원의 일이 아니어도 마을 행사에는 꼭 참여하라고 독려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나는 산을 넘어 바로 태양의원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택했다. 이 방향으로 가로질러 가면 마을은 볼 수 없지만 의원과는 가장 가깝다.
“허억, 헉…… 일단 겉보기로는 별 문제 없는 거 같은데.”
내공을 있는 대로 쏟아부어 달렸더니 근육이 지쳤는지 숨이 거칠었다. 신생을 두고 왔으니 망정이지, 같이 왔으면 객잔이 아니라 산속에 떼어놔야 했겠는걸.
신생은 오는 길 중간에 두고 왔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항주에서 있었던 일의 여파가 아직 몸에 남았는지 최대속도로 달리는 일을 힘들어했다.
어쨌든 내 두 눈으로 무사함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신생은 천천히 따라오라 이르고 나만 먼저 온 것이다.
창천과 달리 신생은 길도 잘 찾고 야무지니까 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당장 중요한 건 태양의원이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다.
건물이 부서진 흔적도 없고, 시신도 없다.
멀리서 피 냄새가 흐릿하게 나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독한 알콜 냄새가 풍기는 걸 보면 수술을 한두 건 진행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래도, 내 눈으로 직접 사람들이 무사한 걸 확인해야 안심이 된다.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려 태양의원의 정문으로 향했다. 전날 좌수검이 반으로 갈라버린 태청장원의 비석을 지나 문 앞으로 가자,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 이게 이상하단 말이지.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향하는 시간.
북촌의 사람들이라면 새벽에 일어나 그날의 밭일을 해치우고 의원을 찾을 시간이다.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도 아침 일찍 출발을 해 지금쯤 의원에 도착한다.
때문에, 지금 시간이면 이 앞에 긴 줄이 서 있는 것이 정상.
그런데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거기에 문이 굳게 닫혀 있기까지?
이건 좀 이상하다.
“계십니까.”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반응이 있었다.
바로 담벼락을 뛰어넘지 않은 건 안에 인기척이 느껴져서다.
고수가 있는 건 아닌 거 같지만, 안의 상황을 모른 채 대뜸 혈혈단신으로 뛰어들 수는 없으니.
빼꼼 열린 문틈으로 모르는 얼굴의 문지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뭐요? 오늘치 번호표 배분은 끝났는디. 응급 환자면 저쪽 응급문으로 들어가시구려.”
“그런 게 아니라, 저 왔습니다. 리는 안에 있죠?”
“총관님은 안에 계시긴 한데, 그쪽은 뉘쇼? 뉘길래 우리 총관님을 찾으시나?”
“……금태양입니다.”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 내가 내 의원에 와서 내 소개를 해야 하다니.
“별일은 없었던 거 같으니 안심이긴 한데, 리가 새로 뽑은 분입니까? 내 용모파기를 안 알려주던가요?”
그래, 일단 내가 걱정하던 일은 없는 거 같으니까 안심인데.
“총관님을 막 함부로 부르시네. 그러다 경을 칩니다. 금 씨면, 총관님 친척이오?”
하아?
“그 집도 참 특이하구만. 한 집안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이라니. 그러면 안 헷갈리시오?”
“헷갈리다니, 누구와요?”
“누구긴 누구야. 우리 태양의원의 주인인 금 의원님 말이지.”
“……아니, 그 사람이 나라고요. 나. 내가 금태양입니다. 이 가면을 보면 모르겠어요?”
용모파기야 그렇다 치고, 가면을 보고 여태 내가 금태양인 줄 모른다고?
이건 좀 심하다.
내가 생각하던 일이 아니라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문지기는 일종의 첫인상인데, 리가 여기에 이런 부족한 사람을 배치했다는 거부터가 말이 안 된다.
근데 문지기가 이어서 한 말은 더 가관이었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우리 의원님 안에 계신데 네놈이 뭐? 내가 금태양이다? 이놈아, 가면 썼다고 다 가면신의인 줄 알어? 어디서 사칭질이냐, 사칭질을!”
“하아?! 사칭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안에 내가 있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뒤에서 누가 다가오기에 환자인가 싶었더니, 나와 똑같은 가면을 쓴, 비슷한 차림에 비슷한 체구의 남자가 문지기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웃기지 말라 그래라. 그놈이 가짜다! 어서 가짜를 끌어내! 내가 진짜다! 진짜 금태양이다!”
이 새끼는 또 뭐야?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까 사람이 절로 욕이 다 나오네. 지금 안에 들어가 앉아 있다는 놈도 골치 아픈데, 하나가 더?
“무슨 일입니까.”
“아, 총관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금 의원님이라고 사기를 치는 놈들이 두 놈이나 와서―.”
“둘이나?”
문틈이 조금 더 열렸고 그 사이로 미간을 살짝 찌푸린 금리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그 뒤로 나와 똑같은 가면에 비슷한 차림, 비슷한 체구를 한 남자가 더 있었다.
저놈이 또 하나의 가짜군.
“우리 태양의원이 많이 크긴 했나 봐. 나를 사칭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이것도 유명세 중 하나라고 생각해야지. 그렇지, 리야?”
이 말을 한 것도 내가 아니다. 먼저 와 있던 그 가짜였다.
“……예, 삼촌.”
“아니, 갸가 갸가 아니라니까?! 나야, 나! 그 불꽃 튀는 혼란 속에서 너랑 내가 코끼리를 챙겼던 거 기억 안 나? 내가 금태양이다, 리야!”
“무슨 소립니까. 그때 함께한 건 나, 진짜 금태양입니다. 금왕공방에서 재회했을 때는 우리 사이가 제법 살벌했지만 그래도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이가 됐지요. 그렇지, 리야?”
“허, 많은 일? 무슨 많은 일을 겪었는데? 다 얘기해 봐!”
“그 많은 일을 어찌 다 설명합니까? 애초에, 당신은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리는 총관으로서 나의 행적을 꿰고 있지요.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말한다면 리가 당신이 가짜임을 바로 알 겁니다.”
“당연히 알겠지, 나는 소림에서 지금 막 도착한 길이다!”
“이거 보세요. 리가 방금 고개를 저은 거 보입니까? 나 금태양은 소림에서의 일이 끝나고 항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일을 마치고 지금 막 돌아온 거고요.”
“나,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항주로 갔던 일은 비밀에 부쳐야 했다고! 그렇게 중요한 일을 신중하지 못하게 떠들다니, 진짜 금태양이라면 그럴 리 없어!”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그렇게 흥분하며 떠드는 것부터가 금태양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리야?”
“이런 상황에 흥분하지 않게 생겼어? 그렇지, 리야?”
가짜들끼리 잘 논다…….
“일단, 일단 진정들 하십시오.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생각을 좀 해야겠습니다.”
그래, 리야. 너도 당황스럽지?
나도 그래. 아니, 당황스럽다 못해 기가 찰 지경이다.
가진 거 하나 없이 다 무너져가는 장원에 현판 하나 꼴랑 달아놓고 영업을 시작해서 이제야 좀 번듯한 의원으로 키워 놨더만. 자리를 좀 오래 비웠다고 내 공적을 홀랑 처먹으려는 놈들이 나타나?!
우웅一 우웅―
내 어처구니없음에 공감하는지 검 홍령도 공명했다. 그 소리가 마치 [미친 거 아니에요? 유명해지니까 별 사기꾼이 다 꼬이네?! 이것들을 확 그냥!]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검은 공명하다 못해 화가 난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금 의원님이 오셨대.”
“와, 정말요? 나 번호표 새로 뽑아야겠어요. 금 의원님에게 진찰받을래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금 의원님이 셋이래.”
“그게 무슨 소리예요?”
“금 의원이 셋이면 세 배로 빨리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건가?”
녀석들이 같잖은 걸로 다투는 동안 담벼락 옆 건물에서 사람들이 나와 우리를 둘러싸고 웅성거렸다.
다들 손에 번호표를 하나씩 쥐고 있는 걸 보니, 문 앞에 대기줄을 길게 세우는 대신 대기하는 동안 쉴 건물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한 모양이다.
줄이 길면 지레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거니와, 번호를 받아놓고 달리 할 일이 없으니 마을로 돌아갔다가 제때 진찰을 받으러 돌아오지 않거나, 뒤늦게 와서 자기가 앞 순번이었으니 먼저 받겠다고 우겨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등 문제를 일으키는 환자가 많았다.
하지만 저렇게 건물을 지어서 그 안에서 기다리면 그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아하니 간단하게 요기할 음식도 팔고 있나 보군. 숙박을 제공하지 않는 작은 객잔이라고 봐도 좋겠어. 북촌의 객잔들은 손님을 좀 빼앗겼겠지만 리가 그 정도는 수요 계산을 하고 지어놨겠지. 이런 건 잘했다.
“의원은 잘 돌아가고 있었던 거 같고, 문제는 이 사람들인데……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긴 했나봐.”
“이봐, 내가 할 말이다!”
“내가 하지 않는 이상 다 의미 없는 말이죠. 리야, 사람들 불러서 이자들 정리하고 들어가자. 그래, 나 없는 동안 수익이 어떻게 됐다고?”
“가긴 어딜 가? 창천! 이 녀석들 좀 치워!”
이쯤 되니까 누가 한 말이 내가 한 말인지 나도 헷갈릴 지경인걸.
자아, 이걸 어떻게 정리한다.
눈앞의 놈들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냥 검을 뽑아서 제압하면 그만.
하지만 차후의 일도 생각해야 한다.
정반합의 일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자리를 비울 일이 생길 텐데, 그때마다 내가 달려와서 이놈 말고 내가 진짜다! 라고 할 수는 없잖아.
여기서 저놈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놔 미연에 그런 마음을 먹는 놈을 차단한다 쳐도, 중원이 얼마나 넓냐고.
그 소문을 못 듣고 또 이런 식으로 나서는 놈들이 분명 있을 거다.
그중에는 지금 이놈들보다 더 나를 잘 연기하는 놈들이 있을 수 있다.
당장 이놈들만 봐도 나에 대해 보통 조사를 한 게 아니잖아.
거기에 가면은 내가 봐도 내가 언제 가면을 잃어버린 적이 있나? 싶을 정도.
가면을 벗는다고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닌 것이, 정말 감쪽같은 인피면구가 존재하는 세상인데.
우웅― 우웅―
홍령이 [그럼 어떡할 거예요? 사기꾼들이 저러고 있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볼 거예요?] 라고 말하는 거 같군.
무슨 수를 써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다.
태양의원의 구성원들이 진짜 나를 판가름할 능력을 가지는 거다.
“당신은 왜 아무 말이 없습니까.”
잠자코 두 사람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리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내 조카가 진짜 나를 판별할 방법을 생각해 낼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난 그렇게만 말하고 팔짱을 꼈다. 나서서 의술로 나를 증명하겠다느니 하지 않았다.
내 조카라면, 태양의원의 일원이라면, 분명 그럴듯한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장 의원님을 모셔오세요.”
“의약방의 장 의원님 말씀이십니까?”
“그분은 삼촌의 얼굴을 아십니다.”
그 말에 다투던 두 금태양이 말과 행동을 멈췄다.
“그, 그래. 얼굴을 보는 게 제일 확실하지!”
“가면을 쓰고 있으니 누군지 사칭하는 것도 쉬워서 큰일이군. 그나저나, 그쪽 금태양 씨는 왜 말을 더듬으시는지? 설마 가짜라는 걸 들킬까 봐?”
“무, 무슨! 그쪽이야말로 몸을 달달 떨고 있는데!”
그래. 밥을 먹을 때는 종종 가면을 벗어서 장 의원은 내 얼굴을 알지. 장 의원이라면 한 번에 나를 구분해낼 수 있겠군.
우웅―
우웅―
우웅―
……잠깐만 나 환골탈태 했잖아.
얼굴이 다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