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제갈다영답지 않은데.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제갈다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더 흥미진진한 일이라도?
“제갈소저가 그 외에 별다른 말은 안 했고?”
“……없다.”
별 말도 없이 떠났다니. 진짜 다른 흥미진진한 일이 생겼나 본데.
이러나 저러나 나에게 큰일은 아니지.
제갈다영이 남궁세가를 외가로 두고 있다는 사실에는 좀 관심이 있지만, 그 외에 딱히 제갈다영을 옆에 둬서 득이 될 만한 부분은 없다.
재밌는 아가씨긴 하지만 딱히 친구가 되고 싶은 상대도 아니고.
양면에서 아쉬울 게 없다면, 나중에 인연이 될 때 얘기를 이어나가도 상관없겠지.
“―그나저나 넌 말야. 그때 아주 자신 있게 혼자 가겠다고 해놓고, 여기 와 있는 게 말이 되냐? 여기 본원하고 정반대거든? 이상한 사기계약이나 당하고 말이야. 네가 애냐? 신생도 그러진 않겠다.”
“…….”
“저요? 저 부르셨어요?”
“아냐! 이 녀석 타박 좀 하고 있었어.”
회수의 객잔이 보일 때까지, 나는 한참 동안 창천을 갈궜다.
솔직히 이 녀석은 좀 갈궈도 돼.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다. 녀석이 리를 두고 한눈을 판 거 같아서 화가 난 게 아니란 말이다.
“네 스스로 태양의원의 식구라고 생각한다면, 일을 그렇게 하면 안 돼. 너를 믿고 중요한 서찰을 맡겼잖아. 너는 길을 잃었어도 서찰은 본원에 갈 수 있었어. 네가 길을 잃어서 본원은 때를 놓친 정보가 한둘이 아닐 거다.”
어디까지나 일적인 부분에서 화를 내는 거다.
……진짜라니까?
“내 일을, 모두의 일을 쉽게 생각하지 마. 네가 태양의원을 집으로,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도 생각해.”
녀석은 태양의원을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시골의 무가에서 태어나 일대를 주름잡으며 산 도련님이라 그렇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래된 과거의 일.
오랜 시간 고독하게 홀로 살아온 과거를 생각해서 여태까지는 녀석이 제멋대로 행동해도 봐주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검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일이 검을 뽑기 전에 해결된다. 네가 보기엔 별거 아닌 것들이 그렇게 만드는 거야. 평화와 일상이라는 건, 각자가 제 몫을 해낼 때 이뤄지는 거다.”
“…….”
그리고 창천은 나의 잔소리 겸 충고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평소라면 듣기 싫다고 고개를 훽 돌려버리거나 대열을 이탈했을 텐데. 한 번 대대적으로 길을 잃더니 또 길을 잃기는 싫은가 보지?
아니면, 이번에 길을 잃은 게 녀석에게도 뭔가 큰 교훈이 된 건가?
……쩝, 실수를 하고 스스로 교훈을 얻은 녀석에게 더 이상 말을 얹기도 그렇군.
“그렇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균열이 생길 때, 그때가 검으로 해결을 해야 할 때지. 이번 일에 대한 사과는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너의 검으로 받겠어.”
내 말에 창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년 독불장군일 줄 알았는데, 이 녀석도 성장이라는 걸 하는구나.
하긴, 나이가 있는데 내면도 좀 커야지. 신생이 벌써 저만큼 대견해졌는데 이 녀석은 아직도 멀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을 달리자 회수의 객잔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마을에 갑자기 대규모 표행이 들이닥치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나와 웅성대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놀란 눈으로 뛰어나온 객잔 주인도 있었다.
“아, 아니?! 공자님, 이게 다 뭡니까?”
“내가 말했죠? 객잔을 추가로 더 지어야 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렇긴 한데, 갑자기 이게 이렇게―.”
“창고는 다 됐어요? 짓는 속도로 봐선 완성했을 거 같은데.”
“예, 예! 바로 안내해드리겠습죠!”
객잔 주인은 부리나케 표행 앞으로 달려가 표마차를 창고 쪽으로 인도했다. 멀리서 봐도 잘 마무리된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슬슬 완성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시간이 촉박한 거치곤 잘 지었는걸?
“오셨습니까!”
창고에 도착하자 창고 건설의 주역(?)인 수적들이 오와 열을 갖추어 선 채 쩌렁쩌렁 목청을 높였다.
호오, 제대론데?
“금태양, 저자들은?”
“운송업체.”
“……제대로 된 놈들이 아닌 듯하다만.”
이상한 쪽으론 눈치가 빨라요.
“내가 손을 본 얼굴이 몇 있군.”
“그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한 일이었으니까 넘어가라. 녀석들에게 악의는 없었어.”
“녀석들은 사람에게 공격을 가했다. 악의가 없었으면 폭력도 용인되는 것인가?”
녀석답지 않게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데?
근데 그게 네가 할 소리냐?
“히익.”
“눈 마주치지 마. 눈 마주치지 마.”
수적들이 숙덕거리며 창천의 눈을 피하는 걸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잘 지내. 괜히 겁주지 말고.”
물론 수적들에게 적당히 겁을 주는 건 중요하겠다만, 지금 분위기로 봐선 창천이 겁주다간 몇몇 놈은 거품 물고 실신하겠는데.
“유독 어디 부러진 놈이 많다 싶더니.”
“그래도 겉보기엔 멀쩡하군.”
“처치를 하고 새 옷을 입혀놔서 그래.”
“그런 것치고도 안색도 좋다. 네놈의 의술이 대단하다지만 피골이 상접한 자를 저렇게까지 바꿀 수 있는 줄은 몰랐군. 아니, 눈에 독기가 사라진 거 같은데.”
설마, 의술로 사람의 성정까지 바꿀 수 있을 리가 없지.
이건 그냥 그 며칠간 잘 먹이고 잘 재워서 그렇다.
수적질 하는 놈들이 본바탕이 나쁜 놈들도 물론 있겠지만, 의외로 어쩌다 보니 삶이 그렇게 흘러간 경우들도 없지 않더라고.
삶이 그렇게 흘러간 이유 중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크게 작용하고 말이다.
……뭐, 대항할 수 없는 힘 앞에 얻어맞은 후라 더 잘 먹힌 것도 있겠지.
그렇긴 해도 진짜 표정들이 풀렸는걸. 몇몇 놈들은 아주 헤벌쭉하기까지―
잠깐만, 헤벌쭉해?
눈이 풀리다 못해 느물느물한 웃음을 짓는 수적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곳엔 하오문의 의생들이 있었다.
지금의 옷차림은 기녀일 때와 달리 말끔하기 짝이 없는데도, 원체 미색을 가다듬던 용모들이다 보니 눈에 띄긴 했다.
단정하고 말끔해야 더 눈에 들어오는 미모도 있는 법이고 말이지.
아름다운 것에 눈이 가는 거야 당연한 일이라지만, 저렇게 느물거리는 눈빛까지 허용하긴 좀 그런데.
……지금 기강을 잡기엔 분위기가 좀 애매하군. 상황을 봐서 조치해야겠어.
“뭐해? 빨리 물건 나르자. 배에 나를 수 있을 만큼 채우고, 나머지는 창고에!”
“일하자, 이놈들아!”
“빌어먹지 말고, 벌어먹자!”
청수채 수적들과 거지 표사들이 합을 맞추어 일하기 시작했다. 하오문의 문도들이 장부를 넘기며 물건을 점검했고 창고에는 물건이 차곡차곡 쌓였다. 나루터에 정박한 청수채의 배에도 물건이 옮겨졌다.
일부는 이곳에 남아 거점을 구축할 것이고, 나머지는 배를 타고 떠날 것이다.
나는 선적 과정을 지켜보다가 이내 하오문 의생들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청수채의 깃발과, 하오문의 깃발, 그리고 개방의 깃발이 힘 있게 펄럭였다.
“창고에는 아직 짐을 채우는 중이긴 한데, 배에는 전부 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출발하자. 그쪽은 그쪽대로 일 처리를 하겠지.”
“예! 출발하랍신다!”
부채주가 목청을 높였다. 그 말에 수적들이 손발을 맞춰 척척 움직였다. 밧줄을 풀고 돛을 올리고 키를 돌렸다.
바람을 받은 돛이 팽팽하게 부풀고, 배에 속도가 붙었다.
“가자, 태양의원으로.”
* * *
여행길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여행자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그것은 이번에 처음으로 항주를 떠난 개방의 거지표사들과 하오문도들뿐 아니라, 항상 배를 타고 강을 오고가는 것이 업이요 생활인 수적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이고, 또한 집을 나온 이후 유독 여기저기 돌아다닐 일이 많은 금태양의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사실 겉보기만 보면 큰일이 벌어질 이유는 없어 보였다.
당장 이 회수에는 더 이상 큰일을 벌 일 만한 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청룡채와 그들을 따르던 수채 몇 개가 며칠 밤 사이에 괴멸한 이후 회수 일대에는 기이한 소문이 퍼졌으니까.
청수채를 건드리면 귀신의 손에 죽는다.
그 난리 통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몇몇 수적들의 입을 통해 번진 소문은 곧 회수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녹림채와 수로맹은, 각기 하나의 연합이지만 동시에 서로를 집어삼키거나 해하는 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기이한 특징이 있다.
때문에 몇몇 수채들은 청수채가 채주를 잃고 분열되었다는 얘기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는데, 뒤이어 퍼진 이 소문 때문에 그러한 욕심을 반쯤 접어두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한 상태였다.
“다른 무엇보다, 귀신은 무서우니까 말이지.”
“아무렴. 수적들에게 물귀신보다 무서운 건 없다고. 갑자기 물속에서 솟구쳐서 머리채를 잡고 물속에 끌고 들어간다니까? 귀신의 소행이다 소문이 나면 그럴 만해.”
그 소문에 대해 들은 청수채 수적들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을 비호하는(?) 귀신이 진짜 귀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귀신이 차라리 낫지. 그건 물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잖아.”
“노(老) 선생은 진짜, 으으. 그 노 선생이 너희 하오문 문주라며?”
수적들은 항주로 쳐들어갔을 때 날뛰던 은 파파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러자 하오문 의생들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확히는 우리 태상문주님이에요!”
“옛날에 문주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지금 임시로 하오문을 맡아주고 계시지. 귀신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대단한 분도 맞고.”
“은영이가 말해봐. 은영이 얘가 태상문주님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문주 자리를 내려놓으실 때 자기도 데려가라고 바짓자락 잡고 매달렸던 거 있지.”
“언니,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글공부하기 싫어서 하는 소리에 말리지 말고요. 당신들도, 얘기를 듣는 건 좋지만 손이 놀고 있어요. 금 의원님이 오늘까지 천자문을 떼어야 한다고 말한 거 잊지 않았죠?”
은영이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수적들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수적들은 눈치를 보다가 이내 다시 붓을 잡고 한 획씩 글자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글을 배우는 수적들은 금태양이 직접 선별한, 의술을 배울 만한 자질이 있는 수적들이었다.
허나 몸으로 가르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
어차피 태양의원까지 가는 데 시간도 있으니 하오문 의생들에게 수적들을 가르치게 한 것이다.
처음에는 느물거리는 시선을 보내는 수적도 있었으나 이곳에 있는 이들 또한 복마전이나 다름없는 항주에서 하오문도로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에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
처음 몇 번은 기 싸움이 있었으나, 금태양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경계를 명확히 했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이후로는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은영은 그 상황이 무척 불편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휴, 곤란할 뻔했어.’
은영, 아니, 하오문의 기녀 은영으로 분한 제갈다영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짧은 시간 내에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 위해 많은 정보를 캐냈지만 그처럼 사적인 얘기까지 알기에는 시간이 촉박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