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아직 정반합의 진짜 회주가 된 건 아니다.
원래 한 조직의 장을 떠맡으려면 회의를 통해서 승계의 과정을 거치는 등 번잡한 절차들이 달라붙는 법.
정반합 회의에 참석한 건 아니니 공식 회주는 아니다.
하지만 회주 자리를 인계받기로 했다면 도개걸은 이를 무시할 수 없다.
“끄응, 별거 아닌 거 갖고 늘어지기는.”
“별거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하고요.”
“진짜 별거 아니라니깐? 그냥 살아보니, 별것도 아닌 놈들이 숫자가 많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더라 이 말이다.”
“백만 거지보다 한 명의 고수가 더 쓸모가 있다는 건가요?”
“적어도 내가 겪은 일에는 그랬다.”
도개걸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백만 거지, 말은 좋지. 하지만 그 백만 명이 필요할 때 그 자리에 있기가 쉬운 줄 아냐? 하물며 거지 놈들인데.”
“기동력이나 보급을 생각한다면 그 말도 맞긴 한데…… 그건 싸움을 전제로 둔 거 아닌가요?”
생각해 보면 도개걸은 여태 그래왔다.
어린 신생의 자질을 알아보고 고수로 키워왔던 것도 그렇다.
하지만 섬서사변은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비밀스러운 악의를 간직한 자들의 음모, 거기에 휘말린 대문파, 그로 인한 피해.
그건 전생으로 치자면 대기업 공장의 화학물질 사고나 원전 폭발 등과 비슷하지 않나?
거기서 싸움이 왜 나오지?
“……어차피 네놈이 회주를 맡으면 모든 걸 알게 될 테니 미리 말해 주마. 그때, 이변을 느낀 자들이 있었다. 화산 놈들은 물론이고, 놈들의 속가문파나 우리 개방의 거지들 같은 무인들이지. 기의 흐름이 돌변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이놈의 과거는 파도파도 끝이 없군.
반대로 말하자면, 그 어떤 과거도, 아무리 꽁꽁 숨겨도, 결국 나중에 가서는 다 들통이 나게 되어 있다는 뜻일까.
“그때 진실을 알리거나 섬서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이들을 제압한 놈들이 있었다.”
“혈교의 무인들입니까?”
“그게 아니라 문제지.”
헐교의 무인이 아니라고?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혈교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 엄청나게 강한 놈이 있었지.”
“개방의 전대 방주도 설마.”
“그래. 내 퇴로를 열어주느라 그놈에게 당했다. 사형의 희생이 없었다면 나도 아마 그 자리에서…….”
늙은 거지의 얼굴에는 그때 느꼈던 처절한 무력감과 압도적인 패배감이 짙게 드리웠다. 도개걸 또한 결코 접어줄 수 있는 실력이 아니다. 그런 도개걸의 사형이었던 전대 방주의 실력도 그렇게 뒤처지는 수준이 아니었을 터.
전대 방주도 손쉽게 무력화시킬 정도의 고수가 섬서사변에 일조했다니…….
홍령이 아기인 나를 업고 아버지 금왕을 찾아갔을 때, 그때도 놈의 추적을 뿌리치느라 몸이 만신창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어떤 놈입니까? 용모파기는 있고요?”
“없다.”
“예? 얼굴을 못 보셨어요?”
“그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도개걸이 내 얼굴을 가리켰다.
“마치 네놈처럼. 똑같은 가면은 아니지만.”
가면이라…….
사람이 가면을 쓴다는 건 두 가지다. 하나, 자신의 얼굴이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힘든 상태인 것. 둘,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한 것.
그자는 어떤 이유로 가면을 쓴 거지?
“얼굴 외에도 특징은 많잖아요. 무기라든가, 싸웠다면 그 무공의 특징 같은 것도 알 수 있지 않아요?”
“무기는 검이다.”
“검도 종류가 다양하잖아요? 개방 방주씩이나 되는 분이 왜 그렇게 서툰 척하세요?”
“놈은 모든 검을 썼어. 모든 검법을 썼다. 세검을 쓰고 패검을 쓰고 쾌검과 환검을 자유자재로 다뤘어. 그뿐이 아니다. 드물지만 도(刀)를 다루기도 했고, 암기도, 독도 썼지. 권각에 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게 가능하다고요?”
“내가 그놈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건, 강하다는 것, 그뿐이다.”
도개걸이 몸을 잘게 떨었다.
그건 몸에 각인된 공포였다.
죽음 그 이상의…….
“놈들의 꼬리를 쫓다 보면 언젠간 그놈을 마주하게 될 거다. 나는 신생을 그 대적마로 키우려 했지.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군. 놈이 어째서 이십여 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놈이 모습을 드러내면 모든 게 아무 쓸모 없어질 거다.”
그가 신생에게 자행한 각종 학대들을 용인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가 그래야 했던 이유를 십분 납득했다.
그러한 공포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타인을 위하며 살기엔, 그가 너무 약했던 거겠지.
“……이런 게 정보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네 녀석과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 났다. 일단 그 자는, 여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얼굴 외에 드러난 피부로 봤을 때, 그 당시 나이가 대략 서른에서 마흔 사이일 거다.”
“하지만 그 정도 고수라면 반로환동을 했을 수도 있으니 확실하진 않겠군요.”
“그러니까 정보가 될지 모르겠다고 한 거다. 그나마도 한참 동안 잊고 있었다. ‘녀석’에 대한 얘기는 정말 그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전생의 유명 마법사 소설에 나왔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자’ 같군.
지금은 그 상대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만큼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이 적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하나도 모르는 것보다는 뭐라도 아는 것이 낫겠죠.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다. 어차피 회주가 되면 알게 될 얘기니까. 놈 외에도 놈을 따르는 가면 무사들이 있었고, 그놈들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그놈은 정말 독보적이었어. 무신(武神)이 있다면 바로 그놈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와 도개걸이 과거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사이 거지 표사들이 표마차에 물건을 싣고 말에 올랐다. 대열을 갖춘 모습이, 아직은 거지들의 껄렁한 모습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큼 태가 났다.
“도련님, 이 아이들도 준비를 마쳤습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잠시 어디로 갔던 은 파파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과거 하오문의 기녀였던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정한 옷에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기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일전에 눈여겨 봤던, 초희라는 이름의 어린 소녀도 함께 서 있었다.
그 뒤로 하오문의 기녀들도 따라와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꽤나 복잡했다. 어떤 이들은 뿌듯하고 대견해하는 얼굴이었고, 또 몇몇은 얼마 못 갈 거라며 혀를 찼다. 또 일부는 혀를 찼지만 누가 봐도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얼굴로 단정한 모습으로 서 있는 여인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의술 교육을 책임질 금태양입니다.”
이들은 의생이 되기로 한 하오문의 기녀들이다. 지난번 은 파파를 통해 뽑은 1차 인원 중, 임시 구호소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신생이 직접 평가해 뽑은, 말하자면 선발대랄까?
가장 빠른 성장을 보여줄 수 있는 이들을 나이 대 별로 뽑은 거고 나머지는 체계가 좀 잡히면 천천히 받아들일 예정이다.
나이 대 별로 뽑다 보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수련생들도 제법 많아서, 말을 놓는 대신 존칭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다들 신생은 잘 아시겠죠? 배분으로 치자면 여러분의 사형이 될 겁니다.”
내 옆에 선 신생이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무림 문파에서처럼 사형의 말이 법이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엣― 신생이 작게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체계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원의 체계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체계를 따르지 않으면 사람이 죽습니다. 짧은 임시 구호소 생활이었지만 이 말 뜻을 이해하기 부족하진 않을 겁니다.”
몇몇 의생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특히 초희는 고개가 떨어져 나가라 그 작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때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체계를 무시해야 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번에도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형제 간의 끈끈한 유대감은 중요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사제가 할 말을 못 하는 위계는 필요 없습니다. 할 말은 하세요. 해야 할 행동은 하세요. 신생이나, 여러분을 가르치는 다른 의원들이나, 혹은 제게도, 여러분이 살면서 알게 된 사실과 배운 사실, 그것들과 다른 행동과 지시를 한다면 지적하세요. 여러분이 틀렸다면 그 이유를 가르쳐 드릴 것이고, 여러분이 옳다면 여러분은 또 한 생명, 아니, 수많은 생명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부러 다른 이들 앞에서까지 얘기하는 이유가 있다.
작게 보면 의술에 관한 얘기지만 크게 보면, 태양의원과 하오문, 개방이 합작하는 사업에도 통용이 되는 얘기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그 소요를 겪고 다시 새롭게 나아가는 항주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기도 하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우리만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힘을 갖고 또다시 도시의 사람들을 핍박하려는 게 아니라고.
결국 두루두루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이런 속마음을 담은 말이 어디까지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출발해볼까?”
내 말에 표사들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나도 속도를 맞춰 가기 위해 말에 올라탔다. 신생은, 보통이라면 나와 같이 말을 탈 텐데, 이번에는 하오문 의생들이 있는 마차의 고삐를 잡겠다며 뒤로 쪼르르 달려갔다. 갑자기 사제가 십수 명 생기자 책임감이 생긴 모양인지.
사전에 말해둔 바도 있고 하니, 텃세를 심하게 부리진 않겠지.
그나저나……
“넌 또 왜 여기 있냐?”
내 옆에 바짝 따라붙은 말에는 의외의 인물이 타 있었다. 의외라고 하기도 좀 그런가?
“일이다.”
이렇게 말 짧은 놈이 또 어디 있겠어. 창천이다.
신생에게 창천 녀석 좀 챙기라고 말은 해뒀는데 구호소 일로 바빴을 거고, 제갈다영이 어련히 굶기진 않겠지 싶어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잠깐만, 굶지는 않았겠지만 녀석이 먹고 쓰는 게 전부 녀석 빚으로 들어갔을 텐데.
“……그녀에게 들었다. 빚을 줄여줬다지.”
“생각 없이 거래를 한 건 자각하고 있네?”
“나중에야 알았다. 빚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서 곤란하던 차다.”
“알면 고맙다고 인사 정도는 하든가. 게다가 그. 녀.?”
“문제가 있나?”
이 녀석 봐라. 진짜 뭐가 문제인지 몰라서 그러나?
“에휴, 됐다.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프지. 네 녀석에게 감사 인사 같은 거 받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나저나, 일이라고?”
창천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건 내 조카 금리밖에 없―, 아니지, 빚꾸러기인 창천은 빚을 갚기 위해서 빚쟁이인 제갈다영이 시키는 일을 한다고 했다.
“이번 일을 마치는 걸로 모든 빚을 변제해 준다고 했다.”
“흐음, 제갈 소저가?”
“그래.”
이상하네.
창천을 놓아주기로 한 거야, 더 재밌는 장난감이 나타났으니 그럴 수 있다.
근데 왜 내 앞에는 안 나타나지?
김진으로 떡밥을 던져놨으니 내 앞에 나타나 뭐라도 캐물어야 정상인데.
이렇게 창천만 그냥 보내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