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솔직히 씨앗이 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꽃이 피어서 자연스럽게 진다면 그 결과물이 생기지 않겠는가?
태양의원으로 돌아가 이 씨앗을 심을 거다.
마침 약재를 심기 위해 준비해놓은 밭도 있다. 약재 씨앗을 구하지 못해 이번 해는 아주 밭을 놀려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전화위복이 되다니.
씨앗을 심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른다.
거기까지는 신선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100퍼센트 기능을 하는 삼생화가 필 거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그 효능의 10퍼센트만이라도 발휘할 수 있다면.
셋 중에 하나, 가장 붉은 피살이꽃이라도 피워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곳 중원 무림에서 의원을 하는 데 가장 난제였던 부분, 수혈이 해결된다.
실제로 사용이 가능하려면 여러모로 연구를 거쳐야 할 거고, 그 이전에 심었을 때 잘 자랄지부터가 걱정이긴 하지만.
그 외에 체질에 관해서도 그렇고, 수술 방법이나 약재, 도구에 대해서도 그렇고. 연구할 부분은 차고 넘치도록 많다.
“그렇군요. 서둘러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빨리 기반만 다져두고 돌아가야지. 너무 오래 떠나 있었어.”
원래는 소림의 일만 마치고 돌아가려던 게 항주까지 와버렸다.
신생을 통해 받은 리의 서찰을 보니 내가 필요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던데.
이제는 진짜 돌아가야 할 때다.
“홀홀, 그러면 서둘러 마무리를 하지요. 쇤네는 먼저 항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보자고.”
은 파파를 먼저 보내고, 나는 객잔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다친 수적들이 쉴 시간을 주고, 의생 후보로 골라둔 수적들을 가르치는 거 외에도, 시간이 드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주신다니 하긴 하겠는데, 진짜 이게 쓸모가 있을는지…….”
나와 수적들이 머물고 있는 객잔의 주인은 객잔 옆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공사를 보며 말을 흐렸다.
도착한 당일, 나는 객잔 주인에게 상당한 거금을 쥐여 주고 이곳에 창고를 지어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객잔의 절반을 뚝 떼어 일 년치 숙박비를 결제했다.
한두 번 와보니까 음식 질도 좋고 서비스도 괜찮더라고. 좀 오래되긴 했지만 규모도 크고.
“걱정 마세요. 잘되면 창고가 아니라 객잔 건물을 더 지어야 할 거예요.”
객잔 주인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돈을 받았으니 할 건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앞으로 치료용 마약과 약재 수송의 거점이 될 거다.
원래도 회수의 수적들을 상대로 근근이 장사를 했으니, 창고의 물건을 지키기 위해 수적과 거지, 하오문 사람들이 상주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대처하겠지.
“저는 항주에 다녀오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세요.”
“예! 다녀오십셔!”
“장인분들 말 잘 따르시고요. 오래 쓰려면 처음부터 튼튼하게 설계대로 잘 지어야 합니다. 다른 걸 보관하는 것도 아니고, 습기에 취약한 약재도 많으니까요.”
“물론입니다!”
“잘 지어놓겠습니다!”
뚝딱뚝딱 창고를 짓고 있던 수적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한 녀석들은 아직 일을 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처음 장염으로 열외되었던 놈들, 그리고 부상 정도가 약한 녀석들은 전부 창고 짓기에 투입했다. 이미 며칠이나 놀았는데, 내가 돌아올 때까지 더 놀면 뭐 해?
은 파파도 떠난 후라 내 말을 안 들을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세 번에 걸쳐 공들여 기를 꺾어놓은 데다 참모를 제압할 때 보여주었던 점혈도 꽤 인상적이었는지 누구 하나 반항하거나 개기는 놈은 없었다.
이 정도면 당장 눈앞에 힘 있는 사람이 없어도 행패를 부리거나 교활한 생각은 안 할 거 같군.
나는 어느 정도 안심한 후 다시 항주로 돌아왔다.
항주에 입성해서는 항구, 그러니까 하오문이 원래 마약을 보관하던 창고로 직행했다.
나보다 먼저 항주로 돌아왔던 은 파파가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본문이 보유하고 있던 마약 중 이물질이 섞인 하품, 중품은 제외하고, 치료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등품만 따로 보관, 선별해두었습니다. 처음엔 이 정도 물량을 실어가시면 될 겝니다.”
상등품만 따로 선별해두었는데도 그 양이 상당했다. 이게 막 들어온 물량이 아니라 어느 정도 소비된 후의 물량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마약이 시중에 돌아다녔던 건지.
“이물질이 섞였다는 중품, 하품은?”
“말씀하신 대로 따로 보관해두었습니다.”
“그래. 그것도 다른 약과 잘 섞으면 상비용 진통제가 될 수 있으니까. 제약방에 말해서 빨리 제조법을 만들어내라고 할게.”
이곳 항주 일대는 과거 하오문의 사업정책으로 인해 의원이 씨가 말랐다.
그런 곳에서 한 순간에 마약 유통을 중단했으니, 단순히 중독자가 아니라도 병에 고통받는 데 구제할 방법이 없는 사람도 있을 거다. 태양의원이 곧 자리를 잡겠지만 그것도 시일이 필요한 일이니까.
제약방에서 저품질 마약으로 진통제를 싸게 만들 수 있다면, 항주 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 판매를 진행할 수도 있겠지.
은 파파가 이미 한 번 검수한 물건이지만 내가 한 번 더 물건을 확인했고, 내 검수가 끝날 즈음 이 일에 숟가락을 얹은 또 다른 이들이 도착했다.
“금가야, 아직 안 끝났느냐?”
“다 됐습니다.”
창고 밖에는 도개걸을 위시한 개방의 거지들, 아니, 이제 물건을 운송할 표사들로 분한 거지들이 오와 열을……
좀 못 맞추긴 하는데…….
“이놈, 거지들아. 이제 이마에 띠도 둘렀는데 아직도 거지처럼 구부정하게 서 있을게냐?”
“그러는 방주야말로 우리를 방금 거지라고 불렀는뎁쇼?”
“내가 그랬냐?”
도개걸과 한 거지, 아니 이제 표사인 자가 농을 주고받았다. 보아하니 저자가 표사들 중 으뜸인가 보군.
“생각보다 숫자가 많은데요.”
“그렇게 됐다. 자원자가 많았어. 이것도 그 쭉정이들 중에 고르고 고른 거다.”
도개걸이 제법 자신 있게 말한 만큼 표사들의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대부분은 쟁자수겠지만.
“이놈은 원래 항주에서 표사질을 해먹던 놈이다. 표국 국주가 약에 빠져 표국 재물을 다 말아먹은 뒤로 항구에서 날품팔이를 하다가 거지가 된 놈이지. 이놈이 대장노릇을 할 거다.”
아까 도개걸과 농을 주고받던 그 표사였다. 그가 내게 인사를 꾸벅 하고, 이어 뒤에 선 몇 명이 또 인사를 했다.
“표사질을 해본 놈도 열 명이 넘고, 쟁자수 짓도 해본 놈들이 꽤 된다. 딱히 과거를 묻는 편이 아니라 이런 놈들이 많다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지. 하여간 사연 없는 거지가 없다니까.”
“그건 사부님이 문파에 신경을 안 쓰셔서 그런 거고요!”
표사들 틈에서 다람쥐 같은 소년이 쪼르르 달려와 도개걸에게 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내게 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승님! 오셨어요!”
“그래, 잘 있었지? 별 일 없었고?”
“네, 그럼요!”
“누가 보면 몇 년은 떨어져 있었는 줄 알겠다. 눈꼴셔 아주.”
“이제 위중한 환자는 거의 없고요, 대부분 잘 먹고 잘 쉬면 나을 거예요. 스승님이 지시하셨던 대로 진료기록도 만들어서 챙겨줬고요. 태양의원 분원을 세웠을 때 오는 의원이 보면 이해하기 쉽겠죠?”
신생은 이제 도개걸이 핀잔을 주거나 말거나 제 할 말을 했다.
“여벌도 만들어 뒀지?”
“물론이죠! 혹시 몰라서 두 벌을 만들어서 하나는 하오문에, 하나는 개방에 맡겼어요!”
거기에 일처리도 꼼꼼하기까지.
훌륭한 제자 안 대견해하는 법 같은 거 없나? 있어도 난 그런 거 몰라.
“잘했다.”
“헤헤, 제가 누구 제잔데요!”
“꼴깝 그만 떨고, 이제 시작하면 되냐?”
“네네, 시작하세요.”
내 말에 도개걸이 신호를 주었고, 과거 표사 경험이 있다던 거지, 아니 이제는 표사지. 계속 헷갈리네.
아무튼 과거 표사 경험이 있는 표사가 크게 목청을 틔웠다.
“큼큼, 좋아. 시작한다! 빌어먹지 말고!”
뭐지? 구호인가?
“벌어먹자!!!”
표사의 선창에 나머지 표사와 쟁자수들이 쩌렁쩌렁 외쳤다.
“짐 싣자, 거지들아!”
그러니까, 거지인지 표사인지 정체성을 좀 확실히 해주면 안 될까?
저들부터가 표사라고 했다가 거지라고 했다가 하니까 나도 헷갈리잖아.
어쨌든 일은 잘했다.
나야 표국이 돌아가는 사업적인 방법론은 알아도 실무에서 어떻게 짐을 실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데, 대충 구경만 해봐도 과거 표사였다던 표사들이 일머리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거지로 오래 굴렀을 텐데도 기도가 괜찮은 것이, 무공 수준도 기대해볼 법했다.
이거, 잘하면 금왕표국을 위협하는 신흥표국이 될 수도 있겠는데?
“어때, 쓸 만할 거 같냐?”
“쓸 만하다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요. 이런 인재들을 다 방출하면 개방은 어쩝니까?”
“뭘 어쩌긴 어째. 이참에 군살 좀 빼는 거지.”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그렇게 개방의 세가 줄어들면 오히려 불리한 거 아닙니까? 거기에 다른 일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규모를 키워야 할 거 같은데.”
다른 일이라는 것은 섬서사변의 복수다. 과거 신생을 복수의 칼로 키웠고 지금도 그 마음이 가시지 않은 상태일 텐데. 개방의 규모가 줄어서 좋을 건 없지 않나?
“저야 제가 할 일이랑 입장이 맞고, 북촌에서 객잔을 연 객잔주인도 과거 개방의 거지였다가 개방의 조력으로 객잔을 열었다는 얘길 듣고 추진한 거긴 한데. 솔직히 좀 이해가 안 가네요.”
“그거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금가야.”
“가르침을 주시지요. 왜 거지를 줄이시는 겁니까?”
“가르침을 달라는 놈 태도하고는. 네놈도 생각을 해봐라. 돈 많은 놈들에게 후원을 받는 소림이나 무당 놈들도 제 식구 입에 밥 넣어주기 바쁜데, 그럼 우리는 어떨 거 같으냐?”
“개방은 거지들이 각자 구걸을 하잖아요?”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게냐? 이 항주 땅 절반이 거지고, 절반이 약쟁이인데. 구걸밥을 주는 곳이 어디 있다고?”
아하, 그런 얘기였군.
“거지가 득세해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 밥 줄 곳만 줄어드는 게지. 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거지만 득시글한 곳에 정보가 있으면 뭐가 있겠냐. 여기 있는 거지들을 다른 동네 보낼 수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그러게요. 여기 표사나 쟁자수였던 사람들은 다른 동네 가서도 제법 일을 잘 할 거 같은데. 왜 거지가 됐을까요?”
“네놈처럼 역마살 달고 사는 놈들은 이해 못 할 게다. 뜬금없이 연고도 없는 딴 동네 가서 밥벌이하는 건 뭐 쉬울 줄 아느냐?”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그러네.
전생처럼 교통과 인터넷이 발달한 곳에서도, 서울 태생들은 지방 발령을 아예 권고사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는데.
여기서 갑자기 딴 동네 가 먹고 살려면 아득하긴 하겠군.
“그렇게 생각하니, 북촌에 터를 잡은 거지들이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개방의 일로 온 거라지만, 정말 연고 없는 동네에서 구걸을 하는 거잖아요.”
“흥, 별거 아닌 걸로 자꾸 추켜세울 필요 없다. 안 그래도 네놈 계획은 얌전히 따를 거니까.”
“하다보면 거지는 줄어들 텐데, 그러면 앞으로 일은 어떻게 도모하시게요?”
“그걸 내가 네놈에게 말을 해야 하느냐?”
“정확히는 제가 알아야겠죠? 저는 회주니까요. 같은 목표를 갖고 있는데 앞으로의 계획을 공유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