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249화 (249/350)

249화

의학원, 그러니까 의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울 계획은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다.

“현 무림에서 의원을 키워내는 방식은 문제가 많아.”

여러 의원들을 만났다.

대대로 가업인 의원을 이어받은 사람. 처음부터 문파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 무인이지만 자파에서 전수되는 의술도 익힌 사람. 제대로 된 의술이 아니라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사람 등등. “도제식으로 의술을 익힌 사람은 자기가 전수받은 게 전부인 줄 알아. 무당이나 소림, 아미도 별로 사정이 다를 건 없어. 문파의 의술을 전수받지만 그게 전부니까.”

그런 점에서 무당의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는 그나마 의미가 있다. 무당은 다른 문파들과 달리, 세를 넓히기 위해 지역에서 대대로 의원을 해온 이들도 흡수해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

……그게 정상적으로 기능하기만 했어도 참 좋았겠지만.

“그럴 거면 애초에 의맹이라는 연합으로 묶여 있는 이유를 모르겠어. 서로 배울 건 배우고 교류해야 하는데 그냥 자기들 이권을 지키기 위해 합의하는 담합에 불과해. 그러니까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는 거야. 마비산은 위험하다, 그러니까 마비산을 쓰는 수술도 위험하다. 아무도 못 하게 만들어버리자 같은 식으로.”

“……섬서사변이 일어났던 초기. 무림은 화산이 사용하던 마비산에 괴이한 약을 섞어 그 일을 벌였다 굳게 믿었지요. 실제로 혈교가 손을 댄 것도 맞습니다만, 섬서 일대에선 집집마다 그 약을 상비해놓고 쓰는 게 일상적이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혈교의 진법에 취약한 몸이 되어갔지요. 그걸 생각하면 의맹의 결단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닐 겝니다.”

은 파파가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수술을 금한 것, 점혈을 통해서만 수술이 가능하도록 자격을 제한한 건 무당이 제 이권을 잡기 위해 추진한 것이 맞지요. 검에서도, 의술에서도 구파일방 중 수좌를 다투던 화산입니다. 지금은 무당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요.”

“의맹의 맹주도 무당이고.”

“무림맹은 오대세가가 있어 무당이 쉽게 수좌를 차지하지 못합니다만, 아무래도 그들은 보편 의술보다는 자기들 핏줄에 더 관심이 있는지라. 의맹에서는 무당의 입김이 제일 강하지요.”

“아직도 숨기는 게 많지, 무당은.”

한동안 무당과 엮일 일이 없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창천의 체질과 이를 이용한 실험, 그리고 이를 실패하자 그 흔적 자체를 제거해버리려고 했던 태청장원의 참사는 물론이요, 섬서사변과 관련해서도 무당의 행보는 수상쩍다. 무당신의와 관련된 일도 그렇다. 그 일의 주역은 혈교지만 무당은 분명 그 뒤를 보조한 흔적이 있다. 그리고 화산의 멸문에 따른 이득을 모조리 흡수했다…….

“의맹 전체회의에 가면 그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까?”

“내년이지요. 해가 가기까지 머지않았으니 곧 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허나 아무런 힘도 없이 그들을 들쑤시는 건 쉽지 않을겝니다.”

“정회원 자리에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러면 뭐라도 할 수 있겠지.”

“무당이 순순히 동의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의맹의 정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정회원 셋의 추천이 필요하다.

허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추천까진 해줄 수도 있지. 본회의에 안건이 올라간 후가 관건이잖아.”

예전에 알아봤을 땐, 세 명의 추천만 있으면 정회원이 될 수 있는 줄 알았다. 근데 그간 상세히 알아보니, 추천을 받으면 그제야 투표를 통해서 찬반을 나누더만.

“생각해보니 그 정보를 반만 알려준 것도 은 파파지? 진짜 너무한데?”

“어이쿠야, 쇤네가 그랬습니까? 나이를 먹어서 영 기억이 안 나는구만요.”

내가 세 살 때 몇 번 토했는지도 기억할 거면서. 이 괘씸한 할망구 같으니라구.

“추천은 소림과 아미, 혹은 개방에서 받으면 무당이 추천하지 않아도 충분하겠군요. 본회의 투표가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만. 그 때문에 의학원을 염두에 두시는 거겠지요? 도련님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으려면 괜찮은 방법일 듯 합니다.”

정답이다. 꼭 이렇게 좀 괘씸하다 싶으면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니까.

“기존 교육 체계와는 달리 간다 하면, 출신 성분을 크게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받으실 모양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신 성분을 구애받지 않는다는 건 경제수준이나 신분을 넘어선 얘기다.

경제수준? 그건 충분한 자질이 있다면 지원해줄 수 있다.

신분? 주인이 있는 노비가 의학당에 오고 싶다고 하면 다소 분란이 생길 수 있겠지만, 자질이 있다면 얼마든지 해결해줄 용의가 있다.

그들에겐 훗날 의학당을 졸업한 후 태양의원에서 의무적으로 근로하는 조건을 제시하면 된다.

표마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치료하는 이동의원처럼, 보통의 근무보다 일이 힘들어서 기피되는 자리들에 사람을 충원할 때 유용하겠지.

그러나 내가 차릴 의학당은 그 이상의 포용력이 필요하다.

“소림의도 무당의도 상관없어. 가업을 이어 의술을 배웠다고 해도 괜찮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을 거고, 점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공에 소질이 있는지 같은 것도 보지 않을 거야.”

“정말 의술에 대한 자질만 보시겠다는 거군요.”

“자질만 보겠지만,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만 보는 건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의술에 대한 자질에는 품성도 들어간다.

착하고 선한 사람만 받겠다는 게 아니다.

기본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의술을 익혀 의원이 되려고 하는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해서여도 상관없어. 의원으로서의 기본만 지킨다면, 돈 좀 벌면 어때?”

“후후, 그게 더 어려운 법이지요. 사람이라면 응당 쉽게, 편하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어 하니 말입니다.”

나도 안다.

전생의 나도 인간으로서 기본을 지키지 않았던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가르쳐야지. 가르치고, 자격을 따지고, 계속해서 감시해야지.”

“원래는 의맹이 해야 할 일이군요.”

“내 구상이 잘되면, 그래서 의학원이 충분히 배운 인재를 배출해낼 수 있다면 가능해지겠지.”

“도련님의 이상은 항상 먼 곳에 있구만요, 홀홀.”

“먼 곳에 있지만 항상 눈앞의 한 발짝부터 시작해야지.”

“허면 저 아해들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내가 말한 것은 의학원의 밝은 면이다.

의술의 정도, 무림으로 치자면 정파의 일에 가까운 일.

그러나 내 앞에 있는 건 수적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약간의 의술을 가르쳤고 앞으로도 그들을 지도할 예정이었다.

거기에 하오문도 있다.

과거에는 마약을 팔고 이를 위해 지저분한 짓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등 사파나 흑도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하오문이지만, 이제 내가 뒤에 있음으로서 정사지간 정도의 문파에 가까워질 거다.

그렇지만 정사지간이 괜히 정사지간이겠는가?

태양의원의 의학원에서 그들을 받겠다 말해도 당당히 들어와 의학원이 내세우는 기치를 따를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하나 더 할 거야.”

“의학원을 하나 더요?”

“태양의원에서 하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런 이들도 아플 때 치료받을 수는 있어야 하잖아.”

양지의 의학원과 음지의 의학원이 되려나.

후자는 솔직히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니다.

나, 그리고 홍령이 함께 구상했던 것은 양지의 의학원, 여태 얘기했던 것에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을 보면 홍령도 분명…….

나는 잠시 저 멀리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널브러져 있는 수적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준을 좀 완화한다는 것뿐이지 인간 말종에게 의술을 가르치겠다는 건 아냐. 그리고, 그런 곳에서만 할 수 있는 연구도 있으니까.”

“연구라. 교육을 하신다더니, 연구까지요?”

“교육을 하려면 연구가 기반이 되어야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의원들을 모아 가르치다 보면 자연 연구의 기반이 마련될 수밖에 없다. 서로 말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밝혀내야 할 거 아닌가.

그러다 보면 몰랐던 사실이 드러난다. 새로운 처방이 생긴다. 더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터부시되는 일을 해야 할 일도 생길 거다.

단적으로 말해서 해부 말이다.

나도 몇 번 남의 장례를 도와봐서 아는데, 중원에서 시신은 매우 신중하게 다뤄진다. 어떤 점에서는 전생보다 더한 거 같다. 전생에선 사고를 당하거나 죽음에 의문이 있을 경우 검시를 의뢰할 수 있다. 사건성이 있을 경우 경찰에서 검시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런 일은 매우 드물다. 병으로 사망했어도 그 원인을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 해부를 한다는 것은, 몸에 칼을 대는 수술만큼이나 금기로 여겨진다.

수술에 특별한 자격을 부여하고 극단적으로 금지한 데는, 의원들이 사람 몸 내부를 관찰할 경험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문화적 상황 탓도 있으니까.

전생이라면 모형이나 영상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여기서는 기껏해야 선험자들이 기억에 의존해 그려놓은 그림이 전부다.

그나마도 그 그림을 전부 경험자가 그린 게 아니다. 의원이 언제 책에 들어가는 그림 수백, 수천 장을 그리고 있겠나?

경험자가 그린 그림을 보고 경험이 없는 자가 따라 그린 인체 내부의 그림.

그게 얼마나 정확하겠냐고.

무당에서 수술의 자격을 딸 때 나도 그 책을 봤는데 진짜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니까 의원들이 온갖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수술의들 밑에서 빌빌 기면서 어떻게든 수술 참관을 하고 한 손이라도 거들려고 하는 거지.

“하기야, 학생들이 시신 배라도 한번 갈라 보려면 그걸 조달하는 집단도 하나쯤은 있어야겠구만요.”

역시 은 파파. 나는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내 말에 담긴 맥락을 한 번에 이해했다.

전생에도 그런 회사가 있다는 얘길 들었다. 그걸 어디서 봤더라?

맞다, 대학병원도 해부 연습을 할 시신이 부족해서 제3국에서 공급을 받는데, 그 시신들이 어디서 오는지를 추적한 다큐였다.

해부실습에 참가하는 의사나 인턴, 의대생들은 그 시신이 전부 기증을 받은 거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대부분은 그게 아니었고, 화장장에 들어간 줄 알았던 시신들이 냉동 보관되다가 해부용 시신을 다루는 업체로 흘러들어 간다는 결말이었지.

나도 당연히 기증을 통해 해부실습이 이뤄진다고 알고 있어서 꽤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아주 비도덕적인 경로는 말고. 아무튼, 그 부분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봐야지. 담당할 사람도 없고.”

“아무렴요. 거기까지 쇤네에게 맡기실 생각은 마시고요. 정말 무립니다.”

은 파파가 질색을 하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사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정말 무린가 보군.

“그쪽은 맡을 사람을 찾아야 진행을 할 수 있을 거야. 학생들이 꽤나 거칠 테니 무공도 적당히 받쳐줘야 할 거고, 그러면서 의술 또한 학생들이 존경할 만큼은 되어야 할 거고…….”

말하다 보니 거의 유니콘을 찾고 있는 기분인데. 김진의 이미지를 그쪽으로 튼다고 해도 이름을 알리는 데 시간이 필요할뿐더러, 당장 나는 차후 소림의 대표로 화산지회에 나가야 한단 말이지. 게다가 신분이 두 개일 뿐, 몸은 한 개라고.

“어쨌든, 당장은 태양의원 의학당에서도 연구를 할 거야. 지금 우리 의원들 중에도 치료보단 연구에 자질이 있는 사람이 꽤 되니까. 당장 투입해서 성과를 내야 하는 분야가 있어.”

내 품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주머니 하나가 있다.

다 쓰고 남은 삼생화의 가지, 그것을 땅에 심었을 때 꽃이 피고 지어 맺힌 씨앗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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