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이런 문제는 단일 노선이 아니라 투 트랙으로 정보를 받는 게 더 유리할 테니까.
제갈다영에게 내 정체를 밝히지 않고 다른 정보를 먼저 오픈하길 잘했군.
“잠깐만요, 그렇다면 그 얘길 금 의원님한테 들었다는 거죠?”
“그래. 나는 검이나 좀 쓰는 사람이라고. 체질에 대해서는 무공과 관련된 거 이상은 몰라. 금태양이 내 체질에 대해 얘기하면서 해준 얘기니까 알아도 그쪽이 더 잘 알걸.”
“서로 그 정도 얘기까지 하는 사이라고요?”
“친구니까.”
아아, 친구란 말은 얼마나 편한가. 아무 데나 갖다 붙여도 그럴싸하잖아.
만약 누군가 금태양의 과거를 캐면서 친구 같은 건 사귈 시간이 없었다는 식으로 내 정체를 캐물으면, 편지로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고 하면 된다.
처음 알게 된 건, 그래, 금태양의 치료를 맡은 사람이 내 친척이거나 하는 식으로 둘러대면 되는 거고.
내가 금태양이기에 그 정도 변명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진양 누님처럼 나와 가까운 사람도 일 각 정도만 주면 ‘태양이에게 그 정도로 친한 편지 친구가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될걸?
“그랬군요. 하긴, 다들 끼리끼리 모이더라고요.”
의외로 제갈다영은 내 변명을 더 캐묻지 않고 납득했다. 하긴, 서로 깊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데 친구가 아니라는 의심을 하기도 어렵긴 하겠지.
근데 끼리끼리는 뭐야?
“그거 별로 칭찬은 아닌 거 같은데.”
“굳이 따지자면 칭찬이죠? 신기한 사람들끼리 친구라는 말이니까요. 왜, 욕이라도 하는 줄 아셨나요?”
욕까진 아니지만, 제갈세가 사람에게 신기한 사람들로 찍혀서 별로 좋을 건 없을 거 같긴 하다. 저들의 흥미가 식을 때까지 근처에서 얼쩡거릴 거라는 얘기니까. 지금까진 제갈다영이 크게 해를 입힌 적은 없지만…….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마무리 단계가 잘 되고 있나 보러 가야지.”
제갈다영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항주에서 있었던 소동은 거의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수적들은 개방의 텃세와 하오문의 반격에 밀려 항주성 밖으로 도망쳤다. 수적들이 제압했던 중독자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하오문도들에 의해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나는 그 방향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제갈다영도 궁금하다는 듯 내 뒤를 따랐고 나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어머. 여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폐허였잖아요?”
“그랬지.”
돌로 바닥을 깔고, 건물이 들어서 골목엔 볕이 들지 않고, 수시로 사람이 밟고 지나다녀 잔풀이 자랄 여지가 없는 도시에서 이런 수풀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항주 성의 한 구역을 차지하는 일대에는 풀과 나무가 봄날의 그것처럼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간간이 풀꽃이 피어 향기를 뿜었고 그 향기에 홀린 벌과 나비가 날았다. 웅덩이가 깊게 팬 곳에는 물이 고였는데, 어찌 알고 온 건지 개구리 몇 마리가 노래를 부르고 갓 태어난 송사리들이 유유히 헤엄을 쳤다.
“성 안이 아니라 어느 들판 같네요. 아니면 정원 같기도 하고요. 소녀가 기억하기론 이 일대는 오래된 전당포와 도박장들이 조금 남아 있는 낙후된 거리였는데요.”
그래. 이곳은 전포거리다.
하오문주가 마물이 되어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 땅의 생기를 한없이 끌어 써 다가가기만 해도 어지러운 기분이 들던 그 땅.
그곳에 내가 삼생화의 남은 가지들을 심었다.
그리고 며칠 만에 이 땅은 이만큼의 자연을 회복했다.
심산유곡처럼 자연의 기가 밀집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거주할 수는 있을 정도로 기가 안정됐다.
이보다 더 심각하다는 섬서에도 삼생화의 가지들을 심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꽃은 섬서의 아주 깊은 곳에서 발견했습디다. 모든 기가 사라진 그곳에서 말입지요. 어찌하여 그것이 그런 땅에서 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지를 꺾고 다시 갔을 때는 새 꽃이 피지 않은 상태였지요.”
은 파파에게 정반합이 가진 꽃은 어찌 구한 거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그곳에 다시 가도 꽃이 피어 있을지 아닐지 장담도 못 한다는 말이었다.
왜 그 위험한 곳에 갔냐 물은 것은 대답을 피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신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지 말라고만 당부했다. 적어도 목숨을 거는 일에 있어서는 앞으로 조심하겠다 약속했으니 그 정도는 지키겠지.
“호오, 이것이 그 계획의 마무리인 건가요?”
지금 이곳엔 초목과 자연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형태를 유지한 건물은 내부를 청소했고 자리가 모자랄 것을 대비해 폐허를 정리한 자리에는 천막을 세웠다. 그곳에선 깨끗하게 세탁한 흰 겉옷을 걸친 여인들이 각각 피를 닦을 천과 미리 준비한 연고, 금창약 등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삼 번 천막에 사람 더 가주세요! 이 번 천막은 여기 처치 끝내고 곧 갈 테니까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그 들을 진두지휘하는 한 소년, 신생이 있다.
“저 소년은 금 의원의 제자죠?”
“수제자지. 한 명뿐이긴 하지만.”
“그럼 저 여인들은 갑자기 어디서 난 걸까요. 태양의원에는 여 의원의 숫자가 저렇게 많지 않은데. 어디서 본 얼굴도 있는 거 같고, 잠깐만, 설마?”
내가 별다른 답을 해주지 않고 웃고만 있자 제갈다영이 그녀들의 얼굴을 확인하러 쪼르르 천막 쪽으로 달려갔다.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간편한 복장을 한 후 흰 겉옷을 입은 저들의 정체는 바로 하오문의 기녀들이다.
은 파파에게 부탁해 추려낸, 야매로 익힌 민간요법이나마 주변에 시술하고 다녔던 자들. 그 외에도 의술을 익히는 데 관심이 있거나 자질이 있는 이들을 추가로 더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기녀가 되기 전이었던 어린 소녀들부터, 이제 기녀로서는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퇴기들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그랬더니 숫자가 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한두 명 많은 게 아니라 세 배를 웃돌 정도였으니까.
그중 짧은 시간 내 가르쳐서 효과를 볼 수 있고, 신생이 이끌 수 있는 숫자만 추려놓은 게 지금 저 정도다.
어디, 잘하고 있는지 구경 좀 해볼까?
나는 좀 멀리 떨어져서 이번 교육생 중 제일 어린, 신생 또래의 소녀가, 열심히 상처를 소독하고 찢어진 피부를 봉합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기녀가 되기엔 아직 나이가 어려 객잔과 기루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인데, 계산과 암기가 빠르고 일도 척척이라 평소 주변의 예쁨을 많이 받았다고. 은 파파의 말로는 하오문주가 막내 제자로 들이려고 지켜보고 있던 아이란다.
어린 나이에 점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공 실력도 갈고닦았고, 손재주도 보통 이상.
내가 가르친 것도 잘 흡수하더라고. 처음 신생을 가르칠 때가 생각 날 정도로.
이번 하오문 프로젝트에서 상당히 기대하고 있는 인재라고나 할까.
“이익, 아프잖냐!”
“그냥 기분이 그러신 거예요. 점혈 해서 하나도 안 아플 텐데.”
“점혈은 무슨. 너 무안객잔의 초희 아니냐? 너 곧 머리 올릴 때 되지 않았던가? 여기서 뭔 쓸 데없는 짓을 하는 게야?”
팔의 찢어진 상처를 치료받던 자가 초희, 그러니까 내가 주목하고 있는 우등생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아하, 알겠다. 바느질 연습을 하는구만? 나에게 수를 놓은 손수건을 주려고. 맞지?”
“가만히 계세요. 상처를 꿰매고 있잖아요.”
“흐흐, 우리끼리 네 머리는 누가 올리네 내기를 하고 있었는데. 네년이 다른 놈들을 빼놓고 내게 온 게, 네 첫 밤을 내게 주겠다는 신호렷다?”
초희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저러다 한 대 치려나?
쳐도 괜찮을지도.
지금 수련을 하는 이들은 장차 이곳 항주에서 의원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들의 과거를 들먹이는 자들을 단호하게 쳐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진상은 초장부터, 확실하게.
“지금 우리 수련의에게 뭐 하는 짓입니까?”
찰싹, 그 소리가 나는 대신 신생이 목소리를 높였다.
“넌 또 뭐야? 어디 새끼 점소이냐?”
“태양의원의 의원 신생입니다.”
신생은 그렇게 말하며 환자에게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리고 옆에 선 초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삼 번 천막으로 가세요. 손이 부족합니다.”
“아, 네!”
“신생이라고 했냐? 초희는 지금 나를 상대해주고 있는데 왜 네놈이 와서 이래라 저래라야? 삼 번 천막? 거기 놈들이 웃돈을 얹어 주드냐? 자, 돈이라면 여기 있다. 여기!”
“돈은 안 받겠습니다.”
신생이 환자가 내민 돈을, 아니, 진상이 내민 돈을 손으로 쳐냈다. 그리고는 초희가 열심히 꿰매던 실의 끄트머리를 잡아 뜯었다.
“으악! 악! 피!”
“가십시오. 치료를 거부하겠습니다.”
“뭐, 뭣!”
“당신이 존중할 수 있는 의원은 여기 없을 거 같으니, 그 돈으로 당신이 의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 진료를 받으십시오.”
“이, 이 어린놈이!”
그 순간 신생이 자신의 기세를 내뿜었다. 개방 방주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던, 개방의 미래를 책임질 거라 여겨졌던 동량이 내뿜은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고, 그건 마약에 절어 머리가 마비된 채로 타인의 선동에 휘둘렸던 중독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케엑, 켁!”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도 만약, 이곳의 의원들을 의원으로 존중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다시 치료를 받으러 오셔도 됩니다. 스승님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테니까.”
신생은 그렇게 말하고는 진상에게서 휙 돌아섰다.
너무 냉랭한 태도가 아닌가 싶긴 하지만, 태양의원의 다른 분원도 아니고 이곳에서는 필요한 태도다.
다른 분원이라면 너무 냉정하게 쳐내진 못할 거다. 태양의원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마약 사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하오문이 극단적으로 의원을 배제한 탓에, 경쟁할 만한 의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저 진상은 겉으로나마 태도를 바꾸거나 먼 곳까지 가서 치료를 받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다.
그렇게 하나둘 바꿔 가다 보면, 십 년쯤 지나서는 또 달라져 있겠지.
힘들고 먼 길이지만 그것이 은 파파와 십이월들이 선택한, 그리고 지금 저 수련의들이 선택한 길이다.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기녀 외에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 적 없던 이들.
며칠간 밤을 새워 낯선 공부와 실습을 하고 끊임없이 환자를 받는 와중에도 그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길이라서일까.
“앗, 언제 오셨어요?!”
그제야 나를 발견한 신생이 아까 진상을 대할 때의 살벌함은 어디 가고, 어린이날 솜사탕을 들고 놀이공원에 도착한 아이처럼 웃으며 내게 달려왔다.
“좀 전에. 잠깐 보고 가려고 했지.”
“여긴 걱정 마세요! 제가 잘하고 있어요!”
“그래, 그런 거 같더라.”
나는 신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전이었다면 잘하고 있었어도 내가 곁에 있기를 바랐을 텐데. 아이가 자란다는 건 뿌듯함과 동시에 아쉽기도 한 거군.
“진상 대처는 아까 봤는데, 치료비 쪽은 어때. 불만이 있진 않고?”
다른 몇몇 분원은 이런 경우 무료로 치료를 진행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돈을 받았다. 그것도 태양의원이 책정한 정가보다 조금 높은 가격이다. 분원이 위치한 곳에 따라서 가격을 적당히 조절하기도 하지만 여기만큼 비싸게 책정한 곳은 없었다.
“전혀요. 제가 그랬잖아요. 여기 기준으로는 오히려 싼 편이라니까요?”
향락도시가 다 그렇긴 하지만, 특히 이곳은 마약사업의 중심지였던 탓에 물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그걸 감안한다면 이 정도 치료비는 싼 거라는 은 파파와 신생의 의견에 가격을 책정하긴 했는데, 정말 아무런 불만도 없이 환자들이 수긍하고 있다는 건 좀 놀랍군.
“개방의 걸의들도 와서 도움을 주고 있고요, 지금은 약이 부족해서 처치 위주로 진행 중인 게 아쉬워요. 그만큼 다들 침술이나 시술 능력은 빠르게 갖추겠지만요. 그것만 빼면 문제 되는 건 없어요.”
태양의원의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신생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내가 굳이 여기서 서성거릴 이유는 없겠군.
“그럼 난 가보마.”
때마침 제갈다영이 다시 내 쪽으로 오기에 그녀에게 신생을 소개시켰다. 금태양의 수제자니 궁금한 게 있으면 전부 신생을 통해 서찰을 보내라고 이른 후 그 틈을 타 몸을 뺐다.
항주성을 벗어나 한참을 멀어진 후, 제갈다영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확신한 나는 품을 뒤져 가면을 꺼냈다.
다시 금태양이 될 시간이다.
“평생을 쓴 가면인데, 그 며칠 안 쓰고 있었다고 벌써 어색하네.”
그래도 확실히 얼굴을 감춘다는 안정감이 있긴 했다. 나는 가면을 쓴 채로 몸을 날렸다.
회수의 강물이 흐르는 강변의 객잔.
내가 봐야 할 환자들은 이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