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말도 안 돼. 착각이겠지.
내가 홍령이 그리워서 검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검명이라고 착각한 거겠지.
그 말을 뒷받침하듯 검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진짜 이 검에 홍령이 깃든 거라면 내가 착각이라고 생각했을 때 또다시 우웅, 하고 검명을 울렸을 것이다.
웅―
……뭐야. 진짜 거기 있어?
‘홍령’의 모습을 한 인형에게 깃든 게 아니라, 거기에 있어?
그리고 또 울림이 없다.
혈교의 홍령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였을 때, 내가 아는 홍령이 그곳에 붙잡혔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긴 했지만, 또 이 검에서 홍령의 느낌이 느껴지기도 한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하지만 확실한 건, 홍령에 관한 문제는 하루 이틀로 해결될 게 아니라는 것.
당장 눈앞의 문제에 집중해야지.
“내가 그렇게 재밌는 존재인지는 몰랐는데.”
“원래 그런 건 본인만 모르죠. 솔직히 당신에 대해서는, 제갈세가가 아니라도 흥미로워할걸요? 당신이 하오문과 개방을 데리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도 초미의 관심사고, 뭣보다 당신의 정체가 말이죠, 엄청나게 구미가 돋거든요!”
“그런가?”
“그런가는 무슨 그런가예요? 다 알면서. 지금 진짜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거죠?”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후훗, 숨기려 해도 소용없어요. 당신의 정보에는 족적이 없었는걸요? 갑자기 두드러진 사람도 그 전의 역사가 있는 법인데, 당신은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고요. 물론, 정말 아무런 연고 없는 초출이 갑자기 무대를 휘어잡는 게 역사적으로 없었던 일은 아니긴 해요. 하지만 그런 초출이 갑자기 거물들과 엮이는 건 정말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요?”
검 홍령의 울림처럼 제갈다영이 내게 이성적 호감이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원래 제갈다영이 가진 호기심에 기반한 호감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군.
“하물며 그들을 손바닥 위에 놓고 좌지우지하는 건 개인의 실력이나 매력 같은 걸로는 불가능해요. 그런 일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사술(邪術)이라도 썼으면 모를까. 근데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남은 건 하나, 정체를 감추고 있다는 것뿐이죠.”
차라리 이쪽이 낫다. 이성적 호감이라면 오히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을 텐데, 호기심에 기반한 호감이라면 오히려 이용할 만하지.
그렇다면, 일단 빚 놓고 빚 갚기의 굴레에 빠진 저 멍청이부터 구제해볼까?
“재밌는 추론 잘 들었어. 그래, 앞으로 그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캐 나갈 생각인데?”
“글쎄요, 이렇게 안면을 트고 얘기를 하면서 조금씩 모아갈 수도 있고요. 아니면 당신이 선심을 써서 말을 좀 해주는 것도 괜찮죠. 그런 일은 없을 거 같지만.”
“왜 없다고 생각해?”
“말해 주게요?”
“공짜로는 안 돼.”
“흐음, 돈으로 살 수 있으면 재미가 덜 해지는데.”
“싫음 말고.”
“얼마면 되는데요?”
“팔 할.”
“팔 할이요? 무엇의?”
“저 녀석의 빚 중 이자로 붙은 팔 할.”
나는 저 아래, 칼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고 있는 창천 녀석을 가리켰다.
“녀석이 번 돈으로만 받는다고 했지만 정보라면 얘기가 좀 다를 수도 있겠지?”
“흐으응, 이미 결정한 사안을 번복하는 건 소녀의 취향이 아닌데요.”
“대신, 다른 얘기를 들려주지.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제갈다영은 이미 내가 낼 답의 예시를 정해주었다.
하나는 하오문과 개방을 이용하여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그리고 또 하나는 나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전자를 밝히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알게 될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일은, 항상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남이 몰라야 가치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딱히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소림에서부터 쭉 보아온 제갈다영이라면, 앞으로도 마약만을 고수하다간 결국 도시 자체가 몰락 수순을 밟게 될 항주를 되살리는 내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관심이 생긴다면 제갈가의 이름으로 한 발이라도 걸치든, 숟가락을 올리든 하겠지. 그게 관심 있는 일에 개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문제는 더 이상 나눠줄 몫이 없다는 거다.
이미 하오문과 개방, 청수채가 각기 일을 나눠 맡았으니까.
제갈가가 끼면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줄어들고 말 거고, 밥그릇 문제는 다툼을 부른다.
그건 미연에 차단해야지.
후자, 그러니까 내 정체를 공개하는 것도 아직은 이르다. 지금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내 이중생활을 알고 있다. 아직 써먹을 곳이 더 있을 거 같은데 굳이 이런 곳에서 내 정체를 도매금으로 팔아버리는 건 너무 아깝지.
“당신과 창천이 나를 도와서 마물을 쓰러트렸을 때 기억나나? 주변의 다른 이들은 그 근처로 다가오지조차 못했는데, 두 사람은 제법 멀쩡하더군.”
“멀쩡하기는요. 엄청 힘들었는걸요. 물론 다른 이들처럼 픽 쓰러지거나, 생기를 잃어서 그대로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요.”
“그랬지. 그거,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아?”
걸렸다.
제갈다영의 표정이 잠시 내 말의 진의를 찾아 헤매다가 이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밝게 빛났다. 두 눈이 초롱초롱하다 못해 번쩍번쩍할 지경이었다.
“당신, 그 이유를 알아요? 정말요?”
“추측이긴 하지만, 제법 근거 있는 추측이지.”
“근거로 댈 만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거군요!”
제갈다영은 그렇게 말하며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불퉁한 표정의 창천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흐음, 표정을 보아하니, 녀석도 제갈다영에게 마음이 있어서 같이 다니는 건 아닌 모양이군.
조카사위 후보에서 탈락시키려고 했지만, 이번 한 번은 봐주도록 하겠어.
“원금 정도라면 창천 소협도 열심히 갚아나갈 수 있겠네요. 쓸 만한 사람 하나 편하게 부려먹지 못하는 건 좀 아깝지만, 당장의 즐거움에 비할 바는 아니죠.”
“현명한 선택이야.”
이 정보로 창천의 빚을 전부 갚아줄 수도 있지만, 사람이 그 정도는 자력으로 해내야지.
제 지갑 관리 하나 못하는 놈이 내 조카에게 접근하는 건 허락할 수 없다고!
“여기, 창천 소협과 작성한 계약서예요. 이 부분을 이렇게 수정할 테니까―.”
구두 계약이 아니었어? 계약서까지 썼단 말이야?
제갈다영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는 동안 제갈다영이 휴대용 지필묵을 꺼내 계약서의 남는 공간에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내게 수결을 받아 그 내용을 반으로 갈라 건넸다.
“참 꼼꼼하네.”
“그럼요. 모든 경우 남는 건 기록밖에 없는걸요. 본가에선 아이가 어릴 때부터,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져라, 그리고 전부 기록하라. 라고 가르친답니다.”
그건 좀 흥미가 생기는데?
제갈세가 사람들 중 섬서사변이나 혈교에 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일과 관련해서도 상세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섬서사변에 대해서는 이제 알 만큼 알지만 혈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투성이니까.
기회가 된다면 제갈세가에 방문해봐야겠군.
“이제 내 차례군. 나와 당신, 그리고 저기 저 창천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거 알아?”
“공통점이요? 뭐지, 무림인이라는 거요?”
“그것도 공통점이긴 하지만, 마물의 근처에 다가갔을 때 생기가 빨려 죽은 이들도 무림인이었지. 그거 말고, 다른 공통점이 있어. 바로 체질이지.”
나는 간략하게 나의 체질, 그러니까 섬서사변을 겪은 땅에서 태어나 극도의 기허 상태로 살았던 과거의 얘기를, 내가 금태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변형해 말했다.
“세상에, 그런 체질인데 살아남았다고요?”
“운이 좋았어.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상태가 아니지만, 아마 기반이 달라진 건 아닐 거야. 근데 내가 알기로는 유명한 무림세가들 또한 비슷한 체질적 특징이 있다던데.”
“맞아요! 원래는 아는 사람만 아는, 오대세가에서는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게 쉬쉬하는 일이지만, 당신도 중대한 비밀을 말해줬으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죠.”
“그래. 오행 중 한 종류의 기가 극도로 부족한 체질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기공을 창안하고, 그에 맞춰 무공을 수련한 것. 그게 오대세가의 비밀이지. 때문에 그들의 무공은 다른 체질을 가진 자가 익혀봤자 별 쓸모가 없고.”
“근데 그게 그 상황과는 무슨 상관이죠? 또, 창천은요?”
“제갈세가의 아가씨가 왜 그렇게 모르는 척을 하실까. 이 정도 얘기했으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아?”
“……설마?”
“창천, 저 녀석은 남궁세가의 먼 방계야. 그것도 녀석들의 혈족병이 발현될 정도로 그 피를 짙게 물려받은 편이지.”
“말도 안 돼요.”
갑자기 제갈다영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뭐가 말이 안 돼?”
“남궁세가잖아요! 다른 세가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쓰지만, 남궁세가만큼 방계 관리를 철저히 하는 세가도 없다고요. 특히 자기들의 혈족병이 발현될 정도로 그 피를 강하게 물려받은 무인이라면 남궁세가가 신경 쓰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걔네는 봉문 했잖아?”
“이십여 년 전이죠. 하지만 창천 소협도 그렇게 어리지 않잖아요?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혔다면 빨리 혈족병의 발현을 알았을 거고, 남궁세가 봉문 당시쯤 창천 소협의 나이가―.”
“일고여덟 살쯤 됐겠네.”
“그래요. 더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그 정도 나이 대였다면, 남궁세가가 반드시 찾아냈을 거예요.”
“타 문파의 비호를 받고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리죠?”
여기서 정보를 더 풀까 말까.
지금 창천의 체질에 대한 내용을 살짝 언급한 것만으로도 제법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십여 년 전. 내가 태어났고, 섬서사변이 일어났던 시기다.
그 일과 관련해서 남궁세가가 관련된 적은 없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봉문을 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오대세가의 수좌 소리를 듣는 남궁세가다. 홍령도 지금은 무당이 기를 펴고 있지만, 무림제일검은 항상 남궁세가에서 나왔다는 얘길 했었고.
그 정도면 무림에 입김도 강했을 텐데 그 시대 최고의 비사에 남궁세가가 그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나?
거기에 타이밍 좋게 봉문.
이건 좀 캐볼 만한데.
무당이 하필 다른 곳도 아니고 남궁세가의 체질과 무공을 연구했다는 점도, 지금 생각해 보면 은근 연결이 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 게 있어. 근데 소저는 남궁세가에 대해 꽤 잘 아는데? 오대세가끼리는 원래 그런가?”
당당은 다른 오대세가에는 별 관심 없던데. 모용가나 황보가 녀석들에게 보였던 태도도 그렇고.
“다른 사람은 잘 모를 거예요. 하지만 외가가 남궁세가인 사람이라면 알 법도 하죠?”
그랬군. 제갈다영의 외가가 남궁세가였다라. 그렇다면 남궁세가가 방계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거나 그들의 혈족병이 혈우병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도 알고 있을 법하다.
“그래서요, 다른 문파의 비호가 대체 무슨 얘기인데요? 내 몸의 피 절반은 남궁세가의 것이에요. 그 피와 관련된 문제라면 나도 알아야겠어요.”
지금까지 제갈다영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다소 사명감과 비슷한 감정이 눈에 떠올라 있었다.
“나도 그 이상은 정확히 몰라.”
“이봐요, 김진 공자!”
“자세한 건 금태양에게 물어보라고.”
물론, 그게 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