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수적들한테는 조금 미안하긴 한데, 처음부터 계획이 그랬다.
“으악!”
“사, 사람 살려!”
“어딜 내빼느냐, 홀홀. 네놈들의 피로 감히 항주를 건드린 대가를 치러야 할 게다!”
“이 땅은 대대로 우리 거지들 밥그릇이야! 감히 거지 동냥그릇을 깨려 들어?”
항구가 있는 너른 길목에서 개방의 거지들과 하오문 문도들이 합심해 수적들을 개 패듯이 패기 시작했다.
수적들이 배와 물에 익숙하다는 장점은 하오문도들을 상대로는 썩 이롭지 못했다. 원래 이 항구는 하오문도들이 이십 년 넘게 사업을 하던 곳이다. 당연히 그들도 물과 배에 익숙했다. 아니, 오히려 더 능숙했다.
“으윽, 짜! 눈을 뜰 수가 없어!”
“파도가 뭐 이렇게 거칠어!”
물도 같은 물이 아니다. 회수의 강물과 바다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실력이 좀 부족한 하오문도도 수적들을 몰아붙이는 데 일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둘 항구에서 밀려난 이들은 골목에서 튀어나온 거지들의 타구봉에 두더지 게임 하듯 머리를 맞고 다시 대로로 쫓겨났다.
“감히 어딜!”
“여기부터는 우리 개방의 영역이여, 썩 꺼져!”
그렇게 개 패듯이 맞고 밀려난 수적들이 주춤주춤하다가 대로에서 뭉쳤다. 멀리서 봐도 어쩔 줄을 모르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이상의 지시를 준 게 없거든.
“어쩌죠, 부채주? 왜 저 치들이 우리를 이렇게 패는 겁니까?! 우리랑 한편 아니었어요?”
“나, 나도 몰라!”
지시를 한다고 해도 연기를 세세하게 잘할 거 같지가 않았거든.
……그래도 귀띔은 해줄 걸 그랬나?
“저, 저놈은 또 뭐야?!”
수적들의 역할은, 맨 처음 중독자들을 제압하다가, 그들의 행사가 항주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 시작하면, 하오문과 개방에 얻어맞는 거라고 말이다.
갑자기 한쪽에서 나타난 무인이 거침없는 기세로 수적들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하오문에서 따로 고용한 무인인가?
검이 좀 익숙한 것도 같은데―
“와아, 여기가 진짜 명당이로군요! 한눈에 다 들어오네요!”
저쪽 아래, 수적들이 맞닥뜨린 새로운 적에 신경이 쏠린 사이, 내 쪽에도 누군가 나타났다.
딱히 적의는 없어서 술을 가져오는 하인인가 싶었더니―
“김진 공자, 맞죠? 옆에 좀 앉아도 될까요?”
제갈다영? 갑자기 여긴 왜?
“실례 좀 할게요. 고용주로서 고용인이 일을 잘 하나 감시할 의무가 있는데, 여기라면 잘 보일 거 같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제갈다영은 내 옆에 앉았다. 애초에 내 허락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였다.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
“그러는 김진 공자께서도 제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인데요?”
제갈다영과 새삼스레 기 싸움을 할 생각은 없다. 나는 이미 상대가 누군지 알고, 제갈다영은 그걸 숨기고 얘기하는 것으로 내가 첫 주도권을 잡았다는 걸 아니까.
이미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화는 내게 유리하게 굴러간다.
“어차피 하오문에 물어보시면 알게 되실 테니까. 그쪽에서 우리에게 힘을 좀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거든요. 의뢰를 받은 셈이죠.”
“우리라면, 저기 있는 저자까지?”
“네, 창천 소협이요. 굳이 둘이나 필요하진 않을 거 같아서 창천 소협만 보냈죠.”
“그랬군.”
하오문은 저번 일로 수뇌부를 잃었고, 살아남은 이 중 일부는 하오문을 나가 폭동을 주도했다. 은 파파와 십이월이 합류했지만 절대적인 숫자가 밀리는 상황은 어쩔 수가 없다. 특히 상대를 죽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지난번 일로 항주 내 분위기가 흉흉해지고, 개방과 하오문의 지배력이 땅에 떨어졌다. 다른 문파들처럼 힘으로 분위기를 쥐어 잡는 문파들은 아니지만,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그 조직력이 성 내의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사건.
“이걸 기획한 건 김진 공자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하오문이 주도로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이걸 이끄는 건 은퇴했던 태상맹주, 태상장로들이더라고요. 근데 그 사람들, 저도 예전에 조사해봐서 아는데, 그 사람들 방식이 아니에요. 거기에 개방까지 엮여 있다니. 두 집단은 원래 사이가 엄청 안 좋았다고요. 근데 이 둘이 함께 움직인다? 교집합이 되는 존재가 중심이 되었다고 볼 수밖에요.”
역시 제갈세가라고 해야 할까.
하오문이 의뢰를 넣었으니 남들보다 진실에 접근한 셈이지만 그것만으로 여기까지 간파하다니.
“공공의 적은 사람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데 효과적이죠. 하물며 그 상대가 해적도 아니고 수적. 얼마나 얕보였으면 저 멀리 회수에서까지 항주를 치러 왔을까. 그때 신뢰를 잃은 하오문과 개방이 나선다, 원래 무림문파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그런 사건이 제일이니까요.”
그렇다.
무림문파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위협하는 적에게서 그들을 구해줄 때다.
마약을 뺏고, 마약과 관련된 사업을 더 이상 운영하지 못하게 막아 큰 반감을 산 하오문이, 항주에서 새로운 체계로 일을 해나가려면 이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 또한, 마약 사업처럼 항주 전체의 도움과 연계가 필요하니까.
“도, 도망쳐! 튀어라!”
“부채주의 신호다! 튀어!”
그런 점에서 수적들은 이용당한 거라고 할까, 아니면 마지막으로 은 파파에게 쓴맛을 보게 만듦으로써 딴 생각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꼭 사람이 때려야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꼭 매를 들어야 말을 듣는 인간 군상도 있는 법이니까.
매 수마다 일석 삼조의 효과를 노린 계획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꽤 궁금하네요. 다시 뿌리를 내린 하오문과 개방이, 다시 얻은 신뢰자본을 기반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아무리 제갈세가라도 거기까지 추측은 힘들었던 건가?
하긴, 그 사업은 개방에게도 필요한 부분만 공개했으니까. 은 파파가 정보 관리를 그렇게 허술하게 할 리 없지.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어떤 거죠?”
제갈다영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좀 과할 정도로.
“저 녀석,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가리킨 것은 창천이었다. 창천은 수적들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득달같이 따라붙어서 그들을 괴롭혔다. 말이 괴롭힌다지, 거의 죽이지만 않을 뿐이었다.
근데 왜 저 녀석이 저기 있냐고.
“아아, 당신도 소림에서 본 적이 있나요? 태양의원으로 돌아가다가 길을 잃었대요. 우연히 만났는데, 내가 당신 얼굴을 보러 항주로 간다니까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하더라고요.”
……설마 하긴 했는데 진짜 길을 잃은 거였냐. 대체 어느 정도 길치인 거야?
태양의원과 항주는 정반대 방향이라고!
“그건 됐고. 내가 궁금한 건 지금 왜 ‘저기’ 있느냐인데.”
어째서 창천이 항주에 나타났느냐는 예상 범위 내에 있는 얘기였다. 마물로 변한 하오문주와의 싸움에 끼어든 것도, 녀석의 강자와의 싸움에 대한 욕구를 생각하면 썩 이상한 일도 아니다. 거기에 옆에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핏줄을 지닌 제갈다영도 있지 않던가.
근데 창천이 ‘의뢰’를 받아서 ‘일’을 하고 있다는 건, 내 예상 밖이다.
뜻이 같을 때야 같이 움직이지만, 그 외의 경우엔 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창천이 아닌가.
그나마 리의 말은 고분고분 듣는 편이라 한동안 그걸 빌미로 잘 부려먹었는데 그마저도 소림을 떠날 즈음엔 약빨이 떨어졌었다.
그런 녀석이 자의적으로 일이라는 걸 한다니 의아할 수밖에.
우웅―
그때 갑자기 허리춤의 검이 공명했다.
또 이러는군.
검 ‘홍령’.
심상의 화산에서 가져온 신비로운 검. 홍령의 이름을 가진 그 검은 내 곁에 있던 귀신 홍령이 사라진 그 날 이후, 간혹 가다 이렇게 공명음을 내곤 했다.
그 타이밍은 홍령이 내게 말을 걸 때와 비슷했다.
그래. 만약 홍령이 있었다면 지금쯤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겠지.
‘설마, 창천…… 조카님에게서 마음이 떠난 거 아니에요? 제갈 소저에게 마음이 생긴 거 아니고서야!’
창천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조카님이 뭐가 되냐. 하면서 사랑의 작대기 시즌 2를 내 귀에 대고 종알종알 떠들어댔을 것이다.
“그건 돈 때문이랍니다.”
“돈?”
돈? 에에? 머릿속에서 혼자 재잘거리던 홍령의 목소리가 찬물을 맞은 듯 조용해졌다. 사랑의 작대기에 돈은 너무 낭만이 없긴 하지.
“항주에 갔다가 태양의원까지 돌아가는 길을 안내해달라고 했는데, 길 안내라는 게 원래 좀 비싼 의뢰 아니겠나요? 헌데 한 푼도 없다고 해서, 소녀가 인심 써서 팔 할에 외상을 걸어드렸답니다.”
“……팔 할?”
“말하자면 이자인 셈일까요? 제가 먼저 숙박비며 밥값이며 다 내드렸으니까요. 길 안내 비용은 양심상 정가로 받기로 했답니다.”
잠깐만. 이거 말이 외상이지 거의 고리대잖아.
창천 이 녀석, 미친 거 아냐? 이런 미친 서비스를 넙쭉 이용하고 있어?!
그 돈, 결국 내가 내야 할 거잖아!
“얼만데?”
“예?”
“……다 해서, 창천이 진 빚이 얼마냐고.”
돌겠네.
이 제갈세가 아가씨의 취향은 보통 고급스러운 게 아니다.
우리가 소림으로 갈 때 합류했을 때야 자기 신분을 숨기느라 야숙도 흙 묻은 건량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융중다원에선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자 자신의 취향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 일정에 함께하며 숙식을 했다면 한두 푼을 쓴 게 아닐 텐데.
“호호, 왜 관심을 가지시는진 모르겠지만, 아실 필요는 없으셔요. 반드시 본인이 갚아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거든요.”
“본인이? 그래서 저러고 있는 건가?”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아야 해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납득이 간다. 제멋대로인 놈이지만 나름 그런 계산은 정확하게 하려는 놈이니까.
……아니지, 나한테 빌붙어 먹은 건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안 하던데?
“그런 셈이지요. 꽤 오랫동안 부릴 수 있을 거 같네요.”
제갈다영이 까르륵 웃었고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거 해서 하오문이 얼마를 준다고 했을까? 그 돈이 한 번에 제갈다영에게 진 빚을 갚을 정도는 아닐 거다. 그러면 같이 다니는 동안 숙식비로 인한 빚이 또 새끼를 쳐서 늘고, 그러면 창천은 영영 제갈다영의 손에……
우웅―
잠깐만, 곤란한데?
녀석은 내 조카사위 후보라고!
우웅―
물론 내가 반대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탈락하는 건 안 되지! 창천 녀석 정도는 후보로 올려놔야 이상한 쭉정이들이 미리 걸러진단 말이야!
거기에 제갈다영의 태도도 이상해.
제갈세가쯤 되면 충분히 괜찮은 무인을 고용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이렇게 귀찮은 방식으로 사람을 곁에 둔다고?
“……혹시, 저 녀석이 마음에 들어?”
제갈다영도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고서야?
창천도 그래. 리가 녀석을 오매불망(정확히는 창천이 전달할 내 서찰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다른 여자랑 중원 유람을 하고 있어?
이 자식이?!
“어머, 그래 보이나요? 흥미가 없는 건 아니긴 하지만, 딱히 그래서는 아니에요. 그냥 잠깐의 여흥이랄까. 항주로 오는 길이 심심했거든요. 생각보다 재밌긴 했지만 딱히 그 이상은 아니에요.”
거기에 진지한 상대도 아니고 놀잇감이었어? 내 조카사위 후보쯤 되는 녀석이?!
“소녀가 진짜 관심 있는 건, 김진 공자 당신이거든요.”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제갈다영의 말에 검 홍령이 미친 듯이 검명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검명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사, 각, 관,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