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얘기는 끝난 거 같으니까 슬슬 움직이지.”
“예,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아까의 일로 바짝 기강이 잡혔는지, 부채주가 선창하자 나머지 수적들이 쩌렁쩌렁 따라 외쳤다.
“그거 그만들 해. 객잔 사람들이 불편해하잖아. 그리고 멀리 안 가. 이 정자는 이 인원이 다 앉기는 좁으니까. 점소이!”
나는 아까부터 우리 쪽을 기웃거리던 점소이를 향해 손짓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만면에 화색을 띠고 쪼르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대인.”
어라. 자세히 보니까 이 사람, 점소이가 아닌데. 자길 객잔 주인이라고 소개하던 그 사람 아닌가?
“어찌 귀인을 점소이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있겠습니까. 자, 이쪽으로 가시지요. 다른 분들이 오셨을 때 이미 준비를 싹 마쳐놓았습니다.”
대인원이라 그런가 점주가 직접 나왔다. 우리쪽 주문이 빨리빨리 처리될 테니 나쁠 건 없지.
점주를 따라 좀 이동하자, 우리가 아까 있던 정자와는 규모가 다른 누대가 보였다. 계단을 오르자 백여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거 같은 넓이에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저기 두목, 이건……? 또 누가 옵니까?”
“오긴 누가 와.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그러면 이게 전부 저희를 위해……?”
“두 번 물으면 저기 바닥에 둘러 앉아서 거지밥이나 먹게 한다?”
“이놈아, 거지밥이 뭐 어때서? 생각보다 먹을 만해!”
쭐래쭐래 따라와선 토를 다는 개방 방주는 가볍게 무시하고, 나는 수적들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목구멍에 밥 처넣는 거까지 내가 일일이 명령해야 하나?”
“아닙니다! 야! 두목께서 우릴 위해 진수성찬을 준비하셨다! 먹자!”
“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좀 전까지 쥐 잡듯이 분위기를 잡다가 갑자기 차려진 진수성찬에 수적들은 정신을 못 차린 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상한 물에 말라비틀어진 건량만 씹어 먹으며 악과 깡으로 이곳까지 노를 저어 달려왔던 수적들은 곧 걸신 들린 듯이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허억, 부채주! 이 오리고기 좀 먹어보십쇼. 국물이 끝내줍디다!”
“멍능데 망시끼지마라(먹는데 말시키지 마라)!”
“어, 이건 술 아닌가? 술인데?”
“아까 탈나서 먹으면 안 된다고 한 놈들 빼곤 먹어도 되는 거 아냐?”
몇 놈이 상마다 올라와 있는 약주를 보고 내 눈치를 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적들이 신이 나서 마개를 뜯었다. 내게 금주와 제한식을 명받은 수적들은 입맛만 다셨다. 그래도 오리고기가 들어간 부드러운 죽이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거하게들 먹이는구만.”
“밥은 중요하니까요. 세상만사 모든 일이 전부 밥그릇 문제 아니겠어요.”
“그거야 그렇다만. 네놈은 가끔 보면 부잣집 도련님 같지 않을 때가 있다니까. 이런 놈들에게 다른 것보다 밥이 제일 잘 먹히는 걸 안다는 거라든가.”
“그건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두죠.”
나에 대해서 정보를 탈탈 털어봤을 도개걸이 ‘내가 모르는 뭔가가 또 있다고?’ 같은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밥을 중시하는 건 전생의 기억이랄까, 습관 같은 거니까. 나에 대해서 속곳 정보까지 털어도 그거에 대해선 알 도리가 없지.
“하여간, 순하게 사람 다루는 일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휘어잡을 줄도 알고. 맛은 있구만.”
도개걸은 나와 같이 상석에 앉아 오리고기를 하나 뜯었다. 특별히 맛있게 해달라 웃돈을 얹어주었으니 돈 들인 맛이 나겠지, 아무렴. 근데 그 돈 맛을 보면서 왜 표정이 저래?
“근데 말이다.”
“예?”
“왜 이렇게 기분이…… 복날 개 잡기 전에 배 터지게 먹이는 그 기분이 드는데.”
“하하.”
비유는 좀 그렇지만 크게 착각은 아니니까. 하여간 늙은 거지라 촉은 좋아.
“부채주?”
“례, 녜 두멍!(예, 예! 두목!)”
“잠깐 내려놓고 이리 좀 와봐.”
눈에 불을 켜고 오리 넓적다리 살을 거의 마셔버리고 있던 부채주가 그 즉시 손의 오리기름을 닦아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왔다.
“꿀꺽, 부르셨습니까!”
“응, 이쪽 어르신이랑 인사해. 개방의 방주님이다.”
“아, 예. 청수채의 부채주올시다.”
“이놈 봐라. 네놈에게는 깍듯이 존대하더니 나한테는 말투가 왜 이래? 개방 방주가 우습든?”
“별거 아닌 거 갖고 자꾸 싸움 좀 걸지 마시고요. 앞으로 일 같이 할 사이니까 첫 인사부터 동티 좀 내지 맙시다.”
“일을 같이 해? 잠깐만, 나보고 예까지 오라고 한 이유가 설마?”
“네. 제가 아까 약속한 삼 할, 그중 일부는 이 녀석들하고 일할 겁니다. 청수채가 여러 사정이 있어서 인력이 많이 줄었거든요. 개방 중 가용인원을 이쪽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네가 미쳤느냐?”
“왜요, 그래도 개방은 정파라 수적들하고는 일 못 하겠다 그겁니까? 아직 동냥 바가지에 여유가 있나 봐요?”
“지금 이게 그냥 일을 하는 거냐? 죄다 머리에 띠 두르고 수적이 되어서 칼질로 밥을 벌어먹으라고? 차라리 내가 밥을 빌어다 퍼주고 말지!”
도개걸의 고함에 걸신들린 듯 밥을 처먹고 있던 수적들도 이쪽을 쳐다보았다. 사람이란 게 원래, 자기가 하는 일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떳떳치 못한 일이라도 제 일을 비하하면 기분이 나쁜 법이다. 하물며 거지가 수적보다 나은 게 뭐 얼마나 있는가.
“거 말씀이 너무 심하십디다? 우리 두목 얼굴 봐서 내가 한 번은 참소.”
“네까짓 게 안 참으면 어쩔 건데? 부채주라고 했느냐? 내가 장강수로채 대가리하고도 맞먹는 몸이다!”
도개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타구봉을 뽑아들었다. 그 긴 세월 동안 거지들의 위에 군림했던 왕거지의 기세가 거침없이 뻗쳤다. 상다리가 부러질 듯 음식이 올라가 있는 상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수적들은 먹던 음식을 도로 뱉어낼 듯 우웩 소리를 냈다. 바로 앞에서 그 기세를 정면으로 받은 부채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주먹 쥔 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갔는지 피가 배어나왔다.
“그쯤 하시죠. 거지들에게 수적이 되라고 하는 거 아니니까 오해 푸시고요.”
“뭬야?”
“아까 방주도 들으셨잖아요. 저도 어쩌다 보니 두목 같은 게 되어버린 거고, 그래도 내 밑에 있겠다는 사람들 밥벌이 할 건 챙겨주려고 부른 거지. 애먼 사람 목에 칼 들이대는 사업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 아시잖아요.”
나는 내 앞에 있던 술병의 마개를 따 그대로 도개걸에게 권했다. 객잔에도 딱 한 병 있다는 귀한 술이었다.
도개걸은 그 술병을 사납게 노려보다가, 이내 내 손에서 술병을 낚아채곤 자리에 앉았다.
“이거 한 병으로 봐주는 걸 감사히 여겨라, 애송이.”
그제야 도개걸이 기세를 가라앉혔다. 몇몇 수적들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뒤틀린 속을 가라앉히러 뛰어나갔다. 부채주는 그러지도 못하고 겨우 숨을 깊이 쉬었다.
“한 잔 주시죠. 이 친구도 한 잔.”
“받아라, 애송아.”
도개걸이 내게 한 잔, 그리고 부채주에게 한 잔을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건배 한 번을 안 하신다니까.”
“크으, 됐고. 거지들을 수적 되게는 안 한다는 건 무슨 얘긴지 설명이나 해라.”
나는 술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향과 맛을 즐긴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되는 얘기에요. 우리 동네에도 객잔을 여셨잖아요?”
“그렇긴 하다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
“거지들이 구걸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게 표국이 되지 못할 이유는 뭐가 있죠?”
“……뭐라?”
“항주의 항구가 기능을 잃은 후, 이 일대의 표국들은 자연적으로 소멸하거나 규모를 축소했죠. 천하제일표국이라 불리는 금왕표국도 이쪽까진 손을 뻗지 않아요. 조직을 만들기엔 물량이 너무 적고, 손해만 크니까요. 하지만 지금 개방이 표국을 만들어 의지가 있는 거지들을 투입하면―.”
“적은 투자로, 잘 하면 기회를 잡을 수 있겠군.”
“그죠. 거기에 회수를 이용해 내륙 운송도 가능해요. 이 친구들이랑 함께 말이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부채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회수의 상류는 소림과 가깝죠. 그간 너무 퍼주느라 곳간이 비었다 뿐이지, 조금만 구조를 손보면 소림의 재정은 어렵지 않게 넉넉해질 거예요. 그곳을 기착지로 삼아 교역한다면 제법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땡중들이 그리 쉽게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걱정 마세요. 여기 오기 전에 제가 저희 총관이랑 연락해서 싹 개편을 하라고―.”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그 편지를 내가……
창천 편에 보내지 않았나?
“왜 말을 하다 말아? 도발이냐?”
“아, 잠깐 기다려 봐요. 생각해야 하는 게 있다고요.”
그래. 그때 분명 창천에게 맡겼다. 당당은 사천으로 간다고 했고, 나는 항주로 와야 했고, 창천은 돌아간다고 해서……
근데 창천은 지금 여기 와 있잖아?!
하오문주를 상대할 때 도움을 준 이후, 지금은 근처 객잔에서 제갈다영과 함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리에게 갔다가 여기 온 건가? 아니면 그냥 바로 여기 온 건가? 애초에 왜 온 거지?
녀석의 갑작스런 등장에 대해 물어 봐야겠다 생각하긴 했지만 그 뒤로 일이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잠깐만, 거기에 제갈다영하고 같이 있다고?
설마 내 조카에 대한 마음을 그새 포기한 건 아니겠지?! 사내자식이 끈기 없긴!
“그래서 땡중 놈들이 진짜 지네 체질을 뜯어 고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음…… 그거는 좀 걸리긴 하겠지만 되긴 할 거예요.”
창천이 리한테 들렀다 여기 온 거라면 베스트고, 아니어도 조금 늦어질 뿐이다. 내가 보기엔 아직 소림엔 저력이 남아 있거든. 조금만 체계를 손보면 충분히 전처럼 하남 경제의 중심지가 될 거다.
“어쨌든, 주로 나르는 물품은 약재가 될 겁니다. 항주의 항구에서 당장 들여올 수 있는 물건도 약재가 중심이고, 소림에서 날라 올 수 있는 것도 약재니까요. 거지들은 항상 몸이 아프지만, 밥은 구걸할 수 있어도 약은 구걸로 얻기 쉽지 않잖아요?”
“……하여간 교묘한 놈.”
“필요한 걸 딱 제시했다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물자를 운송하다 보면 해당 물건에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병을 달고 사는 거지들에게 약보다 더 급한 게 어디 있겠는가. 거기에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과거 항주의 항구에는 서남쪽의 곡물도 많이 들어왔다죠? 몇년만 지나면 약이 아니라 밥도 빌어먹을 필요가 없어질 겁니다.”
“흥, 그거야 두고 봐야 알지.”
그러나 아까보다는 훨씬 태도가 유해진 도개걸이었다. 반면 부채주를 비롯한 청수채의 수적들은 아까와 달리 기가 한 풀 죽은 상태로 깨작깨작 음식을 입에 넣고 있었다.
깨작깨작이라고는 해도 아까의 걸신들린 상태와 비교했을 때 깨작깨작이라는 거지, 충분히 잘 먹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이중으로 기강을 잡는 데는 성공한 거 같군.
내 말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 파파가 말했던 것처럼 이들은 본질적으로 수적이고, 내가 항상 수채에 상주하고 이들을 관리할 수 없는 만큼 다방면으로 목줄을 채워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개방 방주 도개걸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은 기억은, 그들이 표사로 분한 거지들과 일할 때마다 생각이 나겠지.
그들에게 맡길 물건이 보통의 것이 아닌 만큼 안전장치는 이중 삼중으로, 좀 지나치게 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다 먹었으면 슬슬 갈까, 항주로?”
그럼 이제 세 번째 안전장치를 채우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