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과거의 일에 대해 사과하라는 말에 도개걸의 얼굴이 뭉친 종이보다도 더 구겨졌다. 그러나 사과 따윈 못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되겠냐? 이 늙은 거지가 신생 이 녀석 앞에 무릎이라도 꿇으랴? 아니면 오체투지를 바라느냐?”
“사, 사부님, 전 딱히―.”
“왜, 그걸론 부족하더냐? 네놈의 새 스승이란 놈이, 네놈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잖냐. 팔이라도 한 짝 잘라주면 되겠더냐? 그러면 사과가 되겠어?”
“사과를 하랬더니 왜 애를 더 겁주고 그럽니까?”
“사과하라매? 무림에서 사과라는 게 다 그렇지. 그걸로도 성이 안 차면, 뭐 목으로 사죄하길 바라냐?”
“나이 처먹고 삐딱선 좀 그만 타시고요. 그냥 사과하세요. 무릎도 뭣도 필요 없고, 그냥 진심을 담아서 그 때 그 일은 잘못했다, 미안하다 말을 하라고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거지에게 사과하는 방법까지 내가 알려줘야 하나. 심상 속 화산에서의 수련으로 나도 무림인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착각이었군.
“……후, 그래. 말로 사과를 하라 이거지? 미안하다고?”
“예, 진심을 담아서요.”
진심, 그 말에 더 이상 구겨질 수도 없을 거 같았던 얼굴이 찌그러졌다.
솔직히 도개걸이 그때의 일을 진심으로 미안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더 우선에 두는 가치가 있고, 그걸 위해서 어느 정도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할 테니까. 그게 본인의 희생이 아니라 어린 시절 신생의 희생이라 문제지.
내가 바라는 건 최소한의 성의다.
형식적인 사과라도 괜찮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사과가 있어야 신생이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 더 이상 그 시절의 기억에 발목 잡히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다.
“그래. 내가 그 때는 잘못―”
“됐어요. 사과 안 하셔도 돼요.”
그러나 신생이 도개걸의 말을 잘랐다. 민망해서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 없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신생. 필요 없다고 느껴도 이런 건 생각보다 중요해.”
“알아요. 스승님이 왜 사부님에게 사과시키는지 그 마음도 알고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신생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도개걸을 마주보았다. 조금의 떨림이 있었지만 아까처럼 심하진 않았다.
“저는 사부님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어요. 그러니까, 정말 그런 마음이 생겼을 때 사과해주세요.”
“……애를 아주 물러터진 멍청이로 만들어 놨구만. 본 거지가 정말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 하는 거냐?”
“그게 사과를 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거든요.”
신생이 당당히 어깨를 폈다.
“그러니까 진짜 사과를 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그리고 만약, 그런 날이 안 온다고 해도 상관없고요.”
당당하게 자신이 할 말을 한 신생이 고개를 돌려, 샐쭉 웃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대가를 받지 않아도 괜찮으니까요. 스승님도 제게 그러셨거든요. 그죠?”
“어, 어어. 그렇지.”
“그러니까 억지로 사과하지 않아도 스승님은 개방 거지들을 위해주실 거예요. 그래도 만약 대가가 필요하다면 제가 열심히 할 게요. 제가 자라난 곳의, 제 동냥젖을 빌러 사부님과 함께 뛰어다녔던, 한 때는 가족이었던 거지들을 위해서. 제가 노력할게요.”
아이는 언제가 되어야 대견해지지 않는 걸까.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신생이 어른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이 아이를 대견하게 여길 거 같다.
오히려 대가로 사과를 요구한 내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저기 보인다! 서둘러!”
“으쌰, 으쌰!”
“노를 젓자! 영차, 영차!”
저쪽 강가에서 묘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냥 외침이 아니라 왠지 땀 냄새가 느껴지는 외침이랄까.
“채주다! 채주가 보입니다!”
“채주 아니라니까, 두목이라고. 두목!”
“두목 저희 왔습니다!”
몸을 일으켜 정자 밖을 내다보자, 나를 발견한 이들이 고래고래 나를 불러대며 손을 흔들었다. 몇몇 이들은 손을 흔들 정신도 없이 그 기세로 노를 저었다.
“저놈들은 또 뭐야. 저 깃발은 아마, 청수채던가? 쟤네가 장강칠십이수로채 중 몇 번째더라?”
“그건 잘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대충 순위가 네다섯 개는 올랐을 걸요?”
“엥? 왜?”
“그 위에 있던 수채들을 제가 청소했거든요. 꽤 됐는데 모르고 계셨네.”
“뭐? 진짜? 언제?”
“자세한 건 돌아가서 휘하 거지들에게 확인하시고, 아니면 저들에게 직접 물어보시든가요.”
빠르게 배를 댄 수적들이 서둘러 내가 있는 정자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지난번 내가 쾌속선을 이용할 때보다 인원이 많았다. 쓸 만한 숫자를 추려 빠르게 오라고 했는데 이 정도라. 나쁘진 않네.
“두목을 뵙습니다!”
“존명!”
정자 아래 도착한 수적들은 흙으로 옷이 더러워지는 건 아랑곳 않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뭐야, 오자마자 왜 이래?
“늦어서 죄송합니다!!!!”
누가 보면 아이돌인 줄 알겠다. 신호도 없이 구호가 칼 박자네.
“늦었나? 내가 딱히 언제까지 오라는 기한은 안 정해준 거 같은데.”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그냥 가능한 빨리 오라고만 하고 날짜를 지정하진 않았다.
전서구가 중간에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날씨가 험할 수도 있고, 배가 갑자기 고장 날 수도 있고.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기기 때문에 일정에는 항상 여유를 주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마냥 느리게 올 것만 같은데, 또 의외로 말이지―
“반나절은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뭘 잘못 주워 먹었는지 몇 놈이 탈이 나서 그만!”
기한은 정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그러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최대한 일을 서두르기 마련이라 내 예상보다 빨리 오기도 한단 말이지.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탈이 났어?”
“예, 예……! 식수로 실어놓은 물이 상한 건지, 건량이 잘못된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래? 탈나는 거 위험한데.”
“조금 나아진 거 같긴 한데, 한 놈이 아직 상태가 좀…….”
부채주가 눈을 굴렸고, 나는 부채주의 시선이 닿은 수적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물 갖다드릴게요.”
이젠 척 보면 척인 신생이 수적의 탈수 증상을 눈치채고 객잔 안으로 물을 가지러 향했다. 그동안 나는 수적의 맥을 짚었다.
“많이 안 좋은데? 얜 쉬어야겠다.”
“아, 아닙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맥아리가 없는데 시키긴 뭘 시켜? 푹 쉬면서 배나 지키고 있어. 네가 할 일은 휴식과 회복이다. 안 나으면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네, 두목……!”
수적은 기운 없는 낯으로도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장염에 시달리고 있는 수적에게 침을 놔주고, 품에서 비상약 몇 개를 꺼내 조합했다.
“물 가져왔어요!”
“생수야?”
“당연히 끓였다 식힌 물이죠! 장염이잖아요! 저를 뭘로 보시구.”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잘했다.”
신생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수적에게 약과 물을 처방한 후, 지금은 괜찮지만 똑같이 장염을 앓았다는 수적들의 상태도 한 번씩 살펴보았다.
“당분간 잘 익힌 것만 먹도록.”
“술은 절대 금지야.”
“나은 거 같지만 아직도 맥이 안 좋아. 장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걸? 너도 약 먹고 배지키는 조에 합류.”
괜찮다고 하기에 그런 줄 알았더니 실제로는 안심할 상태들이 아니었다. 특히 장염은 나았다고 생각해도 순식간에 재발해서 상태가 나빠지기도 하니까. 흔하고 별거 아닌 거 같지만, 탈수 증상이 심해지면 죽을 수도 있다. 전생이라면 모를까 여긴 그럴 때 처방할 수액도 없다고. “아, 아닙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두목이 뭘 모르시나 본데, 술을 마셔야 낫습니다. 예?”
“맞습니다! 배에서 어떻게 불을 피웁니까? 다 그러고도 잘 살았습니다.”
이것들이?
몇몇 녀석들이 내 처방에 토를 달았고 나는 그 즉시 기세를 피워 올렸다. 내가 쥐고 있던 침에도 미세하게 검기가 피어올랐다. 이대로 살짝 거죽에 찔러만 넣어도 관통되어 버리겠군.
“낫고 싶은 게 아니라, 죽고 싶은가 보지?”
내 서슬 퍼런 말에 투덜대던 수적들이 입을 딱 닫았다. 어디 보자, 그러고 보니 투덜거린 놈들은 얼굴이 낯설군.
시선을 돌려 부채주를 보았다. 얼굴은 심각한 분위기에 맞춰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씰룩이는 입을 주체하진 못했다.
여전히 나를 두목으로 따르지 못하는 놈들이 있었고, 그놈들을 이번 참에 데려온 모양이다. 이러려고 말이지.
……정말 귀찮아 죽겠군.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제대로 말해 둔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부채주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모난 돌들을 내가 깎아줄 수는 없는 거니까.
그 정도 말을 알아들을 눈치는 있는지 부채주가 입을 씰룩이던 것을 멈추고 곧 진지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나는 니들 두목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고, 니들도 나를 두목 삼고 싶지 않은 놈들이 많은 것도 안다. 그런데, 내 말 좀 안 들어도 상관없다. 반항해도 되고 의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얘기해도 좋아.”
“두목, 그건……?”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인지 부채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나? 서로 맞춰보고 아님 그만이다. 지금이야 임시로 대장 자리에 올라 있지만 사실 난 니들이 크게 필요한 게 아니라서.”
“저, 저희는 두목이 필요합니다!”
부채주가 당황한 눈치로 크게 외쳤다.
“그러니까 그건 니들 입장이고. 난 아니거든.”
장염 증상이 심하지 않다고, 내 처방에 거부의사를 표하던 수적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그냥 강짜 한번 부려본 거겠지. 그런데 내가 세게 나와서 당황했을 거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그래도 상관없다. 그런데 말이야…….”
진짜 내가 두목인 게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이나 다른 자가 채주가 되길 바라는 거였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다. 새 두목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나는 수채를 나가겠다, 그런 고고한 늑대 같은 놈들도 아니다.
자신들의 위에 강하게 군림하는 존재가 필요한 자들이다. 그런 거대한 우산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해하는 놈들.
“의원으로서 내 처방에 토를 달지는 마라.”
녀석들은 지금 내게, 자신들의 위에 군림할 힘을 보여 달라는 거다.
하지 마라. 만약 이를 어긴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공포는 상상의 영역에 있을 때 가장 끔찍한 법이니까.
“……조, 존명.”
부채주가 다시 무릎을 꿇었고, 수적들도 뒤이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처음 도착해 내게 늦었다며 머리를 박았을 때는 부채주의 기세와 재촉에 의한 게 티가 났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내게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고 나서야 나는 기세를 거두고 손에 들고 있던 침을 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