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239화 (239/350)

239화

거기에 하나 더.

“죽어버린 것을 재생(再生)한다…….”

내가 하려는 일에 감명받은 무당의 가출제자까지.

일견 흔들리지 않은 거 같지만, 찻물의 수면을 향한 눈은 아까 무당의 비리를 말할 때와 달리 젊은이의 그것을 담아 반짝였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은 덤이지.

현건은 무당의 부정한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다. 대제자쯤 되어서 가출까지 한 데다가 그들의 비리를 알려주며 우리가 무당이 저지른 부정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기를 바란다.

거기에 항주로 오는 배에서는 또 어땠는지. 무당의 행사를 부정하고 가출했으면서도 자신이 무당의 대제자로서 누려왔던 특혜를 뒤늦게 깨달았던 녀석이 내게 눈을 반짝였던 걸 생각해보면, 녀석의 성향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 정도도 괜찮긴 하지만 한 번 더 쐐기를 박아볼까?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당장 하오문 내에도 이걸 거부하는 문도가 있을걸? 초창기에 그 사람들을 이끄는 데는 은 파파와 십이월들의 힘이 필요해.”

“그 힘이라 함은?”

“힘에 뭐 별다른 게 있나? 무력을 쓴다는 거지. 중독자들이 약에 눈 돌면 답 없잖아. 게다가 마약 수입을 아예 중단하는 것도 아니고 의료용으로 쓰는 건 계속 들여올 건데, 문도들이 그걸 건드리거나 몰래 판매하면 아무 소용없어. 철저히 막아야 해. 손속이 좀 과해도 용서하겠어.”

“그렇군요. 그건 어쩔 수 없지요. 늙은이들이 늘그막에 용 좀 써야겠구만요.”

“사실 그런 거 없이도 가능하지만 시간이 걸리니까. 이번에는 강하게 가자고. 은 파파도 그렇고, 십이월들마저 다 눈 감기 전에 기틀이 잡힌 모습은 보여주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 차를 달라며 현건에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찻주전자를 든 현건과 눈을 마주친 채로 또박또박 말했다.

“힘은 이렇게 쓰는 거지.”

그 말에 현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렇게, 어떻게?

바른 기치,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야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을 때.

순리대로 하기에는 너무 오래 걸리거나 한참을 돌아서 가야 할 때.

파격적인 힘이 아니면 효과가 미약할 때.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옳다는 확신만 있으면, 힘을 쓰는 데 주저할 필요는 없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은 파파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당의 대제자가 내린 차는 확실히 맛이 좋았다.

“옳은 방향이라…… 하오문이 마약을 통해 미친 폐해를 생각하면, 사실 돈을 받을 일은 아니긴 합니다만.”

현건을 겨냥한 말이었는데 정작 은 파파가 찔렸는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다고 무작정 퍼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 공공사업은 관에서 해야지. 솔직히 여태 하오문에서 돈 받으면서 눈감아줬을 거 아냐? 이제 하오문이 손 털고 치료사업으로 돌아서니까 그거 보조나 열심히 하라고 해.”

“그건 그렇지만은요. 이 늙은이가 생각해도 좀 민망합니다. 여태 죄를 지어놓고 또 그 죄를 기반으로 돈을 버는 일이 아닙니까. 정사지간이 아니라 사파라는 오명을 써도 어쩔 수 없겠군요, 홀홀…….”

은 파파가 씁쓸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말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이 그 얘기를 꺼내기에 적절한 타이밍인 거 같군.

“과거를 책임진다는 게 다 그렇지. 정 찜찜하면 앞으로라도 정파에 가까운 일을 하면 되는 거고. 그게 또 시간이 흐르면 당당한 과거가 될 거 아냐?”

“홀홀, 그게 말이 쉽지요.”

“말이 중요해? 행동이 중요하지. 한두 번 실패해도 일단 해보는 거야. 중요한 건, 진짜 할 마음이 있냐는 거지. 진짜 그럴 생각은 있어?”

“……도련님, 누군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일을 하고 싶겠습니까요. 살아보니,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옳은 존재이기를 바랍디다. 그게 사회적으로 옳은 길을 따라가는 것인지, 자신이 하는 것을 사회가 옳다고 인정해주길 바라는 것인지가 다를 뿐이지요.”

은 파파의 소회가 담긴 말이었다. 늙은 그림자라 그런가 말 하나하나가 참 명언 같다니까.

“하오문과 그림자로서의 삶은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허나 한 번, 두 번은 인정을 받아도 계속해서 옳음을, 가치를, 힘을 증명해야만 했지요. 그 증명에는 끝이 없습디다. 허니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고 결국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도 내 전생의 일이 떠올라 쓰게 웃었다. 당장의 양심을 외면하는 것이 큰 대의를 위해서라고 한두 번은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지만, 그걸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어코 끝까지 끌고 갔어도, 결국 그즈음에는 그 대의라는 것도 변질되어 있었을 거다.

“그래서 선(善)이나 정의 같은 것이, 뚜렷하게 설명할 수도 없고, 때로는 진부하게 느껴져도 끝내 답은 그거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

은 파파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이번에는 쓴웃음이 아니었다.

“치료약 외에 또 본문을 위해 준비한 게 있으신 게지요?”

“밑밥 깐 게 너무 티 났어?”

“홀홀, 또 쇤네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은 의술이야.”

“의술이라 하면?”

“이 일대는 하오문이 마약을 판매하기 위해서 의원들의 영업을 적극 방해했지?”

“그렇지요. 치료약을 판매할 때 의원이 진맥을 하고 처방을 해야 한다면 태양의원의 의원들을 차출하셔야 할 겝니다. 근처에서 데려오려고 해도 그간 본문이 의원들을 방해한 역사가 너무 오래되어 오지 않으려 할 테니까요.”

“그렇게 멀리까지 갈 생각 없어. 태양의원에서 의원들을 발령할 생각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자생이지.”

“도련님, 그러니까 이 일대에 의원들은 씨가 말랐―.”

“아니, 분명 있을걸? 하오문의 기녀들 중에 말이야. 특히 여인들을 대상으로 한 민간요법 같은 데 통달한 사람들. 기녀들이 아이를 낳기도 하니, 제대로 산파술을 전수받진 못했어도 경험이 충분한 사람들도 있을 거고.”

“그, 그야…… 그런 애들은 있습니다. 알음알음 약을 지어 자기들끼리 돌려쓰기도 하고, 산파 같은 경우 일선에서 물러난 퇴기들은 다들 그런 경험이 적잖이 있지요.”

“그래. 그런 사람들. 이미 경험이 있고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키워볼까 해.”

“그 애들을 말입니까?”

은 파파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될 거 같아?”

“솔직히 좀 모르겠습니다. 평생 그런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애들이 태반일 터인데…….”

“저도 했는데요!”

가만히 앉아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신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글을 알고는 있었지만, 저도 개방의 거지라 제대로 공부 같은 건 해본 적 없었어요. 그런데 스승님이 진짜 쉽게 잘 가르쳐주세요. 하오문의 기녀분들은 시구도 많이 외우지 않아요?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마침 잘 끼어들었다. 나는 칭찬의 의미로 신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전직 개방제자도 이렇게 말하는데, 하오문이 안 된다고 말하기엔 좀 자존심 상하지 않아?”

현건 같은 타입은 바른 길을 보여주면 알아서 따라오지만 은 파파와 같은 사람은 좀 다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그림자라 할지라도 본질적인 자존심을 긁는 데는 장사 없지.

“……뭐, 우리 애들이 그런 공부를 해본 적은 없어도 몸으로 하는 일에는 능한 편이지요.”

“게다가 무공도 익혔잖아. 신체에 대한 이해와 기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있으니까 습득이 어렵지 않을걸. 오히려 우리 의원들이 배우는 것도 많을 거야.”

“허면 장차 하오문의 의원으로 성장할 아이들과 태양의원 의원들 사이에 의술 교류까지 염두에 두신다는 뜻인데…… 여인에 대한 의술은 이미 아미파와 연계하기로 하신 게 아닙니까?”

맞다. 은 파파가 그때 아미승을 연기했었지.

그렇다면 그때 양진 스님과 한 약속을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군.

“그렇지. 좀 나중의 일이 되겠지만 두 문파 간의 의술교류도 태양의원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하게 되지 않을까? 두 문파 다 여인을 대상으로 한 의술에 익숙하지만 그 분야가 좀 다르긴 할 테니까.”

내가 여성의학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대충만 생각해봐도, 하오문은 피임이나 성병 등에 특화된 경험이 있을 거고 그건 아미파에게 없는 지식일 거다. 반대로 아미파는 하오문에게는 드문 지식과 경험이 있을 거고.

두 문파가 서로 교류한다면 그 과정에서 충분한 시너지가 나타날 거다.

우리는 중간에서 그 교류를 주관하면서 그들이 만드는 시너지에 숟가락을 얹는 거지.

“허면 이 과정에서 물자를 운송하는 일은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이번에도 둘째 도련님과 손을 잡으시려고요?”

“아니. 그건 부대비용이 쓸데없이 많이 들잖아.”

태양의원 초창기에 금왕표국과 손을 잡고, 정기 표행을 이용해 의원의 순회진료나 환자 운송 서비스를 운영했었다. 그 건은 일대에 금왕표국과 협력하는 소규모 표국 연합의 운송망이 기존에 운영되고 있었고 관련된 비용이나 지속성 등 내가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기에 가능했다.

“금왕표국이 여기 항주에는 은근 연결이 없지?”

“아무래도 장주가 이쪽을 피해 사업을 한 경향이 있지요.”

“그러면 금왕표국이랑 손을 잡아도 금왕표국도 또 새로 함께 사업을 할 지방 소규모 표국을 찾아야 하고, 체계를 잡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중간에 사고도 생기고…… 안정될 때까지 감당해야 하는 위험성이 너무 커.”

“그렇다면, 설마?”

“뭘 설마야. 아까부터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거지? 청수채에 연락해.”

항주에 오면서 이용했던(?) 장강수로칠십이채 중 하나인 청수채. 얼결에 내가 두목이 되어버렸는데, 그 상황이 좀 어이없고 아직도 당황스럽긴 하지만,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잘 써먹어야지.

“보니까 그 치들도 하오문에서 흘러나온 마약에 손을 대서 창고가 텅텅 비었더만. 본의는 아니지만 사람을 책임지게 됐으면 먹고사는 일 정도는 만들어줘야지.”

“기존에 회수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청룡채도 정리해 놓았고, 청수채를 위협할 만한 수채도 정리했으니 일 자체가 어렵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들에게 의료용으로 쓸 마약 운반을 시키실 생각이신 게 아닙니까?”

“거기에 의원도. 항주로 발령 나는 의원들도 그 배를 타고 움직이겠지. 그게 빠르잖아.”

“괜찮겠습니까요?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일이 되지 않을지 이 노친네는 걱정이 됩니다.”

“처음에 기강을 단단히 잡아야지.”

당장 내가 청수채 채주, 하아, 어쨌든 그 녀석들의 두목이니까.

항주로 올 때 그들이 내게 취한 태도를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걱정할 부분은 아닐 거 같긴 한데.

“그리 쉬이 생각하심 아니 됩니다. 힘에 굴복하는 이들은 속성이 교활합니다. 그 힘이 오랜 시간 자기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금세 간사한 생각을 하지요. 도련님이 떠나 있어도 똘똘 뭉쳐서 그 가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태양의원의 사람들과는 달리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군.”

“허나 관리만 된다면 그들을 이용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봅니다. 그쪽도 아기씨처럼 총관 같은 역할을 할 이를 앉혀둔다면 괜찮겠지요.”

“운송 관리에 더불어 그들을 무력으로 누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으로?”

“그렇지요.”

당장은 떠오르는 인선이 없었다. 창천이라면 힘으로 누르는 일이 가능하겠지만 그 녀석이 내 말을 순순히 들을 거 같진 않고, 당당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데다가 녀석도 정파 세가의 일원이라 수적들과 어울리는 걸 썩 내켜 하진 않을 거 같단 말이지.

“적당한 인선을 한번 찾아봐야겠군.”

“그래야지요. 저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초반에는 도련님이 조금 눌러만 주신다면 한동안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을 겝니다요.”

그 외의 세부사항에 대해서도, 실무를 맡을 하오문의 중견 관리직들을 불러 논의하는 시간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처음에는 회의적이던 이들도 얘기가 상세해질수록 ‘어쩌면, 가능할지도…….’라는 표정이 얼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좋아, 이렇게 갑시다. 태양의원과 함께 하오문이 새 시작을 해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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