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오래된 중견 기루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나름 고아한 맛을 자랑하던 항아루는 어쩐지 전날에 비해 빛이 바랜 모습이었다.
“스산하군요. 그런 일이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지만…….”
여기가 하오문의 본타라는 것을 모르는지 현건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날의 일로 항주 전체가 어수선했다. 하지만 문주와 주요 문파원들이 한날한시에 날아간 하오문의 본타만 할까. 그걸 모르는 현건은 그저 그런 일이 있었으니 기루에도 사람이 없겠거니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기루에 가서 해야 할 얘기입니까? 일대에 객잔이나 다원도 제법 있습니다만…….”
“누가 도사 아니랄까 봐. 그런 얘기 하려는 거 아니니까 가자고.”
괜히 쭈뼛거리는 현건을 두고 나는 먼저 발을 옮겼다. 신생은 새끼 거지 시절에 이곳을 몇 번 지나쳤다며 눈물을 닦은 얼굴로 따라붙었다.
“그냥 지나치기만 했어? 밥은 안 얻어먹고?”
“하오문 본타잖아요. 개방하고 사이가 안 좋아요. 저처럼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야 개별적으로는 안면이 있지만 어른들은 서로 찬바람이 불더라고요.”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아버지의 명으로 화산과 혈교의 다리가 되어준 하오문.
하오문은 사변이 있기 전 미리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발을 뺐다.
그러나 개방은, 그 전까진 아버지나 하오문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음에도 그에 대해 어떤 언급도 받지 못했다.
그 결과 개방은 당대 방주를 잃었고 수많은 거지들의 목숨 또한 무로 화(化)했다.
그랬기에 도개걸은 금가장이라면 치를 떨었고, 항주라는 같은 터전을 공유하면서도 하오문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
하지만 이제, 그 과거에 책임이 있는 이들은 다 죽었다.
하오문주는 주변의 생기를 빼앗는 마물이 되었고 주요 문파원들은 가장 근거리에 있다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생기를 빼앗겨 말라 비틀어졌으니―
스스로의 욕심과 과거에 발목이 잡혀 한 줌 핏물조차 남기지 못한 모습이, 자신들이 지은 죄를 그대로 돌려받은 거 같기도 하고.
“스승님, 그럼 여긴 왜 오신 거예요?”
“뒷정리를 해야지.”
수뇌부는 그대로 증발해버렸지만 이곳에는 일반 문도들이 남아 있다.
보통의 문파라면 가장 강력한 수뇌부가 증발한 것만으로 문파가 와해되겠지만, 하오문의 근본은 무공이 아니라 기녀와 점소이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결속력과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정보들.
그 기반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도 구심점이 되는 존재가 없다면 뿔뿔이 흩어지겠지.
무력이나 돈 같은 힘과 달리, 정보나 네트워크는 뜻 있는 누군가가 이를 꾸준히 관리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때 제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이대로 하오문이 와해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버지의 유산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일에 있어 하오문도 계속 이용할 필요가 있으니까.
십이월들과 한 약속도 있고 말이지.
“싸움이 있을까요?”
“글쎄.”
신생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내 옆에 섰다. 전날과는 달리 굳게 닫힌 문. 수뇌부가 전멸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이 안에는 못지않은 실력의 문도들이 있을 거다.
이들이 나를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이 나를 따르게 된다고 해도 그들을 이끌어나가는 건 또 별개의 일이고.
하오문은 일반 무림문파와도 다르고, 내가 지금껏 키워온 태양의원과도 다르니까.
이 문 앞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산재해있다.
나는 굳게 닫힌 문을 천천히 밀어 열었다. 신생, 그리고 망설이던 현건이 내 뒤를 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사실, 그 많은 일을 꼭 내가 해야 할 필요는 없지.
닫혀 있던 문을 열자, 익숙한 노인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나를 맞이했다.
“이럴 줄 알았어. 진짜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지, 은 파파? 분명 한 달은 푹 요양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홀홀. 다 알면서 하신 말씀 아니십니까?”
“내가 은 파파 때문에 제 명에 못 산다, 진짜.”
개방의 일을 보기 전까지 안가의 침상에 누워 있던 은 파파가 여기 왜 갑자기 나타났겠나.
내 행보를 예상하고 미리 와서 하오문을 정리해둔 거다.
내가 직접 나서느니 그쪽이 더 깔끔하기는 하지만 은 파파의 상태를 봐서 일부러 말을 안 한 거였는데. 거동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달려오다니. 하여간 저 늙은 그림자도 어지간히 워커홀릭이라니까.
“무리한 건 아니지?”
“무리는요. 그냥 와서 애들에게 도련님 오실 거니까 먼지 좀 털고 자리나 준비하라고 일러둔 게 다입니다요. 저뿐 아니라 나머지 십이월도 왔지요.”
“문제가 있었나?”
“조금. 문주가 그렇게 가고 우리 늙은 것들이 돌아와 고삐를 쥐려 하니 젊은 혈기에 날뛰던 애들이 조금 있었습니다만, 그 아이들도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흔들리는 배의 키를 쥘 선장이 필요하고, 그들이 나아갈 방향이 필요하다는 걸 모를 정도로 한심하게 키우진 않았습니다요.”
은 파파가 조곤조곤 말하며 우리를 상층으로 안내했다.
확실히 싸움의 흔적은 없었다. 일부 하오문도들이 계단과 복도마다 나란히 간격을 두고 시립한 채 내가 지나갈 때마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오문의 새 주인을 뵙습니다.”
“주인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거나 오체투지를 하는 등 완벽한 인정은 아니지만 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솔직히 그건 인정이라기보단 굴복이고. 난 그런 걸 원하진 않으니까.
“김진 공자,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오문이라니―.”
“그러게. 그렇게 됐네.”
현건에게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딱히 그럴 이유가 없기도 하고. 신생에게는 좀 자세히 설명해야겠지만 그건 나중에 둘이 있을 때 해도 되겠지.
“문주 그 아이가 쓰던 방입니다.”
“생각보다 검소하네.”
하오문주의 방이면 으레 휘황찬란하게 치장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내부는 단촐했다. 척 봐도 오랜 세월 길을 들이며 쓴 것 같은 물건들이 많았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됐다는 것이 참, 인간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래, 남은 하오문도들의 입장은 어때?”
“솔직히 혼란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도록 해왔던 일이지 않습니까. 갑자기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하니 당황스러운 모양입니다.”
하오문의 근간인 마약사업에 관한 얘기다.
항주는 저 멀리 남쪽에서 들어오는 마약 수입의 중심이고, 이 마약은 기루와 객잔, 그 외 여러 가지 향락업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약이 없어도 기루와 객잔 등을 운영할 수 있겠지만 기존에 그걸로 큰 재미를 보다가 관두라고 하면 분명 어렵게 느껴지겠지.
“그래도 분명 변화를 반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살아남은 중견 문도들 외에, 하급관리를 맡고 있는 어린 기녀나 점소이등이 말이지요.”
“아직 삶이 달라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 나이지.”
“한 아이가 제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더군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울 때 약을 먹이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냐고 말입니다.”
“잠깐만, 내가 뭘 잘못 들은 거 같은데. 아기가 우는데 약을? 마약을?”
“손님이 와 상대를 해야 하는데 우는 아이를 그냥 떼어놓고 갈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약을 먹이면 방긋방긋 웃다가 이내 잠이 들고, 그러다 영엉 깨어나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도 수두룩했지요.”
“……세상에.”
“그나마도 좀 나아진 겁니다. 전에는 낳기를 원해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나마 하오문이 규모가 커지고, 서로 손을 빌려주고, 아이를 낳은 기녀라는 정보를 감출 수 있게 되어 가능해진 일이지요.”
나는 침음을 삼켰다. 내 생각보다 끔찍한 상황들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런 일들까지 벌어지다니.
……홍령이 들었다면 입을 다물지 못했겠군.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이 할미는 그게 참으로 궁금합디다.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도련님이 내가 평생을 일궈둔 이곳을 어찌 바꿔버릴지, 그것만 보고 죽을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는데.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목숨을 함부로 내던진다 이거지?”
“홀홀,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그리 위험한 짓은 안 하겠습니다요.”
“그리 위험한 짓만 빼곤 다 하겠다는 거네.”
“아무렴야, 그림자가 먼저 드리워야 도련님의 발걸음이 가벼우시지 않겠습니까.”
내 귀에는 앞으로도 정말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의 일만 아니면 나서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에휴, 그래.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만큼은 피하겠다는 게 어디냐.
평생을 목숨을 내걸고 살아왔던 그림자고, 내가 전생에서 살았던 시간을 합쳐도 그 배에 가까운 삶을 산 노인이다.
살아나서 내 말만 착하게 듣는 할머니가 될 거라곤 애초에 꿈도 안 꿨다.
“우선 다 가져와.”
“무엇을 말입니까?”
“하오문이 취급하는 마약. 종류를 불문하고 다. 물량이 얼마나 들어오고 얼마나 소비되는지, 그리고 거래처에 대한 정보까지.”
은 파파가 고개를 끄덕였고 내가 부탁한 모든 것들이 내 앞에 준비되는 데는 고작 일 각이 소요되었다.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종류별로 소분된 마약이 내 앞에 펼쳐졌고 관련된 장부가 착착 쌓였다.
“신생, 장부 확인을 부탁한다.”
“네! 맡겨만 주세요!”
하오문의 장부는 그들이 쓰는 암호로 적혀 있었지만, 신생도 개방의 거지 시절 그러한 암호를 다루고 읽는 일에는 통달해 있었다. 은 파파가 몇 가지 규칙을 알려주자 신생은 의학 서적을 읽듯 장부를 쓱쓱 읽어나갔다.
신생이 장부의 내용을 요약해 알려주는 동안 나는 마약을 일일이 찍어 맛을 봤다.
“이거는 빼고, 이거는 괜찮네. 이거는 좀 애매한데…… 용량을 얼마나 정하느냐가 관건이겠군.”
마약은 아편을 기반으로 다른 약재와 섞거나, 고열 고압 등으로 변형을 시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생처럼 합성마약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선지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 분류한 건 태양의원에서 사도록 하지. 나머지는 폐기해.”
“약으로 쓸 만합니까?”
“마약은 기본적으로 약이야. 적정 용량을 지키면 마비산도 만들 수 있고 치료에도 쓰이지. 언제나 오용과 남용이 문제라고. 신생, 거래처 정보는?”
“저희가 쓰는 약이 꽤 많은데요? 게다가 엄청 싸요! 이걸 이 가격에 다 사들이면 장 의원님이 어깨춤을 추실걸요?”
하오문은 바다 너머 먼 곳에서 마약을 사들였다. 그런 곳에서 과연 마약만 생산할까? 장부에는 해당 거래처들이 수출 가능한 목록이 있었고 그중에는 중원의 의원에서 자주 쓰는 약재, 혹은 그 약재를 대체할 수 있는 약재들이 넘치도록 존재했다.
“몇 개 추려서 목록을 만들자. 무한에서 사들이는 것도 중간 다리를 너무 껴서 비싸게 사고 있는 것이 많으니까.”
“네! 그리고 무당에서 터무니없이 비싸게 팔거나, 아예 우리 쪽으로 안 팔려고 하는 것도 있고, 아! 무당에서 전매하는 걸 우리가 가져가서 싸게 팔면 무당에 꽤 큰 복수가 되지 않―.”
신생은 신이 나서 눈을 반짝이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 옆에는 현건이 앉아 있었다.
무당의 제자, 그것도 그냥 제자가 아니라 삼대제자 중 대제자가 말이지.
“……반하와 천남성은 무당산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것을 가져옵니다. 두루 쓰이기 때문에 항상 많은 양을 구매하지만 애초에 비싼 값에 사오는 편이라 무당의들에게 판매할 때도 그 이상 웃돈을 붙이기 어렵다 들었습니다. 그것을 구해 적정가격에 팔면 본문의 손해가 꽤 클 겁니다.”
잠깐만. 네가 그걸 왜 알려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