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씨앗을 갈무리한 후 나는 우선 은 파파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안가로 향했다.
다행히 은 파파의 몸은 빠르게 호전되고 있었다. 나는 몇 군데 침을 놓고 맥을 짚어본 후 며칠간 절대 요양할 것, 멋대로 행동하지 말 것 등의 조건을 걸고 다시 안가를 나섰다.
그다음 향한 곳은 도개걸이 거지들을 피신시킨 곳이었다. 벌써 거대한 솥에 물이 끓고 있었다.
“효과는 좀 어때?”
“아주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하셨나? 에이, 모르겠다. 편하게 해라. 이제 꽃을 풀 거다.”
도개걸이 품에서 아까 내가 건넸던 삼생화를 꺼내 끓는 솥에 부었다. 사람의 피부에 닿았던 것처럼, 삼생화는 물에 닿자 가루처럼 사르르 녹았다. 세 가지 꽃을 다 넣자 흰색에서 붉은색까지, 오묘한 빛을 풍기는 물이 되었는데, 그 순간 절로 코를 킁킁대게 하는 달콤한 향이 풍겼다.
“어라, 이 냄새는―.”
기억에 있는 향이었다. 항아의 피로 만들었던 마약, 도화의 향이 이와 비슷했다.
“이 거지들아! 와서 한 그릇씩 받아라!”
도개걸의 외침에 거동이 가능한 이들이 먼저 한 그릇씩 물을 받아 마셨다. 삼생화를 엷게 푼 물을 한 그릇 마셨을 뿐인데 그들의 낯은 순식간에 혈색이 돌았다.
“확실히 효과가 있군.”
그중 한 명을 붙잡아 맥을 짚었다. 은 파파처럼 노인도 아니고 마물과 꽤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회복이 빨랐다. 하루 이틀만 푹 쉬고 잘 먹으면 원래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상태였다.
“방주, 나 한 그릇만 더 먹으면 안 되오?”
“이익, 이건 내 거야! 놔!”
“아이고, 저 거지가 남의 약을 빼앗아가네!”
그렇게 모두들 약을 고루 배급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몇 이들은 갑자기 몸에 차오르는 힘에 취해 몇 그릇을 더 먹어야겠다고 달려들거나 갓 약을 배급받은 이들의 것을 빼앗으려 들었다.
“이 미친 거지새끼들아! 기껏 몸 낫게 해줬더니 한다는 짓이 강도짓이냐! 아직 줘야 할 놈들이 많은데 뭐 하는 짓들이야!”
그럴 때마다 도개걸이 눈을 형형히 빛내며 국자로 강도짓을 하는 놈들의 머리를 후려쳤다. 하지만 거지들의 숫자는 너무나 많았고 개중에는 무공을 익힌 거지도 있었다.
도개걸은 약이 끓는 솥을 지켜야 하고 동시에 제대로 배급이 지켜지는지도 감시해야 했다. 배급을 받은 거지가 도개걸의 앞에서 입과 속을 데어가며 팔팔 끓던 약을 단숨에 삼키고 나서야 다음 거지에게 순서가 돌아갔다. 자연 속도가 느려졌다.
“젠장, 이놈의 거지 놈들 거지근성 하고는. 돌아 버리겠네.”
“일을 그렇게 하니까 그렇지.”
“그러면 뭘 어찌해야 하냐? 너는 뭐 방법이 있냐?”
도개걸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맥을 짚으며 거지들의 상태가 회복되는 속도와 섭취량에 따른 회복력의 차이 등을 확인하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앉아 있던 한 거지에게 손짓했다.
“무한지부장, 이리 좀 와보세요.”
“왜 부르시오?”
삼생화를 다시 피워내기 전, 거지와 은 파파를 두고 내가 은 파파를 선택했다고 불같이 화를 냈던 무한지부장 윤모였다. 내가 다시 삼생화를 피워내고 개방에 건네준 과정을 도개걸에게 들은 건지 대놓고 내게 반감을 표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불편함을 감추진 않았다.
“아야! 방주! 왜 때려요!”
“표정 좀 풀어, 이눔아. 결과적으로 우리도 도움을 받았잖냐.”
“그치만 그 사이에도 뒈진 놈들이―.”
“모두를 살릴 순 없다. 그래도 저 금가 놈이 나름 현명한 선택을 했어. 애초에 저놈 없었으면, 그 사이에 뒈진 놈들이 뭐냐. 이 앞에 줄 선 이놈들이 다 뒈졌다.”
도개걸이 한결 풀어진 얼굴로 윤모를 설득했다. 그 사실 자체는 윤모도 인정하는지, 다소 불편하지만 좀 전보다는 좀 나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왜 부르셨수?”
“이중에서 괜찮은 거지들을 좀 추려주시죠. 무공도 좀 익혔고, 상태도 괜찮고, 그래도 좀 착실한 거지들로.”
“착실한 거지라니. 돼지가 꿀꿀이죽에 코 박고 죽을 소리를 하는구만.”
그러면서도 윤모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했다는 듯 앞에 모여든 거지들 중 몇 명을 골라냈다.
그냥 약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자들이 아니다. 한 번 약을 받아 몸을 회복했지만 약이 주는 활력을 더 맛보고 싶은 자들, 좀 더 빠른 회복을 원하는 자들. 그러나 남들이 받은 한 그릇을 빼앗는 것보단 앞에 서서 어떻게 도개걸에게 손바닥을 잘 비벼서라도 한 그릇을 더 얻어 볼까 하고 선 자들.
“다 골라냈는데. 뭘 시킬 거요?”
“저기 누워 있는 상태 안 좋은 거지들에게 약 먹이는 도우미를 시키죠. 열 명에게 약을 먹이고 돌아오면 한 그릇을 주는 걸로.”
“야! 누구 멋대로 그걸 정하냐? 모자라!”
“안 모자랍니다. 방주도 죽 좀 나눠줘 봤겠지만 이건 약이고, 약을 정확한 분량으로 나누는 건 내 전문이니까요.”
그러면서 나는 도개걸에게서 국자를 뺏어 쥐었다. 거지들의 맥을 짚으며 적정 분량을 가늠하던 게 이 때문이었다. 거지들뿐 아니라 피해를 입은 항주 사람들에게도 나눠줘야 하니까. 나중에 내가 쓸 때와 비교할 자료가 필요하기도 했고.
“이건 내가 맡을 테니, 방주는 가서 저 거지들 잘 움직이게 관리 좀 하시고. 개방이 은근 체계가 없네요. 그래도 구파일방 중 하나인데.”
“거지들에게 무슨 체계를 바라?”
도개걸이 코웃음을 치며 윤모와 함께 선별한 거지들을 데리고 약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방주가 직접 나서니 거지들도 더 이상 험한 짓을 하지 못했다. 선별된 거지들도 갑자기 책임이 주어졌다는 것에 당황하더니 그제야 서로 구역을 정하고 움직였다.
무당이나 소림 같은 곳은 장문인부터 삼대제자까지 체계가 있어서 개방도 그럴 줄 알았더니. 그치, 홍령?
……
……
……
맞다. 없지.
나는 잠시 씁쓸해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반가운 목소리가 저쪽에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승님!!!!!”
신생이었다. 저 멀리서 점처럼 보이던 신생이 빠르게 다가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흙투성이에, 얼굴은 눈물콧물이 범벅이 되어 영 지저분했다. 항아와 현건의 행방을 알려줄 때만 해도 좀 흐트러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엉망진창은 아니었는데.
“꼴이 이게 뭐냐. 의원은 항상 청결해야 한다고 했는데. 쯧쯧.”
나는 잠시 국자를 내려놓고 내 앞에 선 신생의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닦아주었다. 그러자 신생은 더 우아앙 하고 울어버렸다.
“아니, 왜 이래? 신생? 나 괜찮아. 착하지, 왜 울지?”
“신생 소협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금 의원이 이해해주시지요.”
뒤따라 온 것은 현건이었다. 신생처럼 흙투성이긴 했지만 신생에 비해서는 상태가 나았다. 일단 얼굴이 눈물콧물로 범벅이 되진 않았으니까.
“동굴이 터졌을 때 괜찮으려나 걱정했는데. 멀쩡한 걸 보니 역시 무당의 대제자답네.”
“과찬이십니다. 저희가 그 무너진 돌을 파내려고 며칠을 애를 썼는데, 이리 소리 소문도 없이 항주로 돌아온 금 의원님만 하겠습니까. 아니, 김진 공자라 불러야 할까요.”
“그건 내가 궁금한데. 어떻게 알았지?”
사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이 두 사람이 내 정체를 알아차릴 계기나 실마리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얘기를 해서 알았을 거고, 이 둘에게 얘기를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었겠나.
개방 방주 도개걸이 범인이겠지. 윤모에게도 얘기했고. 얘기를 안 한 사람이 없네.
“하여간 거지들 입 싼 건 알아줘야 해요. 기껏 신분을 위장한 보람이 없네.”
“방주를 너무 탓하진 마십시오. 그대가 죽었을 경우의 일도 염두에 두어야 했기에, 방주께선 그대의 제자에게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때 곁에 함께 있었을 뿐이고요.”
그렇게 얘길 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잖아.
“흐엉, 스승님…… 흐어엉…….”
거기에 제자는 흙과 눈물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겨우 닦아놨더니 아예 내 품에 안겨서 엉엉 오열을 하고 있고.
“그래, 나다. 나 멀쩡하니까 그만 울고.”
“흐엉헝, 흐엉― 배에서도, 흐엉, 저 모른 체하시고―.”
신생의 오열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적당한 때를 봐서 내가 정체를 밝히려고 했는데. 하필 제일 걱정될 때 내 정체를 알아서 더 서러워하기까지.
“금가 이놈이, 약을 나눠주겠다더니 왜 제자는 울리고 난리냐?”
“다 당신 때문 아닙니까. 왜 멋대로 애한테 내 정체는 알려줘 가지고.”
나와 도개걸은 서로를 못마땅하게 쏘아보았지만 그뿐이었다. 특히 도개걸은 혀를 차면서도 내게 다시 국자를 받아 얼마나 나눠줘야 하냐고 물었다.
이번 일로 적어도 도개걸의, 개방의 마음을 산 건 확실해 보였다.
“물을 것이 많습니다, 금 의원.”
현건이 때마침 화제를 돌렸다. 거지들도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더니, 한 그릇의 약을 더 얻어먹고 싶어 솔선수범 자원을 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빠르게 체계가 잡혔다. 도개걸에게 상태에 따른 약의 적정량도 알려주었으니 여기서는 더 할 일이 없다.
“일단 장소를 옮겨서 얘기하지. 따라와.”
도개걸에게는 정반합과 관련해서 다시 연락을 주겠다 말하고, 나는 신생, 그리고 현건과 함께 자리를 떴다.
가는 동안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공동 폭발 직후 현건은 바로 밖으로 몸을 날렸고, 낙석에 맞아 정신을 잃었지만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혈교의 무인들, 그러니까 령주와 홍령은 사라진 후였다고.
“상당한 내상을 입은 터라 혼자서는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신생과 도 방주가 밖에서부터 돌을 치우다 저를 발견했지요.”
도개걸은 공동이 폭발하는 소리에 서둘러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구멍 밑이 막혔음을 알아차리고 항주로 돌아가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쓸 만한 개방의 무인들을 다 끌고 간 상황이라 아까 약을 나눠줄 때 분위기가 그렇게 체계가 없었던 거다.
“제가 발견되었을 때가 이미 사흘째 가까이 되어서, 폭발의 파괴력을 감안했을 때 소협이 살아있을 거 같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그때 도 방주가 소협의 정체를 밝혔고, 신생은 시신이라도 확인해야겠다며 끝내 그 안을 파헤쳤지요.”
“그, 그런데 아무도, 아무것도 없어서, 흑, 흐윽―.”
다시 울음이 터졌다. 아이고, 아이를 여태 속인 데다가 최악의 상황에서 그 사실을 알게 한 죄가 있는지라(물론 그 상황에 밝힌 것은 내가 아니라 도개걸이었지만) 재차 미안하다고 하며 자리에 멈춰 신생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데 소협, 혹시 여기가 그 옮긴다는 장소입니까?”
내가 걸음을 멈추고 더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 신생을 달래고 있자 현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의아할 만도 하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항아루.
하오문의 본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