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급박한 상황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기이한 점이 많았던 순간이었다.
‘홍령’은 격렬한 싸움의 순간에도 한 귀퉁이에 마치 물건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혈교의 무인들은 현건을 막으면서도 근처에 멀뚱히 서 있는 ‘홍령’에게 그 여파가 닿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령주라 불린 이 또한 그랬다. 내 공세에 령주가 불리한 순간에 처할 때마다 ‘홍령’은 움찔거리긴 했지만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사람 같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인형에 가까웠달까.
내 뒤에서 벌벌 떨면서 보주를 움켜쥐고 울고 있던 항아와 대조되어 더욱더 인형 같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만도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그랬던 ‘홍령’이 갑자기 인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래게 다가와 나와 령주의 사이를 가로막은 걸 말한 게 아니다.
표정과 작은 움직임들, 령주를 걱정하고 내게 분노를 표하던 모습들.
그 모습들이 인간적이었고, 또한―
……내가 기억하는 홍령의 모습이었다.
“정신 차려어, 정신 차려, 흑, 흐윽―.”
항아의 목소리.
전처럼 괴이쩍은 소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말로 들렸다. 머리가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과 대화하듯 말과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혈교의 무인들이 자폭을 선택한 순간, 나는 무력하게 울고 있던 항아를 감싸고 내가 가진 모든 기를 폭발시켜 검막을 펼쳤다.
그거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고 봐야겠지.
그 기가 다한 순간 까무룩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력이 없어 눈도 뜨지 못한 채 드러누워 있긴 하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항아도 울 정도로 기력이 있는 걸 보면 우리가 살아남기는 했나 보군.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게 절대적으로 좋은 거라고 볼 수는 없지만―.
“하라부지이― 어떡해, 이 사람 죽어? 죽는 거야?”
“죽기는. 삼생화를 전부 썼으니 죽을 일은 없다. 그러니 너도 그만 엄살 피우고 일어나거라.”
핀잔을 주는 노인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엄살이라고? 하지만 그만한 폭발 속에서 내 몸이 멀쩡할 리가 없는데―
―멀쩡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맑은 하늘이 보였고, 달콤하고 상쾌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고, 꾀꼬리 같은 새의 노랫소리와 살랑대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온몸의 감각이 온전했다. 고통이 지나쳐 몸 스스로 통증을 차단한 상태거나 고통도 못 느낄 정도로 지친 상태가 아닐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벽력탄처럼 폭발하며 비산하는 살점들과 그 폭발에 무너지던 동굴이었다.
“여긴…….”
허나 이곳은 그 동굴이 아니었다. 동굴이 무너져 하늘이 드러났다고 해도 이 기암괴석과 낯선 동식물은 내가 있던 산의 식생이 아니었다.
아니, 중원 어딜 가도 이런 곳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제가 여기에 다시 왔다는 건, 제가 죽은 겁니까?”
이곳은 내가 심상 속 화산에서 돌아오기 전, 혼생화를 얻으러 갔던 그곳이었으니까.
“육신이 죽음을 맞이한다고 쉽사리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그리고 그때 만났던 노인, 화산의 사숙조들의 부탁을 받아 혼생화를 키웠고, 내게 그들의 혼과 넋을 받아 다시 살아야 할 만큼의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던 이가 항아와 함께 서 있었다. 노인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못마땅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신선의 땅이군요, 이곳은.”
“그래. 이곳은 도원향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보통 사람은 한 번 발을 들일 기회조차 없는 곳. 그런 곳에 너는 두 번이나 발을 들였구나.”
“둘 다 제 의지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노인은 그 또한 불만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허나 그 옆의 항아는 활짝 웃으며 내게 뛰어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응, 난 괜찮아. 고마워.”
나는 내게 뛰어든 항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어지간히 걱정을 했는지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래, 충분히 고마워하거라. 문이 열릴 때가 아니었음에도, 항아가 억지로 문을 열어 너를 그 위기 속에서 구해냈느니라.”
그랬을 거 같았다.
지금까지의 얘기로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항아는 원래부터 이곳 선계의 존재.
문이 열렸을 때 우연히 인세의 땅을 밟았다가 돌아가지 못했던 것을 아버지가 발견했고, 이후 하오문에 맡겨졌다가 인간의 욕심에 이용당했던 거겠지.
선계의 존재이기에 인세의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한 번 이곳의 땅을 밟았기에 그 말을 이해할 수는 있었던 걸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피가 마약으로 작용했던 거나 보주가 불로불사의 약 소리를 들었던 것이 이해가 간다.
그리고 그 보주는 항아의 발치 근처에서 반으로 쪼개진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원래 기이한 빛이 났는데 지금은 빛을 잃고 그냥 돌덩어리처럼 보였다.
“달 없는 밤에 열려야 할 문을 억지로 여느라 힘을 잃은 게다. 항아 혼자라면 저 정도로 힘을 쓸 필요는 없었겠지만, 네놈을 구하느라 천 년을 수련해 쌓은 공력을 써버린 게야. 쯧쯧.”
“잘못 없어! 날 구해줬어!”
“알았다, 알았어. 어쨌든 일어나거라. 천년만년 여기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지난번에는 넋으로 온 것이라 바깥의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았지만, 육신이 온 것은 얘기가 다르다. 미적거리다간 모든 것이 흙이 된 후에야 돌아가게 될 것이야.”
전생에 들었던 도낏자루 썩는 옛이야기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노인이 혀를 차곤 길을 안내하듯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네놈이 두 번이나 이곳에 온 것이 못마땅하긴 하나, 고마워해야 할 것은 제대로 감사를 표해야겠지. 항아를 돌아오게 해주어 고맙다.”
“딱히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만…….”
내가 항아를 돌려보낼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 건 아니었다. 항아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사실상 문이 있는 사당으로 항아를 데려간 건 내가 아니라 혈교의 령주였다. 제때가 아닌 상황에서 문을 연 것도 항아다.
“아니. 너라는 존재를 만났기에 항아의 명이 이곳으로 흐른 게다. 너 스스로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해도 말이지. 아무래도 네 명에는 그러한 길이 있는 모양이구나.”
“무슨 길 말씀이십니까?”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길 말이다.”
노인은 아까보단 풀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 스스로 생각해 보기에도 너의 운명이 그러한 길로 흐르지 않더냐? 바른 도(道)를 향해 가지 못하고 얽혀버리고 정체된 것들, 본래 존재했으나 인간의 그릇된 욕심이나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갈 곳을 잃고 사라져버린 것들, 자연히 그러해야 하나 그러지 못한 것들.”
노인의 말에 지난 일 년간의 나날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만난 사람들, 겪어온 일들, 드러난 진실.
“과거의 잘못을 밝히고 현재의 앙금을 풀며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너 스스로 걷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고 내 손을 거쳐 간 수없이 많은 환자들.
그들이 싸웠던 병마와 그 원인과 나와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이들의 얼굴.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일들이지만, 그 궤적은 분명 노인의 말처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지난번 혼생화를 얻으러 왔을 때, 너는 스스로 살고자 하는 자가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했지.”
“어떤 꿈을 갖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고, 그러다 지치고, 실수를 하고 쓰러졌다가도 또다시 살아가는 그런 삶 말입니다. 그 꿈이 얼마나 크든 작고 소박하고 보잘것없든, 아무리 깊은 좌절에 빠졌든, 그 실수로 하여금 죽음에 가까운 뼈저린 상실을 얻었든.”
“다시 나아가는, 그리하여 그냥 계속 살아가는 삶.”
“살고자 하는 이에게 삶이 있지, 그럼 누구에게 살 자격이 있겠습니까?”
맞다.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그때 네 녀석의 답이 탐탁잖다 여겼다. 썩 정답이라 여기진 않았지. 허나 네가 삶을 이어나가길 바라는 아이들이 있어 혼생화를 내어주었다. 헌데 이번에 항아를 돌려준 것을 보아하니, 그 애들의 선택이 옳았다 싶구나.”
“노 선생의 말씀도 틀린 바가 없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혼자 살아지는 게 아니더군요. 지금만 해도, 항아 덕분에 제가 살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너의 삶이 누군가와 함께할 때 가능하듯, 다른 누군가도 네가 함께이기에 다시 한번 살아질 수 있을 게다.”
발걸음과 함께 이어지는 선문답. 이 대화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노인의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지난번의 선문답 끝에는 다시 한번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에도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문답을 하는 건 아닐 거다.
“귀한 이를 돌려주었으니 우리도 네게 보답을 하려 한다. 항아에게 듣자 하니, 상당히 괴이쩍은 일이 있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항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했다. 혈교에 의해 과거 섬서사변과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졌고, 사람이 괴이한 마물이 되어 주변의 생기를 전부 빨아들였고, 그로 인해 처참한 일이 벌어졌다고.
“그렇군. 그런 일이 있었어. 허면 네 녀석이 원하는 것은 정해져 있겠구나.”
노인이 발을 멈췄다. 그가 발을 멈춘 곳 앞에는 일전에 보았던 나무와 꽃이 있었다. 매화를 닮은 가지에 핀 희고, 붉고, 연한 분홍빛을 띤 꽃.
삼생화다.
“이 꽃들은 그야말로 강력한 생기를 갖고 있지. 명이 다하지 않은 자라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주면 네가 항아를 돌려보내 준 것에 대한 보답이 되지 싶다.”
은 파파.
이게 있으면 은 파파를 살릴 수 있다.
“허나 네가 살려야 할 것이 오직 한 사람이 아닐 터.”
또한, 거지들을 살릴 수 있다.
이번 일로 큰 피해를 입은 거지들.
나를 보내주면서, 도개걸은 불로불사의 보주를 얻게 되면 제 휘하의 거지들도 챙겨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앞으로의 일에 있어서 정반합을, 개방을 손에 넣으려면 그들에게도 숨을 불어 넣어줘야 할 것이다.
“너의 과거는 이미 늙어 많은 힘을 잃었다. 함께 가기 위해서는 이 꽃을 전부 써야 할 게다. 허나 너의 옆에 설 이들은 아직 젊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 한 개의 꽃잎이면 열을 살릴 수 있을 거고, 한 줌의 꽃이면 그들 모두를 살릴 수 있을 거다.”
“……둘 중 하나만을 살릴 수 있다는 겁니까?”
“그래야 한다.”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은 파파에게 반을 쓰고, 나머지 반을 거지들에게 쓰는 식의 편법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막아버리듯 단호한 태도였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얻을 정보는 다 얻었다. 은 파파가 없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은 십이월들은 나를 따를 것이다. 지금 은 파파를 선택해 목숨을 보존한다 해도, 이미 나이가 많은 은 파파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내가 거지들을 선택한다면, 도개걸은 과거의 앙금 따위는 묻어버리고 나를 따를 것이다.
정반합의 회주 자리를 이어받는 일 또한 수월할 거다. ‘홍령’, 그리고 혈교를 쫓는 일에 있어 개방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문주와 핵심인물들을 모조리 잃은 하오문은 원래의 역량을 회복할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 개방 대신 하오문을 이용하는 일은 어려울 거다. 대안이 없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찰나여도 인세에서는 긴 시간이 흐를 게다. 너무 고민이 길어지면 어느 쪽도 손쓸 수 없게 될 게다.”
하지만, 은 파파인데.
내 할머니인데.
그런 과거의 일들이 있었음에도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한 사람인데.
“이제 그만 선택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