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231화 (231/350)

231화

홍령, 홍령?!

어디 갔어? 왜 대답이 없어? 뭐라고 말 좀 해봐!

나는 눈앞의 여인 ‘홍령’을 상대하면서 계속해서 홍령을 불렀다. 하지만 홍령은 대답이 없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윽―.”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데 소홀했다는 뜻은 아니다.

‘홍령’의 검은 익숙했다.

심상 속 화산에서 몇 번이고, 아니 몇천 번이고 상대했던 사숙들의 검과 똑같았다.

정교함과 언뜻언뜻 나오는 기교는 분명 보통이 아니었지만, 훌륭한 숙련도에 비해 검에 담긴 힘은 마치 어린아이의 것처럼 약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안 돼! 지금 네 몸은 완벽하지가―!”

령주가 비명을 지르며 ‘홍령’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기회였지만 아쉽게도 령주의 옷자락을 겨우 잘랐다.

“안 되겠어. 도망치자! 일단 도망쳐서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자! 후퇴한다! 길을 열어라! 목숨을 바쳐서라도 길을 열어!”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현건을 상대하던 무인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일부는 무모한 수를 쓰면서 현건을 묶어두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내게 달려들며 작은 호리병을 뜯어 입에 무언가를 털어 넣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여럿이서 현건 하나를 못 뚫어서 곤란을 겪고 있던 자들이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한 수 한 수가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빠르고 파괴적이었다. 자칫 한눈을 팔았다간 팔 하나가 날아갈 것 같았다.

“젠장, 가게 둘 거 같으냐!”

나는 내 몸의 기를 전부 끌어모아 검에 불어넣었다. 검 홍령이 갑자기 스며든 기의 파도에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이 가시기 전에 나는 내 앞을 가로막은 혈교의 무인들에게 뛰어들었다.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정신도 여력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눈앞의 ‘홍령’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미 한 번 기운을 그러모아 검 끝으로 보냈지만, 또 한 번 기운을 긁어모았다. 내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전과 같은 몸 상태로 돌아가지 않게 버티는 골격을 형성하는 기운인 생기까지 풀어 온몸으로 흘려보냈다.

싸움이 끝나면 끔찍한 고통을 감수해야겠지만―

이십사 수 매화검법 재생(再生)의 결(結).

모든 것을 베되 그 무엇도 베지 않는 검.

가시덤불처럼 빽빽한 매화나무 숲에서 홀로 춤을 추듯 자유롭고 또한 자연스러워, 지나간 자리가 그저 자연(自然)으로 남는 검.

도(道)의 극의를 추구하는 검.

사숙들이 옆에 있었다면 미쳤냔 소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검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몸의 감각이 극도로 깨어나야 했다.

“네가 이 검을 쓰려면 1갑자의 내공은 더 쌓아야 할 것이다. 자연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라. 허나 만약, 실로 급한 상황이 닥쳐 어쩔 수 없이 이 검을 써야 한다면, 한 가지만 기억하거라.”

무령 사숙은 결말의 검을 가르치며, 그 전까지 없던 진지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한낱 인간은 자연을 거스를 수 없다. 너는 그러한 자연이 되는 것이다.”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느려졌다.

단순히 시간을 느리다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시간이요, 동시에 공간이다. 내가 느리게 가는 것이다.

나를 향해 폭발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날아오던 검의 궤적에서 고개를 살짝 젖혀 빠져나간다.

순간 시간이 한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나는 어느새 내 목을 노리던 검에서 벗어났다. 그 옆에서 후속타를 노리던 혈교의 무인은 이미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그 다음은 세 명의 합격이다.

그들의 공격에서 빈 공간이 보인다.

나는 물이 빈 곳을 향해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을 흘린 후, 물이 흐르는 자리에 무성한 풀이 나듯 검을 휘둘렀다.

시간을 쥐었다가, 다시 풀어준다.

단 한 명의 옆구리를 갈대가 스친 것처럼 칼끝으로 긁었을 뿐인데 세 명의 합격은 균형이 무너져 앞선 혈교의 무인들을 찔렀다.

나는 다시 공간을 쥐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세 걸음이면 저 멀리 도망치고 있던 이들을 따라잡는다.

퍽.

몸 안에서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파박, 팍.

작은 것들이 터져나가고, 큰 것이 터져나간다.

내공으로 그 힘을 보완하던 장기들이 원래의 고통을 되찾으며 나는 소리다.

마물이 된 하오문주에게 기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이 고통이 조금은 덜했겠지만―

놓칠 수 없어!

“그 손 놔!”

나의 검이 ‘홍령’을 붙들고 도망치는 령주의 손목으로 향했다. 우선 두 사람을 떼어놓아야 한다.

붉은 점이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령주의 손은 여전히 ‘홍령’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허나 연결되는 팔목이 사라졌다. 검이 두 사람을 강제로 갈라놓은 거다.

“아, 안 돼!”

“도망쳐!”

‘홍령’이 제 손에 붙어 있는 령주의 잘린 손을 챙기곤 검을 뽑았다. 그리고 령주를 입구 쪽으로 밀어냈다. 내가 원하던 바다.

파박, 팍! 퍽!

온몸의 세포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더 큰 울림이 되었지만, 어쨌든 목표는 달성했―

“령주를, 우리의 ‘희망’을 구해라!”

“령주, 우리의 꿈을 부탁드립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숨통을 끊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혈교의 무인들이 나를 덮쳤다. 한 놈을 베었다. 허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음에도 놈의 의지는 잘리지 않았는지 어기적어기적 몇 걸음을 더 걸어와 나를 덮치며 무너졌다.

그것을 피하는 사이 다른 한 놈이 또 다른 놈과 함께 덤볐다. 불길한 징조가 느껴졌다. 검을 휘두르긴 했는데 나를 베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놈들의 공격은 내가 서 있는 이 좁디좁은 공동의 통로 벽을 향했다.

이곳을 무너뜨리려는 거다―

놈들을 상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바로 통로 쪽으로 내달렸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간만의 혹사에 지친 몸이 고통 속에서 앓던 시절을 떠올렸는지 그대로 무릎이 꺾였다.

“우리 모두의 희망을 위하여!”

혈교의 무인이 목이 갈라져라 크게 외쳤다. 그들의 몸에서 강력한 기의 충돌이 느껴졌다. 비슷한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다.

모용갑의 신체가 터져나갈 때.

“네놈, 죽어도 못 보낸다!!!”

그때는 하나였다. 피할 곳도 많았다. 내 앞을 막아선 사람도 있었다.

허나 지금 이곳엔 나를 둘러싼 적이 많았다. 몸을 피할 곳도, 내 앞을 막아줄 사람도 없었다.

“여기!”

안 돼!

어디선가 홍령의 비명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차가운 물이 내 몸을 적시고, 이내, 무인들의 몸이 벽력탄처럼 터져나가며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 * *

신생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일이 있고 삼 일이 지나서였다. 상대적으로 마물과 거리가 멀었고, 또한 어린 나이였기에 그나마 회복이 빨랐다. 무엇보다 신생에게는 빨리 기력을 회복해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이 끔찍한 일이 일어난 도시 어딘가에 스승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스승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아니면, 수많은 이들이 쓰러진 일이니까 의원인 스승이 나섰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스승을 도와야 한다.

자신은 금태양의 하나뿐인 제자니까.

그 생각 하나로 신생은 자신의 몸을 추스르고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김진 공자가, 우리 스승님이라고요?”

그런 소년을 기다리고 있던 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스승님이 그 사람들을 쫓아갔고, 산의 비동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게―.”

“무너졌더라고.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서 다시 절벽을 내려가 쫓아가 보니 입구까지 폭삭 무너졌더라.”

도개걸도 침통한 표정으로 사실을 전달했다.

지금의 침통한 표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실로 마음이 복잡했다. 그곳으로 달려가면서 금태양이 전달했던 정반합의 결성에 대한 비사, 은 파파가 정반합을 만들었고 그들이 활동자금으로 받았던 돈이 금가장의 돈이며, 금태양이 사실 금왕의 아들이 아니라 홍령의 아들이었다는 복잡한 사실들을 듣고 상황 판단을 하기도 전에, 정반합의 차기 회주로 내정되었던 녀석이 생사불명이 된 거다.

거기에 원래의 회주는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질 않나…….

“……말도 안 돼. 거짓말이죠. 나를 스승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나도 이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애초에 그깟 걸로 네놈이 다시 거지가 되려고나 하겠냐! 나도 뻥을 칠 거면 좀 더 그럴싸한 뻥을 치겠지, 이놈아!”

“아냐,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가보겠어요!”

신생은 의분에 차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정신이 들었을 뿐 그것이 몸 상태가 온전하다는 말은 아니었기에, 작은 아이의 발은 지면에 닿자마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을 뻔한 아이의 작은 몸을 받쳐 든 건 검고 주름진 손들이었다.

“네가 도련님의 제자라는 아이구나. 네가 젖동냥을 다닐 때 몇 번 전포거리에서 본 일이 있지.”

“누, 누구세요……?”

낯선 노인들의 모습에 신생이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신생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유순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 같았다.

“우리가 도련님을 따르겠다 마음먹었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너였지. 저 늙은 거지가 너를 어찌 키웠는지 우리가 이 눈과 귀로 다 보고 들었는데, 도련님이 너를 일 년도 안 되는 새에 이런 아이로 만든 걸 보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기회가 있겠다 싶었거든.”

괴팍해 보이는 노인이 신생의 몸을 제대로 부축해 일으켰다.

“우리는 네 스승, 금태양 도련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불민하게도 이제야 정신을 차렸지. 우리 또한 도련님의 안부가 걱정이 되어 가보려 하는데, 같이 갈 테냐?”

신생의 눈에 빛이 들었다. 아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요! 가겠어요! 스승님은 분명 도움이 필요하실 거예요!”

절대 죽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 신생은 그러한 맹신에 가까운 신념을 담아 외쳤다. 십이월들은 그런 아이의 맹목적인 믿음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믿는 이상 도련님은 살아계실 거다.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내 등에 업히거라.”

“네? 그치만 어르신들도 상태가―.”

십이월들의 정체를 대략 알고 있는 도개걸이 콧방귀를 뀌며 신생의 등을 떠밀었다.

“흥, 누가 누굴 걱정하냐? 어서 저 노친네들 등에 타고 다녀오기나 해라.”

“노친네라니. 도개걸 자네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쉰 소리들 하덜덜 말고. 남은 것들이 다 가나? 거리에 저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는 하오문 놈들은 어쩌고?”

“남의 문파 신경 쓸 여력이 있는 걸 보아하니 거지 동냥그릇은 아직 멀쩡한가벼?”

하오문주와 문주가 이끌었던 하오문의 주력이 한순간에 증발하듯 목숨을 잃은 탓에 지금 하오문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개방 또한 본타가 습격을 당한 상황이라 수습에 여념이 없었다.

“애들이 어떻게든 문도들을 도닥이고 있으니 우리야 어떻게든 될 거고. 거지들 사정이나 신경 쓰지.”

“당신들이 금태양을 따른다는 건, 하오문이 그놈 손에 들어간다는 뜻인가?”

도개걸은 계속 신경 쓰였던 것을 물었다. 금태양이 말했던 비사와 지금 상황을 엮어본다면 그렇게밖에 말이 되지 않았다. 결국, 금왕이 비밀리에 숨겼던 그의 과거와 유산이 금태양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다.

“……글쎄. 그 모든 건 도련님이 무사하실 때의 얘기겠지.”

등에 신생을 단단히 업은 십이월이 쓰게 웃으며 몸을 움직였다. 나머지 십이월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 사태를 겪고도 털고 일어나 순식간에 날랜 범처럼 자리에서 사라진 늙은이들을 보며 도개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젠장. 놈이 살아 있으면 난 또 어떡해야 하지? 정반합은? 거지놈들은? 으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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