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여긴 없어요!]
홍령이 쪼그라든 하오문주의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그곳엔 보주가 없었다.
침착하자. 생각해보는 거야.
혈교와 거래를 하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하오문주는 이런 괴이한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혈교는 하오문주에게 아버지를 살려준다고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과거 섬서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자들이 하오문주에게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해요!]
그래. 섬서에서처럼 사특한 일을 벌인 거다.
하오문주는 그 대가로 보주를 넘겼을 테니―
“김진 공자―.”
“신생?!”
“야, 이놈아! 더 누워 있으라니까 왜 일어나서 왔어! 아직 위험한 상황이면 어쩌려고!”
도개걸이 후다닥 뛰어왔고 나는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신생의 몸을 부축하는 척 맥을 짚었다.
……다행이다.
맥이 약하긴 하지만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다. 기가 충만한 곳에서 며칠 푹 요양을 하면 회복할 수 있는 수준.
“전할 말이 있, 어서.”
“뭐지? 전할 말?”
“당신의 동행, 예쁜 그 사람이 끌려갔어요. 건 공자가 따라갔고, 추종향을―.”
신생은 품에서 한 다발의 향을 꺼내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신생을 바닥에 앉혀주었다.
전하고자 하는 말은 다 알아 들었다.
향에 불을 붙이자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연기는 현건에게 뿌린 추종향을 따라간다.
나와 당당이 함께 만든 물건. 성능 하나는 확실하다.
[동행이면 항아를 얘기하는 거죠?! 항아를 데려갔다고요?]
상황이 다급해 항아는 전당포 건물에 그냥 두고 갔었다. 아무래도 양동작전에는 그 의도도 있었나 보군.
[항아는 그 자체로도 불로불사의 약이라고 했잖아요?! 그 피는 마약을 만드는 재료가 되고요! 항아도, 보주도 혈교의 손에 넘어간 거예요?!]
일 났군.
급한 마음과 달리 연기는 빠르게 퍼져나가지 않았다.
[아아, 이 연기가 가 닿을 즈음이면 도망치고도 남겠어요!]
“어어?! 야, 어디 가냐!”
“기다릴 시간 없어!”
나는 방법을 바꿨다. 대략적인 방향은 정해져 있으니 일단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도개걸도 내 뒤를 쫓아왔다.
“그거 추종향 아니냐?! 연기가 퍼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걸 언제 기다려! 가면서 방향만 따라갈 거야!”
나는 빠르게 연기가 흐르는 방향으로 달리다가, 연기가 방향을 바꾸면 즉각 그 방향으로 틀었다. 기존에 추종향을 쓰는 방식이 그 흔적을 따라가는 식이라면, 지금은 추종향을 일종의 나침반처럼 쓰는 거다.
정확성은 좀 떨어질진 모르겠지만 한참이나 벌어졌을 거리를 따라잡으려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순식간에 성을 벗어났다. 성문 밖에 형성된 마을도 지나쳤다. 관도를 벗어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험한 산속에 들어서자 연기가 짙어졌다. 반응하는 추종향이 짙게 남아 있다. 거리를 꽤나 따라잡은 거다.
“금태양! 그래서 아까 그 얘기는 대체 뭐냐?! 그 노파가 진짜 정반합의 회주라고?! 그 노인네가 누군데?!”
“당신도 알 텐데! 금가장에는 그 누구도 정체를 모르는 그림자가 있다는 걸!”
“―! 정반합의 돈줄이 금가장이라고?!”
나는 속도를 더욱 높이며 은 파파에게 들었던 얘기를 요약해 필요한 부분만 전달했다. 어차피 해야 할 얘기였고, 특히나 이런 상황에―
“―야, 야야! 그쪽 아니다, 이쪽이다!”
“뭐? 하지만 연기가 이쪽을―.”
“어차피 그 길이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어! 이쪽에 지름길이 있다, 따라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은 정보 전문가는 탁월한 결과물을 내놓곤 하니까.
도개걸은 연기의 방향과 정 반대에 있는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바다를 인접한 산치고는 산세가 높고 험했다. 고개 너머에서 거친 파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쯤 되는 산이면 새도 곤충도 많을 거 같은데 파도치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뭣보다 산이 가지고 있는 기가 무척 맑고 정순했다. 생기를 빨아들이는 괴이한 마물을 상대하고 온 직후라 몸이 이곳의 정순한 기를 받아들이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명당에 자리를 잡고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
“방주, 대체 여기에 뭐가 있지?”
보통 곳은 아닐 것이다. 허나 혈교 놈들의 본거지가 있을 거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대도시에 가까웠고, 사특한 자들의 본거지치곤 정기가 너무 맑았으니까.
“허억, 헉! 도가의 사당, 성지라 부르는 게 하나 있다!”
평소였다면 너른 평지를 달리듯 쉽게 휙휙 올라갔을 절벽이었지만, 우리 둘 다 생기를 꽤나 빨린 터라 속도가 느렸다. 특히 도개걸은 나이도 나이고, 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탓에 점점 올라가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금가 그놈이, 가끔 들렀지! 하오문의 고 이쁘장하니 수상한 사내놈도 여기서! 데려왔고!”
[도가의 사당! 은 파파가 그랬잖아요, 내가 거기 들렀다가 당신 아버지를 만났다고!]
장막이 걷힐수록 전혀 관계 없어 보이던 것들이 하나의 실로 연결되어 있음이 눈에 뚜렷하게 들어온다.
“헥, 헥! 나는, 나는 더 못가겠다. 저 위로 가라! 꼭대기에서 살펴보면, 그 비동으로 들어가는 구멍이 있다! 거기로 쑥 들어가! 나는, 아이고, 좀 쉬었다가 갈란다!”
도개걸이 올라가다 말고 지친 기색으로 절벽 한 귀퉁이 근처 튀어나온 곳에 몸을 기댔다. 얼굴이 검고 진땀을 흘리는데도 눈가가 건조했다. 더 이상 기를 썼다간 몸이 상할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도 이를 악물고 쫓아온 거겠지.
“맡겨둬!”
“아야! 너, 그 불로불사인지 뭔지 얻으면! 개방에도 좀 나눠줘야 한다! 알았냐!”
도개걸의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빠르게 절벽을 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향은 더 이상 피어오르지 않고 있었다. 불안했지만 이제 와 다시 내려가는 게 더 시간낭비였다.
그리고 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저기, 저거! 저게 도개걸이 말한 구멍 같아요!]
돌로 된 산꼭대기의 한 귀퉁이에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검고 어두컴컴한 구멍이 쑥 나 있었다. 사람 하나가 딱 들어갈 만한 크기. 그 앞에 서자 갑자기 향에서 연기가 훅 피어오르더니, 산 정상의 거친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구멍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좋아, 가자.”
나는 검을 뽑아든 채 그대로 구멍에 몸을 던졌다. 몸은 한없이 밑으로, 밑으로 추락했다.
어느 순간 물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의 파도 소리와는 다른, 돌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세찬 폭포 소리.
그리고 물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살벌함을 띈 소리가 들렸다.
기와 기가 부딪칠 때 나는 폭발음. 이를 이겨내지 못한 무기가 부서질 때 나는 소리와 겨우 버텨낸 질 좋은 검이 스산한 바람처럼 울어대는 굉음이 뒤섞였다.
툭.
마침내 발이 바닥에 닿았다. 물기가 가득한, 반구형의 공동이었다.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물이 폭포수처럼 벽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 물은 깊은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에는 작은 섬이 있었다. 내가 구멍을 타고 내려와 발 디딘 곳이 바로 그 섬이었다. 낡고 오래된 사당 하나가 겨우 자리 잡을 크기의 작은 섬.
“그만! 이곳을 무너뜨릴 생각이냐!”
“그대들을 막기 위해 그 수밖에 없다면, 그래야겠지!”
그리고 구멍에서 떨어질 때 들었던 싸움소리, 사람들의 말소리는 공동과 이어지는 통로 쪽에서 들려왔다.
[현건, 그 무당의 제자예요!]
홍령이 빠르게 이동해 저 앞에 있는 자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도개걸이 진짜 지름길로 안내한 게 맞긴 하군.
나도 멀리서 안력을 돋워 그쪽의 상태를 살폈다.
혈교로 보이는 자들에 가려져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현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빛이 거의 들지 않은 공동인데도 몸 여기저기가 번들거리는데, 저게 다 물일 리는 없을 거다. 그만큼 피를 흘렸다는 거다.
무릎도 반쯤 꺾였고 검 끝도 흔들렸다. 이렇게 멀리서도 나쁜 상태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라면 실제로는 더 심각하겠지.
“시간이 없군. 너희는 저자를 막아라! 나는 제를 올리겠다!”
“예! 령주!”
혈교의 무인들이 다시 현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령주라 불린 이는 누군가의 손목을 붙든 채 내가 있는 연못의 섬 쪽으로 다가왔다.
[어?]
“시, 싫어!”
귀에는 기괴하게 들리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목소리. 령주의 손에 붙들린 채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이는 항아였다.
무릎보다 깊은 물을 빠르게 헤치고 령주는 사당 앞에 도착했다. 그리곤 사당의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곤 그 앞에 항아를 강제로 무릎 꿇렸다.
“받아라. 너의 것이지?”
무릎 꿇은 항아의 손에 보주가 쥐여졌다. 보주를 쥔 항아의 얼굴이 잠시간 밝아졌지만, 이내 령주의 윽박지름에 울 듯 오만상을 지었다.
“열어, 네가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는 문을!”
“모, 몰라……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항아는 도리질을 쳤지만 령주는 부정 따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 양 어깨를 붙들고 마구 흔들었다.
“달이 없는 밤, 인세로 마실을 나왔다 길을 잃은 선인이여. 어서,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
목뼈가 없었다면 항아의 머리통은 진즉 분리되어 저 멀리 굴러갔을 것이다. 령주는 그만큼 강하게 항아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항아는 계속해서 모른다, 못 한다며 울 뿐이었다. 그 말이 령주에게 전해지진 않았겠지만.
“안 하겠다? 그렇게 못 하겠다 이건가? 도에 이르는 길을 포기하고 역천(逆天)을 택한 내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
령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허리춤에 찬 장식 같던 칼을 사납게 뽑아들었다.
―어?
“네 목숨이 경각에 달하고서도 그 문을 열지 않을지 두고 보자꾸나!”
그리고 그 칼이 항아의 목을 향해 내려친 순간, 나는 항아의 앞에 뛰어들어 그 검을 막아섰다.
“―네놈은?!”
령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기척을 극도로 죽이고 숨어 있었던 데다 현건이 저 앞에서 혈교의 무인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던 탓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쪽은 내가 맡는다! 그쪽은 알아서 처리해!”
현건을 향한 외침과 동시에 내 검이 령주의 빈틈을 노리며 찔러 들어갔다.
“이, 이놈!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와서, 윽!”
“령주!”
순식간에 령주의 빈틈을 파훼하며 상처를 입히자 현건과 대치 중이던 혈교의 무인들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들은 함부로 이쪽으로 오지 못했다.
역시 머리가 나쁘지 않아.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현건이 싸움의 방식을 바꿨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이쪽으로 뚫고 오려는 게 아니라, 혈교의 무인들을 철저히 묶어놓는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거다.
덕분에 나는 혈교 무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령주를 몰아붙일 수 있었다. 령주의 검은 화려하고 교묘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검법은 일류였지만 그걸 충분히 소화하지는 못했다.
정말 실력 있는 자가 익히고 충분한 수련을 거쳤다면, 상당한 힘을 소모한 나로서는 버거웠겠지만―
순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귀기 어린 살기가 나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 자리에서 발을 빼는 게 한 발만 늦었어도 귀 하나쯤은 날아갔을 것이다.
날붙이도 아니고, 수도(手刀)에 어린 검기 때문에.
내 귀 한 짝을 날려버릴 뻔한 수도의 주인, 가냘프고 하얀 손을 지닌 여인은 령주를 지키듯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안 돼, 홍령! 물러나! 아직 네 몸은 완벽하지 않―.”
“아니, 이제 괜찮아.”
“―뭐? 아니, 어떻게 말을……!”
홍령, 그렇게 불린 여인이 령주의 손에 든 검을 빼앗아 쥐었다.
“나는, 이제 온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