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령주, 하지만!”
“그만. 당신이 증거를 강하게 요구해서 겨우 데려왔어요. 부활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아직 몸 상태가 온전치 않은데 자꾸 무리시키지 마요. 또 한 번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 거래는 없었던 걸로 할 겁니다.”
령주라 불린 혈교 여인의 말에 하오문주가 이빨을 빠득 갈면서 뒤로 물러났다. 령주는 홍령에게 다시 검은 면사를 덮어씌웠다. 불면 꺼질까 쥐면 날아갈까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이제 모든 것을 확인했으니 시작해보지요.”
“……보주는 모든 것이 끝나면 주겠어요.”
“그러시든지요. 자, 어서 자리로.”
아까부터 혈교의 인사들이 붉은 진사를 뿌리며 이상한 진을 그리고 있었다. 하오문주는 그 진의 중심이 되는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령주는 진이 그려지는 모습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과연, 희대의 거부가 탄생한 땅답군요. 많이 쇠락했음에도 기운이 넘쳐흘러요. 아까워라. 모용 공자가 갑자기 비명에 가지만 않았어도 한번 제대로 시도해보는 건데.”
령주가 혀를 찼다.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은 신생과 현건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 또한 소림에서 있었던 비사에 대해 풍문을 들었다. 진정 모용세가의 장자와 혈교가 관련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는 사이 진이 완성됐다. 하오문도들이 주변을 봉쇄하듯 둘러쌌고 혈교도들이 각 위치에 서서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시작하도록 하지요.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될 겁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진언이 괴이한 울림이 되어 일대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눈에 보이는 종류의 것이었다면, 진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가 다시 바닥에 그려진 진을 타고 주변의 기운을 그러모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진의 가운데 선 하오문주에게 흘러들어 갔다.
“아아, 이 힘은― 이 힘으로 장주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어―!”
몸에 차오르는 힘을 느낀 하오문주의 표정이 격한 환희로 가득 찼다. 반면, 진의 밖에 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령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혈교도들에게 지시했다.
“보주를 챙겨라. 진이 완전히 활성화 되기 전 이곳을 벗어난다.”
“예!”
혈교도들이 하오문주 옆에 놓여 있던 보주 주머니를 챙겼다. 황홀감에 빠진 문주는 아랑곳 않았고, 문도들은 서로를 곁눈질했지만 누구 하나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모, 몸에 힘이…….”
“이상해. 무언가 이상하다. 문주, 정신 차리세요! 문주!”
몇몇 문도들이 기이함을 눈치챘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하오문주에게 가까운 순대로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고 쓰러졌다. 그 사이 령주는 보주와 항아를 챙긴 채 혈교도들과 함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진언을 외우는 이들마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누구도 진언을 외우지 않는데, 땅에서 마치 진언과 같은 소리의 울림이 괴이쩍게 울렸다.
[내가 저자들을 쫓겠다.]
[난, 난 남아볼게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봐야겠어요.]
[좋다. 쫓아가 할 수 있다면, 김진 공자의 일행이라도 빼돌려보겠다. 만약 그를 만난다면 내 행방을 그에게 알려다오.]
[이걸 발라요!]
신생이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현건의 소매를 적셨다.
[당 소협이 개발한 추종향이에요. 이거라면 이따 쫓아갈 수 있어요.]
[그러면 되겠군. 부디 몸조심하시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면 바로 몸을 빼고!]
현건은 그대로 사라지는 령주와 혈교도들을 쫓았다. 신생은 진의 중심을 향해 조금 더 다가갔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저 이상한 흐름을 끊을 수는 없을까? 그냥 둬서는 안 될 거 같은데―
울컥.
돌이라도 던져 진을 흐트러트려 볼까 했던 신생이 문득 가슴을 움켜잡고 무언가를 우웩 토해냈다. 여태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먹은 게 없어 투명한 위액만이 입가에 흘렀다. 한두 끼쯤 굶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아아, 아아아, 아니, 이상해, 이건― 이, 이게 뭐지?! 장주를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
그 순간 진의 중심에 서 있던 하오문주의 비명이 대기를 찢을 듯 터졌다.
문주의 고운 얼굴에는 두꺼운 핏줄이 불뚝불뚝 불거졌고, 팔은 부풀고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우두둑, 우두둑, 소리가 날 때마다 진의 중심에 가까이 서 있던 하오문도들이 말라비틀어졌다.
캬아아아악―!
어느 순간 하오문주의 입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기괴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허나 여전히 그녀는 진의 중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술법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도, 도망쳐야 하는데……!’
그리고 발을 떼지 못한 것은 신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두 다리에 힘이 없었다.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스승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스승, 님―’
신생의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 * *
푸욱―
다시 한 번 깊게 찔러 넣은 검에 사월의 몸이 축 늘어졌다.
“다, 당신―, 도련, 쿨럭―.”
복부를 두 번이나 꿰뚫리고도 말을 할 기력이 남았다니. 어떤 점에서는 놀랍다. 이미 반 각 전에 오른손과 왼팔 어깻죽지가 날아갔는데. 그 출혈 속에서도 여전히 말을 할 정신이 있을 줄은.
“내가 사람, 잘못 봤…….”
“그러게. 그렇게 됐네.”
나는 사월의 몸에서 검을 뽑아 검면에 묻은 피와 살점을 닦았다. 사월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여전히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 좀 무섭기도 했지만, 더 이상 반항을 하진 못하겠지.
거친 싸움이었다. 주변에는 부서진 사검의 파편들이 널려 있었고 바닥을 적신 피 중 내가 뿌린 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금세 나왔다.
[은 파파와 다른 십이월들의 맥을 짚어봤던 게 이런 결과로 나오는군요. 나이 든 그림자들, 그들이 어디가 안 좋고 어디가 약한지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사월의 맥을 짚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같은 생활을 한 그림자들이 같은 질환을 앓고 있으리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전성기와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가동범위와 유연성, 지속성과 힘, 내구도까지. 오랜 경험과 정신력, 의지, 거기에 내공도 이를 뒷받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월은 처음 시작부터 나에게 모든 것을 읽히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참으로 서러운 일이네요.]
홍령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사월이 다시 한번 피를 왈칵 토해냈다.
“아까 그, 그 모습만 보면, 쿨럭, 믿을 수 없―, 화 소저의 아이라니―.”
“내가 바로 돌변한 게 당황스러워?”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수까지는 참았다.
허나 세 번째 수부터는 참지 않았다.
“당신이 생각한 홍령의 아들은 차근차근, 당신을 설득하려 들었겠지. 그렇게 당신은 시간을 벌었을 거고.”
사월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사람.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도, 난 당신의 자식들을 함부로 내치거나 고통스럽게 하진 않았을 거야. 죗값을 치른다면 당신이 치르고, 그걸로 끝냈겠지.”
“……!”
“나를 아버지 아들이나, 홍령의 아이라는 틀에 맞춰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나 금태양을 봤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사월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다시는 눈을 감지 않았다.
“야, 야! 금가야! 큰일 났다!”
부릅뜬 채 죽음을 맞이한 이의 눈을 감겨주고 있는데, 뒤에 조무래기들을 맡겼던 도개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냐! 하오문주 고것이 일을 친 모양이다!”
“일? 무슨 일?”
“가면서 들어, 빨리!”
도개걸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일단 뛰기 시작했다. 사월을 상대하는 사이 하오문주가 전포거리로 향했고, 그곳에서 수상쩍은 인물, 혈교의 인사로 추측되는 자를 만나 수상한 진법을 펼쳤다는 얘기, 일대의 생기가 사라지고 하오문주는 괴이한 마물이 되었으며―
“신생이 거기 있었다고?!”
“넌 왜 애 관리를 안 해서 그런 위험한 데 가 있게 한 게냐! 너 자꾸 그러면 내가 다시 뺏어올 테다!”
“시끄럽고, 아직도 거기 있어?!”
“그쪽으로 향하는 걸 본 거지가 있는데 아직 찾지를 못했다!”
“그럼 전포거리로 가야지 왜 이 방향으로 가?! 반대잖아!”
“지금 그 마물이 개방 본타로 가고 있다! 보이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걸로도 모자라서 지나가는 길마다 사람이며 개새끼며 다 말라비틀어지고 있다고!”
도개걸의 눈에는 다급함 그 이상의 공포가 서려 있었다. 잘 보니까 두 손을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 두 발이 애써 달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느렸다. 자꾸만 뒤처졌다.
“방주, 당신이 신생에게 가!”
“뭬야?”
“그렇게 덜덜 떨어서 어느 세월에 간다고? 그 상태로 가봤자 방해야! 섬서사변의 기억을 떨치지 못할 거 같으면 내게 맡겨!”
순간 도개걸이 자리에 우뚝 서 덜덜 떠는 제 손을 보았다. 자기가 떨고 있다는 것도 인지를 못 했나?
“그때와 똑같은 거지? 섬서사변에서 있었던 일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잖아?”
“……그래.”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가보겠어. 그러니까, 내 제자를 부탁할게.”
도개걸의 어깨를 반대 방향으로 떠밀곤, 나는 다시 개방 본타 쪽을 향해 달렸다.
[이, 이건……! 맞아요, 그때도 이랬어……!]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변의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그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거리의 왁자지껄한 소리, 새 소리, 벌레 소리 따위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도 멈추고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전혀 그러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가운데 붉은빛의 가루가 대기 중에 스산하게 흩날렸다.
[호흡!]
안 그래도 이미 혈을 눌러놓았다.
도화인가? 도화보다는 색이 더 거무튀튀하게 붉었다. 하지만 어기적어기적 개방본타로 다가가다 풀썩 쓰러지고 있는 거지들을 보니 그 효과는 비슷한 듯했다.
[진짜, 대체 어느 정도의 중독성이어야 죽을 게 빤한 사지로 알아서 기어가게 되냐고요! 저 사람들 다 어떡해요?]
어떡하긴.
제일 문제가 되는 숙주를 해치워버리는 수밖엔.
나는 빠르게 마물의 형태가 된 하오문주에게 다가갔다. 인간의 형태를 잃은 그것이 몸에서 붉은 연무를 뿜어냈다.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주변의 기운을 긁어 마물에게 전달했다.
그래, 이 무형의 기운이 문제다. 수억 마리의 거머리 떼가 바글거리는 우물에 풍덩 빠진 것만 같다고.
마물은 내가 온 것을 눈치챈 듯했지만 내게 반응하진 않았다.
내 범위 안에 넣으려면 조금 더 다가가야 하는데―
한 발짝 더 다가가려는데 내 발치에 단검 세 자루가 파바박 소리를 내며 바닥에 틀어박혔다.
“안 됩니다, 물러나십시오!”
“은 파파?!”
아까 나를 먼저 보냈던 은 파파. 어딜 갔나 했더니 먼저 여기 와 있었나?
“잘됐다, 빨리 저 마물을 처리하자. 한시가 급해!”
“아뇨, 돌아가십시다. 저것은 이 쇤네가 손을 보겠습니다.”
“혼자서? 불가능해!”
“불가능해도 해냅니다. 그것이 그림자의 일입니다.”
그때 마물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부탁입니다. 부디 끼어들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