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내가 무어라 말을 할 사이도 없이 사월이 쏜살처럼 내게 쇄도해 들어왔다. 두 자루의 사검이 내 목을 노리고 날아왔고 그 검을 피하자 하늘로 던져졌던 사검이 내 정수리가 있던 곳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왼, 아니 오른, 아뇨 아래!]
홍령이 수를 읽어주는 게 한 수 느릴 정도로 사월의 몸놀림은 빨랐다. 딴 생각 할 틈이나 그녀를 설득할 말을 할 여유도 없었다.
서걱―
[뒤! 아앗!]
이번에도 한 발 느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날아온 사검이 전완을 긁고 지나갔다. 상처를 내며 부서진 검의 파편이 피에 젖어 몸집을 불리며 상처를 파고들었다.
[갑자기 뒤에서 검이 날아왔다니, 설마, 이기어검?!]
아냐.
사검을 회수한 사월의 손에서 흐릿한 선이 반짝거렸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은사. 저걸로 검을 조종하는 걸 테다.
“허튼 생각은 마십시오. 당신은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적어도, 항아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 * *
“이번엔 진짜예요. 스승님은 여기 계실 거라고요.”
“그 말도 벌써 다섯 번째인데…….”
현건이 뭐라고 하든 말든 신생은 뿔 난 황소처럼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개방에서 정보를 얻는 것에 실패했지만, 신생은 금태양이 항주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할 말이 없었지만, 감이 그랬다. 금태양의 유일한 제자로서의 감!
“스승님은 현명한 분이니까 개방의 추적이 붙을 걸 알았을 거예요. 요란함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셨겠죠. 개방도, 하오문도 모르게요. 하지만 다른 건 다 숨겨도 스승님의 착한 마음씨는 못 숨겨요. 평소에도 자기 자신을 위해 돈 한 푼 허투루 쓰는 분이 아닌데, 신분을 위장했다고 저 비싼 부촌에 머물고 있을 리 없다고요. 오히려 그 돈을 이런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쓰면 썼지.”
그렇게 말하며 신생은 자기가 아는 항주에서 가장 허름한 곳, 전포 거리에 발을 들였다.
과거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유흥가였다고 하지만, 기루와 객잔, 도박판과 전당포들이 전부 지금 하오문이 있는 항아루 일대로 옮겨가 지금은 갈 곳 없는 빈민들이 밤이슬과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기어들어 오는 곳이다.
“……정말 험한 곳이군.”
신발 바닥에 질퍽하게 밟히는, 아마도 한때 사람의 신체 일부였을 것을 밟은 현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신이 수습조차 되지 않는 곳이라니. 같은 대도시라 하지만 그래도 도가문파인 무당의 관리를 받는 양양에는 이 정도로 심각한 곳은 없었기에 현건의 표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여긴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곳에도 발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흘러드는 곳이니까요. 이 사람들이 뭐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고요. 바닥에도 바닥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바닥에도 바닥의 경쟁이 있다고 해야 하나.”
한때 이런 오물더미에서 태어나, 밑바닥에서는 그래도 상류계급인 개방 방주의 제자로 자란 신생이 씁쓸한 눈으로 전포 거리를 훑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스승 금태양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헌데 너는 왜 그렇게 스승을 찾는 거지. 태양의원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내가 그걸 무당의 제자에게 가르쳐줄 거 같아요?”
“……미안하다. 괜한 걸 물었군.”
현건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무당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현건은 비에 쫄딱 맞은 생쥐처럼 굴곤 했다. 신생은 그런 현건의 태도가 짜증스러웠지만, 무슨 사정이 있기에 무당의 촉망받는 대제자가 저러나 싶어 괜히 마음이 쓰였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하다 보니 정이 붙어서 그런지.
“흥,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스승님이 있어야 더 잘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 금태양이라면 대답을 해주었을 거다. 신생은 제 스승의 착한 마음씨를 떠올렸다. 자기는 금태양의 제자니까 이 정도 아량은 베풀어도 된다. 별일도 아닌데 사람을 저렇게 어깨 축 처지게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이번에 그쪽에서 태양의원 가맹으로 갈아탄 의원님들이 스승님을 직접 뵙고 싶다고들 하더라고요. 환자들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요. 직접 치료받진 않아도, 스승님이 의원에 계신 거랑 아닌 거랑 뭐가 다른가 봐요. 제자가 되고 싶다고 찾아오는 의원 지망생도 많고, 덕분에 병이 나았다며 꼭 얼굴 뵙고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사실 현건이 마음에 쓰여서 얘기를 했다기보단, 그냥 스승을 자랑하고 싶은 제자의 마음이라 보는 게 맞았다. 그런 순간순간 금태양의 빈자리를 느낄 때, 스승이 얼마나 큰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의술 실력만으로는 태양의원에 있는 의원들도 그렇게 뒤처지진 않는다. 개별 분야에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협업을 하도록 구조를 갖춰놨기에, 특정 분야에서는 금태양에 비견되거나 혹은 더 뛰어날지도 모르는 인재들이 많았다. 당장 의약당의 장 의원은 금태양이 인정하는 제약의 달인이다.
사람을 뽑을 때 성품을 특히 중요하게 보았으니 환자를 살피는 세심함이나 친절함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체계가 잘 잡혀 있어 분원과 본원 간의 교류협력도 수월하다. 그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총관 금리의 수완은 또 어찌나 대단한가.
그럼에도 그 모든 일에 있어 사람들은 금태양을 찾는다.
금리 또한 중요한 일은 금태양과 얼굴을 맞대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며 미뤄놓고 있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신생의 말은 자랑이었지만 동시에 금태양의 긴 부재로 인한 어떠한 불안을 담고 있었다.
그 말이 현건이 아닌 다른 무당 인사의 귀에 들어갔다면 무당은 당장 그 불안을 흔들려 들었을 거다.
“스승님은요, 그냥 그 자리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찾는 거예요.”
“구심점이자 기둥이라는 말이군.”
“맞아요! 그거예요!”
“어떤 느낌인지 안다. 무당에도 한때 그런 분이 계셨지.”
“계셨?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우화등선?”
“아니. 지금은 면벽동에 들어가 참선 중이시다. 그분이 계셨다면 무당이 결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현건이 앞서가던 신생의 어깨를 붙잡아 멈췄다.
“뭐예요? 왜 그래요?”
“분위기가 이상하다.”
“분위기요? ……별로 이상한 거 없는 거 같은데.”
신생이 기감을 돋워 주변을 훑었지만 크게 다른 건 느껴지지 않았다. 좀 습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있기야 했지만 빈민가라면 흔히 느껴지는 음습함이다. 과거의 충격으로 무공을 잊은 신생이라면 모를까, 금태양을 만나 심신의 안정을 찾고 다시 제 실력을 발휘하게 된 신생이 두려워할 일은 아니었다.
허나 현건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사특한 기운…… 뛰어난 무림인이라도 도가나 불가의 내공심법을 익힌 무인이 아니라면 이런 귀기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귀기(鬼氣)요?”
“그래. 네 스승인 금 의원도 처음 만났을 때 주변에 귀기가 도사리고 있더군. 그랬기에 사숙조께서 그를 경계하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뭐야, 그럼 사이비(似而非)네요. 우리 스승님이 어딜 봐서 귀신 들린 사람이에요?”
“나도 그를 지켜보면서 도사린 귀기와 달리 사람이 그릇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저 안은 지금 마교나 배교 같은 사교도의 본산과 같은 수준이다.”
자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믿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현건의 표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여태 겪어본바, 이런 걸로 장난을 칠 사람도 아니고.
“……그럴수록 더 가봐야겠어요. 스승님이 저기 계실 수도 있잖아요?”
“안 된다. 그대가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그대 혼자서는 어찌할 도리가―.”
신생을 말리던 현건이 갑자기 신생을 잡은 손을 놓고 훌쩍 앞으로 달려갔다. 안 된다고 사람을 잡더니 갑자기 혼자 왜 저래?! 당황한 신생도 현건의 뒤를 따라붙었다. 현건은 몇 골목을 빠르게 주파하더니, 이내 건물의 벽을 타고 올라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삼 층 건물의 지붕에 올라타 몸을 낮췄다.
“뭐예요? 가지 말라더니 왜 먼저 나가고 그래요?!”
“쉿. 소리를 죽이게. 저기 저 여인이 보이나?”
현건이 저 멀리, 단련된 안력으로나마 겨우 얼굴이 구분이 가능한 거리에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적잖은 사람이 한데 모여 있었지만 현건이 누굴 지칭하는지 신생은 단번에 알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입술마저 무슨 칠을 했는지 검은색을 띠는 수상한 차림새의 여인이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죠? 전포거리에 있을 만한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은 모르겠다. 하지만 저 여인을 본 적 있다. 그대도 스승을 따라 양양에 왔을 때를 기억하겠지?”
“어떻게 그걸 기억 못 하겠어요? 무당에서 우리보고 고독을 뿌린 거 아니냐고 의심도 하고, 그때 생각하면 진짜, 어휴.”
“그 일은 미안하다. 허나 우리 또한 그 일의 배후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캤을 때, 저 여인을 봤다.”
“잠깐만요. 스승님이 그랬는데. 그때 일은 혈교의 소행일 거라고―.”
“―금 의원이 그걸 어떻게?!”
“스승님은 정보에 있어서도 탁월하시거든요. 그런데 그 말은, 저 여자가 혈교의?”
“아마도 그럴 거다. 저자들이 여인을 따르듯 서 있는 걸 보니 상당한 위치에 있는 모양이군.”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여기 있는 걸까요?”
현건은 표정을 굳힌 채 귀를 기울였다. 이 상태에서 더 다가갔다간 상대에게 들킬 가능성이 농후했다. 안전거리는 여기까지다. 현건의 행동을 본 신생도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누굴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상대가 왔군.]
[어? 저 사람 알아요. 하오문주인데?]
항주에서 자란 신생이 하오문주와 하오문 유력인사들의 얼굴을 알아봤다. 귀를 바짝 기울이자 그들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이 말한 건 다 준비했어요. 보주도 가져왔고.”
“보주의 주인은?”
“끌고 와.”
하오문주의 말에 문도들이 빈집이 된 금 씨 전당포의 문을 뜯고 안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반항 없이 항아를 손에 넣기 위해 시도한 양동작전이었다. 하오문주의 계획대로 십이월은 전당포를 비웠고, 문도들이 항아를 붙잡고 아래로 내려왔다.
“자, 당신이 요청한 대로 항아도 데려왔어요. ……그 애를 데리고 가서 무얼 할 생각이지요?”
“그건 그대가 알 필요 없지. 어차피 문주 그대에게도 그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게 아니었나? 그리고 그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건 돈이 아니라―.”
“……그래요. 장주를 돌려받는 것이죠. 그까짓, 장주의 핏줄도 아닌 놈을 살리는 게 아니라.”
하오문주의 눈은 불이 붙은 듯 이글거렸다. 잠시의 망설임마저도 그 불길에 의해 활활 타 사라졌다.
“증거는 어디 있죠? 장주를 되살릴 수 있다는 증거요. 오늘 보여준다고 했잖아요?”
“안 그래도 보여주려고 했어. 나와요.”
여인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인영이 스윽 걸음을 옮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면사를 뒤집어써 정체를 가늠할 수 없던 이가 그 면사를 벗었다.
하오문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이군요. 정말, 말은 들었지만 진짜 이 사람을 살려냈을 줄은…… 그래요, 세월이 지났지만 어찌 이 얼굴을 잊을 수 있겠어요. 장주를 홀려 우리를 끊어내게 만들었던, 그 마녀 같던 사람을……!”
저도 모르게 하오문주가 손을 번쩍 들었다.
“화 소저! 난, 나는 당신을……!”
뺨이라도 치려 했을까.
허나 면사를 쓰고 있던 이가 그 손을 덥썩 잡았다. 마치 십 대의 그것처럼 매끄러운 손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주름진 하오문주의 손과 팽팽히 맞섰다.
“홍령, 그만둬요. 무리하지 마.”
정체불명의 여인이 두 손을 힘주어 풀어냈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벌겋게 물든 홍령의 손을 살폈다.
“문주도 그만 심기를 가라앉혀요. 당신에게 중요한 건 죽은 이를 되살릴 수 있다는 증거지, 그 증거가 되살아난 화홍령이라는 게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