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좌수검이 내 친아버지라, 아직도 좀 실감이 안 나긴 하지만.
“이런 과거를 안다고 해서 도개걸이 내가 회주가 되는 걸 인정할 거 같진 않아. 그자에게 나는 어디까지나 아버지 아들이고, 거기에 제자를 빼앗아간 놈이기도 하니까.”
“클클, 그 부분은 솔직히 좀 놀랐습디다. 도 방주가 아주 귀애하던 아이였는데 말이지요.”
“애를 귀애하는데 그따위로 키워? 아니, 이건 지금 얘기할 게 아니고. 내 출생의 비밀이며, 내가 사실 피해자였다는 걸 알게 된다 해도, 도개걸은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의 돈으로 정반합 활동을 했다는 사실부터 치를 떨걸? 그 정도면 정반합을 때려치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고작 그까짓 일로 정반합을 때려치운 자는 없다고 말한 도개걸이지만, 정반합의 시작부터가 그런 식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
“막말로, 가해자의 알량한 자비에 기댄 꼴이잖아. 알고 한 것도 아니고. 거지들이 또 자존심은 엄청 세지 않아?”
“맞는 말씀입니다. 밥은 빌어먹어도 그깟 동정을 빌어먹느니 굶어 죽겠다는 위인들이지요.”
“그렇다고 계속 비밀로 할 수도 없고. 좌수검에게 얘기하는데 개방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그렇게 나중에 뒷말이 들어가느니 내가 밝히는 게 차라리 낫긴 한데…….”
아까까진 죽상을 하고 있던 은 파파가 다시 표정을 회복했다. 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 좀 보라지.
“골치 아픈 걸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나한테 다 떠넘기니까, 아주 재밌어 죽겠나 봐?”
“아이구야, 아무리 재밌어도 그리 함부로 죽을 수는 없지요. 이제 이 노구의 생사여탈은 도련님께 달리지 않았습니까?”
“농담까지. 어휴, 내가 못 산다 못 살아.”
“아니 됩니다. 이 노구 목을 거두실 때까지는 팔팔하게 사셔야지요. 암요, 아직 젊으신데.”
“그런 질 나쁜 농담은 그만하고. 어쨌든 그들을 설득해서 내 품으로 끌어들이는 건 나의 역량이라는 거군. 그렇다면, 하오문은?”
하오문주의 태도로 봤을 때 그들은 정반합보다 까다롭다.
내가 아버지의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 하오문을 손에 넣는 게 뭐야, 지금까지 하오문의 고객으로서 정보를 얻던 것도 더 이상은 불가능하게 될 거다.
[에이, 그래도 그 정도까지 할까요? 당신은 하오문의 고객이잖아요. 당신 없으면 북촌에 낸 하오문 지점도 문 닫아야 할 텐데. 사업적으로 손해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경제적 인간’처럼 철저히 이성적인 존재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사람은, 철저히 이성적이어야 하는 순간에조차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전생에서 어릴 때부터 경영자 교육을 받고, 해외 MBA 따고, CEO로 닳고 닳은 경험을 가진 자들도 똑같았다.
자신들의 취향과 입맛에 맞는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린 걸 굉장히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우겨대곤 했지.
결국은 자기 좋을 대로, 자기 맘이 불편하지 않은 걸 선택한 거에 불과한 건데 말이야.
[당신 말을 듣고 보니 그러네요. 북촌에서 하오문을 철수하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기들 정보망으로 태양의원에 대한 악독한 소문을 조장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어요.]
하오문주의,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차치하더라도, 그들은 나름 정보문파로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니까.
본인들이 몰랐던 사실에 뒤통수를 맞을 뻔했다는 걸 알게 되면 누구라도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지.
홍령의 말처럼 흑색선전을 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버지의 친자라고 우겨대는 건 위험이 너무 커. 그 사람이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겠냐만은, 그렇게까지 해서 하오문을 손에 넣고 싶진 않아. 지금처럼 필요할 때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그들이 나를 함부로 적대하지 않을 정도로만 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이상적이겠지요. 허나 쇤네는, 적어도 하오문주가 갖고 있는 보주만큼은 도련님이 손에 넣으셨으면 합니다.”
[보주라면 그거죠? 하오문이 경매에 내놓는다는 거요. 항아가 원래 갖고 있었고, 불로불사의 약이라 소문났던 그거.]
그렇지. 충격적인 사실들의 연속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네.
“원래 항아와 보주를 발견한 것은 장주입니다. 장주가 화 소저를 만났던 그곳, 도가의 성지 부근에서 항아를 발견했지요. 허나 장주의 항주 행은 비밀인지라 잠시 하오문주에게 그 아이를 맡겼는데, 장주와 하오문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하오문이 항아를 그렇게 취급하게 된 겝니다.”
“중독적인 마약의 원재료로 말이지?”
“예. 거기에 보주는, 그것을 가지고 장주와 문주가 참으로 치열하게 다투었지요. 보주의 힘을 알게 된 후, 장주는 그걸 도련님께 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로불사의 약이 내게 오는 일은 없었다.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하오문주는 당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오문주는, 장주가 쓸 약이라면 기꺼이 주겠다 했습니다. 그렇게 속이고 도련님께 약을 드릴 수도 있었겠지만, 장주도 고집이 강했어요. 어쩌면 속이고 약을 받았을 때 하오문이 반발하는 일에 금가장이 휩쓸릴까, 혹은 장주의 과거가 드러날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결국, 지금에 이른 겁니다.”
그런 과거가 있었군.
다른 건 몰라도 보주만큼은 내가 손에 넣기를 바라는 이유를 알았다.
“숨겨놓은 얘기, 또 찾았네. 앞으로 이런 거 나올 때마다 꿀밤 한 대씩이야. 지금까지 벌써 두 대 적립했어.”
솔직히 하오문이 그렇게 탐나진 않는다. 하지만 불로불사의 약은 얘기가 좀 다르다.
더 이상 그런 약에 의존해야 할 만큼 몸이 약하지 않지만, 내공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지.
거기에 내 본업은 어쨌거나 의원이다.
언젠가 그런 환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내 의술로는 닿을 수 없는 지경에 빠져버린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고 싶은 사람.
의원이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서도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아버지에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주는 손에 넣는 쪽으로 가자. 경매가 열린다고 했지? 그곳에서 낙찰을 받는 것도 방법일 거고. 은 파파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기를 바라는 거 같지만 말이야.”
“방법이야 도련님께 달린 일이지요. 더 이상은 쇤네의 욕심대로 도련님을 휘두르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은근히 압박 주는 거 봐. 뭐, 그건 천천히 생각하자고. 아직 경매가 열린다는 보름까진 좀 남았잖아?”
남은 건 십이월들이다.
“다들 들을 건 다 들으신 듯하니, 얘기 좀 해보세요. 내가 아버지 아들이 아니어도 여러분은 괜찮으신 겁니까?”
내가 은 파파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십이월들은 기척을 감춘 채 숨어 있었다. 은 파파의 얘기에 내가 놀랄 때 그들도 놀라 기척을 흘렸고, 몇 명은 충격을 받았는지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은 파파가 내버려 두기에 나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도 사실을 알아야 내 그림자로서 수월히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우린 괜찮네. 그렇다 한들 우리가 원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닐 테니. 아니, 오히려 더 안심이라고 볼 수 있겠지.”
“솔직히 장주 아들이라고 하기엔 심성이 너무 고왔어. 그 근본을 알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놓이네.”
한 명씩 자기의 소감을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긍정적인 반응인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뭐 이제 와 마음을 달리 먹을 거냐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어 보였다.
“두 명이 없는데. 그 사람들은요?”
은 파파 2가 없었고, 또 교태가 흐르는 말씨를 가진 노인이 없었다.
“하나는 듣다가 숨 좀 돌리겠다며 나갔고, 좀 오래 안 돌아오기에 다른 하나가 어디 갔나 찾으러 간다며 나갔는데. 어디까지 간 게야?”
“잠깐만.”
밖에서 누군가 허겁지겁 이쪽으로 향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피 냄새. 헐떡이는 숨소리. 불규칙한 발걸음.
십이월이 빠르게 문간에 붙었다. 그리고 각자 무기를 꺼냈다. 한 명은 벽 틈새로 밖을 확인했다.
[그 노파예요!]
말씨에 교태가 흐르던 그 노인, 십이월 중 사월을 맡고 있는 여인이 문을 열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이보게, 사월!”
“이게 무슨 일이야. 십일월을 찾으러 간다더니―.”
“비키세요!”
당혹스러운 얼굴로 사월을 둘러싼 노인들을 헤치고 내가 사월을 바로 눕혔다. 그리고 상처를 살폈다.
[가장 심한 건 흉부의 절상이군요. 깊이가 깊어요. 거의 폐를 찌른 거 같은데. 그리고 복부를 너무 많이 찔렸어요.]
불규칙하게 뛰는 맥이 홍령의 말을 증명했다. 폐의 기능이 급속도로 떨어져 가고 있었고 출혈이 심한지 빈맥이 잦아졌다. 서둘러 지혈을 했지만 지혈을 막는 독이라도 뿌린 건지 출혈은 걷잡을 수 없었다.
“사검(沙劍)이구만. 상대를 찌르면 검이 안에서 산산이 조각나 살과 근육을 내부에서부터 찢어버리는 검입니다. 십일월 그 늙은이가 사월 자네에게 그 검을 뽑았어?”
“그, 그렇, 쿨럭!”
“말하지 마세요!”
“십일, 월이, 쿨럭! 섬ㅅ……! 쿨럭, 쿨럭, 컥!”
나는 억지로 혈을 눌러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말을 하다가 피를 토할 거라면 그게 나았다. 피를 토할수록 상처는 더 벌어질 테니까.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월의 몸은 천천히 힘을 잃었다. 이곳까지 몸을 끌고 오며 흘린 피가 지나치게 많았다.
수혈이 불가능한 이곳 중원에선 제아무리 신의라 불리는 이들도 과다출혈을 치료하지 못한다.
“젠장, 젠장!”
맨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김진으로서 누렸던 전능감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너무나 쉽지만, 사람을 살리려는 일은 항상 좌절과 절망이 도사린다…….
“혈을 풀어주십시오, 도련님.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합니다.”
사월은 힘을 잃어가는 손으로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차라리 말을 하게 해주는 것이 나을 터다. 전음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급격히 기력이 쇠하고 있었다.
“커억, 컥…… 보주, 그걸 들고, 거래를 하러…….”
“거래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았나? 벌써 거래를 하러 간다고?”
“그자들도 상황이 급, 해져, 사월의 얘기를 듣고 문주가 결정을, 컥, 막으려다가…….”
“그랬구만. 괜찮네. 들을 만큼 들었어. 고생했네. 이제 걱정 말게.”
은 파파는 사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이내 빛을 잃은 눈 위에 눈꺼풀을 덮어주었다.
“가십시다. 우선 가면서 얘기해야겠습니다!”
은 파파가 사월의 눈꺼풀을 덮어주자마자 십이월들이 문 밖으로 뛰쳐나가 바로 벽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들이 향한 방향에는 항아루가 있었다.
“보주는 경매에 올라오는 게 아니었나?!”
나도 은 파파와 나란히 몸을 날리며 물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거래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정체불명의 집단이지요. 기이하게도 거래는 자신들과 하되, 형식은 경매로, 부러 소문을 흘려 온갖 후기지수들을 불러 모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합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조건.
“왜지? 하오문이 그렇게 돈이 필요해? 이 구역을 개발해 전당포를 엎어버리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가?”
“그것도 있겠지만, 그자들은 하오문주가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 주겠다 했답니다.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라 진실을 캐기 위해 더 시간을 들였습니다만―.”
“그러니까, 그게 뭔데?!”
“……보주를 팔아주면 장주를 되살려주겠다, 그리 약조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