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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23화 (223/350)

223화

“……지금 장난해? 뭐 하자는 거야?”

“과거에 지은 죄의 단죄를 청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도련님께서는 이 노구를 벌할 자격이 있으시니까요.”

“그러니까!”

푸욱.

나는 들고 있던 태양보도를 그대로 탁자에 내리꽂았다.

“거기에 내 의사가 어디 있어? 다 은 파파 하고 싶은 대로잖아?”

“도련님.”

“진짜 내가 복수를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 아니지? 내가 용서할 걸 계산하고 한 일이잖아. 지금껏 친손주처럼 날 키워준 게 다 거짓이었냐고, 얼굴 한 번 안 본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그 주름진 등에 칼을 박겠어? 내가? 아니지, 은 파파는 날 알아. 용서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잖아? 그럼 그게 진짜 용서야? 그냥 은 파파의 알량한 자기만족 아니고?”

은 파파가 내게 천천히 돌아섰다.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 못 한 듯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도련님, 쇤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면 뭔데.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건데? 은 파파가 답을 정해놓고 난 말하기만 되는 거잖아? 이건 나를 기만하는 거야. 나를 진짜 아꼈으면 이래선 안 돼. 그래, 거기에 내 친어머니도 기만하는 거지. 이게 진짜 용서받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야?”

[맞아요, 맞아. 진짜 용서를 받고 싶었다면 이렇게 당신이 캐물었을 때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알려줬어야죠. 대뜸 얼굴도 모르고, 그 전까진 존재도 몰랐던 친어머니의 원수를 갚아라 하면 누가 그러냐고요.]

홍령도 나와 똑같은 지점에서 분개했다. 아니,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처구니없을 일이다.

“진짜 용서를 받고 싶다면 좀 더 기다려. 아니지. 용서가 아냐. 내가 용서할지 복수할지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진 결정을 유보하겠어.”

“……도련님.”

“그러니까 다신, 이딴 식으로 나를 휘두르려고 하지 마. 십이월들이 그랬지. 그들의 짐을 떠맡아주면 온전한 내 그림자가 되겠다고. 은 파파도 내게 과거의 짐을 떠맡기고 싶다면 나를 꼭두각시처럼 손에 쥐고 놀려고 하지 말고, 진심으로 나를 대해.”

은 파파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뭔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한다기보단, 그냥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아서 얼얼한 얼굴이었다.

[그거 같네요. 왜 어른들이 한 번씩 저런 표정을 짓고선 그 다음부터 자식을 손에서 놓아주잖아요.]

상대가 이제 마냥 애가 아니라 어른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지.

솔직히 갓난쟁이 때부터 기저귀 갈면서 키워놓았고 아직까지도 어린 티가 나는 게 보이는데, 대뜸 어른 취급을 해주는 게 사실 쉽지는 않을 거다. 전생에서 전문가들이 얘기하기론, 자식에게 집착이 심한 사람들은 자식이 독립적인 성인이 됐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 거의 뼈를 깎는 것 같은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고도 하더라.

하지만 더 이상 마냥 주도권을 내줄 순 없다.

부모님 세대의 일이 내게 이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부모 자식 간이라는 거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그걸 어떻게 해결할지는 내 선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는 그들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니까.

“일단 좀 쉬었다 얘기하자. 은 파파도 긴 얘기 하느라 심력 소모가 컸을 거고, 나도 배고파. 아까 동파육 불에 올려놨다며. 아직 다 안 됐을까?”

“……아, 아아. 예. 지금쯤 푸욱 익었겠구만요.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은 파파는 겨우 정신을 차려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다 불은 국수는 옆으로 치워버리고, 식은 국물에 새우를 적셔가며 잠시 허기를 달랬다.

아까 과거 얘기를 쭉 들으며 궁금했던 게 있다.

너 왜 아무렇지도 않아?

아니지, 너라고 부르면 안 되나? 어, 엄마? 어머니?

[으, 으으. 그러지 마요! 갑자기 그러면 진짜 어색한 거 알죠? 나 지금 소름 돋았어. 봐요, 귀신도 소름 돋는다니까?]

홍령이 질색을 했지만 사실 평소의 기겁하는 반응이랑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러니까, 어색해서 괜히 더 오버하는 거 같진 않단 말이지.

은 파파에게는 내가 대뜸 친어머니 얘기를 들으면 복수를 하겠다고 할 거 같냐며 말하긴 했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홍령을 안다. 무당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는 홍령의 분노와 슬픔을 알고, 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긴밀한 유대를 쌓았다.

내 친어머니여서가 아니라 그냥 홍령의 원수라고 해도 내게는 칼을 뽑을 이유가 있다.

물론 그 상대가 은 파파니 고민이 안 될 수는 없겠지만 상대가 나랑 친분이 없는 존재였다면 솔직히 장담할 수 없었을 거다.

[근데 진짜 이상한 기분이네요. 내가 그랬었구나…….]

그래, 이렇다니까.

은 파파의 얘기를 듣는 내내 홍령의 반응은 이랬다.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했던 기억은 가물가물하단다.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오히려 그곳에 있는 사당, 도가의 성지라 불리는 곳에 간 게 더 인상 깊었다고 하고.

근데 전염병이 도는 마을을 구했던 건 또 기억을 맞춰보니 말이 맞단 말이지.

[기억이 안 나니까 진짜 남의 얘기 듣는 거 같네요. 내 얘기가 맞는 거 같긴 한데, 묘하게 어색하고…….]

기억만 안 나는 게 아니라 감정도 안 느껴진다며. 그래서 더 그런 거 아냐?

[맞아요! 얘기 들으면서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 나 당신 아버지나 은 파파한테 딱히 적대감을 나타낸 적도 없지 않아요? 무당은 세부적인 기억이 안 나도 분노에 불탔었는데. 으으, 지금 생각해도 화나요. 역시 무당 떠나기 전에 청운진인 그 호랑말코는 도관째로 뽑아서 대머리를 만들어 버렸어야 하는데!]

이거 봐. 지금도 이렇게 길길이 날뛰잖아.

근데 아버지와 은 파파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니. 뭔가 이상하긴 하다.

[심상 속에서 만난 사형제들도 생전의 기억이 드문드문했다면서요. 나도 그런 거 아닐까요?]

심상 속 화산에서 만난 사숙들은 내게 과거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가장 말이 많고 입이 가벼운 각령 사숙조차도 섬서사변에 대해선 ㅅ자도 꺼내지 않았다. 도려진 것처럼 기억이 안 난다나 뭐라나.

난 그게 일부러 말을 안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기억이 사라진 걸 수도 있겠군.

……잠깐만. 그럼 좌수검은?

좌수검을 만날 때면 유독 좀 이상했잖아. 한참 시선을 뺏기고 있다든가, 갑자기 내 몸에 빙의해서 이름을 묻는다든가.

[으윽, 그 얘기 안 하려고 말 돌리고 있었는데. 젠자앙―!]

어허? 부끄러워?

[아, 몰라욧! 묻지 마욧!]

부끄러운가 본데? 왜 부끄러워? 자식이 부모님 연애사 좀 궁금해할 수도 있지. 들어보니 소꿉친구였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 사귀었어? 좌수검이 언제부터 남자로 보였고? 둘이 첫 접문은 언제 했는데?

[이 사람이 진짜?! 나 화내욧?!]

하하, 이제 알겠지? 나 갖고 맨날 사랑의 작대기 하던 거에 대한 복수다.

[진짜 쪼잔해!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원래 가해자는 까먹고 피해자는 기억하는 법이거든.

[으으, 못 살아. 근데 그것도 사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많지 않아요. 그랬으면 내가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아봤겠죠. 조금 기묘한 느낌이 들 때가 많긴 했지만 그뿐이었다고요.]

그렇군. 어쩐지 좀 아쉬운데.

[그건 둘째 치고, 좌수검도 당신한테 묘하게 친절하지 않았어요?]

뭐가 친절해?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수술 끝나고 눈 뜨자마자 날 죽이려고 살기를 펄펄 피워 올렸는데.

[그때만 그랬죠, 그 이후에 만났을 때를 생각해 봐요. 정반합 때도 그렇고, 소림에서 만났을 때도 그렇고. 원래라면 안 되는 건데 해주고, 하면 안 되는 말인데 해주고. 이름도 사실 비밀인 건데 얘기해준 거잖아요?]

그건 네가 물어본 거잖아.

[어쨌든 대답은 당신한테 했잖아요. 그런 거 보면 핏줄이라는 게 진짜 느껴지긴 하나 봐요.]

그런가…….

“시장하시지요. 동파육 여기 대령했사옵니다.”

홍령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긴장을 풀었더니 때마침 갈색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동파육과 고슬고슬한 쌀밥, 그리고 아삭한 소채볶음이 탁자 위에 올라왔다.

“음, 맛있다. 역시 이 맛이지.”

젓가락만 넣어도 스윽 잘릴 정도로 부드러운 돼지고기에, 북쪽에서는 잘 먹지 않는 쌀밥은 그 조화가 끝내줬다. 지친 몸에 그대로 흡수될 것 같은 맛. 그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은 파파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입맛만큼은 장주를 똑 닮았습디다그려.”

“당연하지. 내가 어디서 컸는데.”

“그러게요. 이 할미가 단단히 착각을 했습디다. 그저 화 소저의 아들이라고, 아까도 그냥 그이처럼 용서하고 넘어가 줄 줄 알았지요. 헌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군요. 화 소저의 자식인 동시에, 도련님은 장주의 아들입니다.”

“왜 또, 주도권을 뺏긴 게 그렇게 억울해?”

“아뇨, 그냥. 이 늙은이가 진짜 늙어빠진 폐물이 되었구나. 그 정도도 생각지 못하고 일을 벌이다니. 그런 자조를 할 뿐이지요.”

“됐고, 은 파파도 밥 먹어. 아까 빈속에 술만 마셨잖아. 우리 할 얘기가 남아 있다고. 정반합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안 했잖아?”

나는 고봉으로 쌓인 밥을 반 들어 은 파파의 앞에 놔 주고 동파육도 올려주었다. 하오문 사람들을 미행하면서 이 동네의 물가도 슬쩍 구경했는데, 향락의 도시답게 식료품 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과연 거지가 많을 만도 하달까. 끊임없이 물건이 들어오는 항구도시인데도 물가가 이 정도라니.

근데 이 물가 비싼 동네에서 이처럼 고급 돼지고기를 사려면 대체 얼마를 지불한 걸까.

대체 은 파파의 주머니에는 돈이 얼마나 있는 거지?

“그래서, 은 파파가 정반합을 운영하는 데 쓰는 돈은 과거에 하오문을 통해 벌어놓은 건가?”

“흘흘, 그거까지 눈치를 채셨고요?”

“이거 봐. 이 못돼 먹은 노파 같으니. 그쪽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내 손에 죽으려고 했어? 그러고서 저승 가서 내가 실마리도 없이 수수께끼를 푸느라 낑낑대는 모습을 킬킬대며 구경하려고. 못 됐어, 진짜.”

“아이고. 들켰고만요.”

은 파파도 그제야 웃으며 밥을 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뭘 하든 밥은 먹어야지. 다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 나는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면 보자고. 은 파파가 원하는 것. 내가 손에 쥐기를 원하는 유산은 총 세 개인 거지? 첫째는 십이월, 둘째는 하오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반합.”

“그런 셈이지요. 정반합은 과거에 대한 속죄와 같은 마음으로 꾸린 집단이었으나, 이제 도련님이 건강히 장성하셨으니 그 손에 쥐여드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회주가 내게 뜬금없이 정반합을 넘기려는 이유는 알았다. 나름 합당하고 말이 되는 이유다. 아니, 그러니까 처음부터 설명을 하고 차근차근 진행을 하면 좋잖아. 왜 모든 걸 비밀리에 해서 자꾸 내 인생에 폭탄을 떨어트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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