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아까 나가서 이제야 들어오십니까. 식사는 좀 하셨고요?”
“아니.”
“아이고, 그럼 여태 한 끼도 안 하셨습니까요? 이 할미가 밥은 꼬박꼬박 먹고 다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디 보자, 동파육은 아직 조리는 중이고…… 와서 앉으세요. 간단하게 이거라도 먹고 요기 하십시다.”
은 파파는 나를 탁자 쪽으로 손짓하더니 주방에서 작은 철과와 그릇들을 내왔다. 따끈한 닭고기 국물은 향긋한 냄새가 났고 바다가 가까운 곳의 새우는 살짝 익어 붉고 탱글탱글했다. 잘 삶은 소면 두 뭉치도 있었다.
만들어두고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주먹밥 같은 음식이 아니다. 내가 돌아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바로 먹을 수 있게 준비한 음식일 터다.
……대체 왜.
“자자, 드십시다. 뭐든 밥을 먹고 움직여야지요. 새우 요걸 국물에 좀 담가놓을 테니 조금 이따가 소면이랑 같이 드시지요. 이 항주가 용정차로는 참 알아주는데, 그 용정차 잎을 넣어 끓여서 국물도 담백합디다.”
“……알아. 용정문차잖아. 금가장에 가끔 좋은 용정차가 들어오면 먹는 음식이었어.”
“알고 계시구만요.”
“당연하잖아.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었으니까.”
“그렇지요. 장주가 참 좋아했지요. 어서 드십시오.”
은 파파가 어서 한 술 뜨라 재촉했지만 나는 수저를 들지 않았다.
“아니, 먹지 않겠어.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이십여 년 전, 그 날. 내 생일이라 알려진 그 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도련님.”
“더 이상 파편 같은 과거의 정보들만 갖고 움직일 수는 없어. 난 알아야겠어. 아버지의 과거가 내가 물려받아야 할 유산이라면 나와 관련된 일들도 그런 거 아냐? 그걸 모르는 이상, 나는 아버지 아들이랍시고 그 유산을 받겠다 할 수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알아도 그게 무슨 대수냐며, 과거의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대꾸할 수도 있을 거다. 금왕이 내 친아버지가 아닌들 아버지가 날 아들로 받아들이고 키운 세월이 얼만데. 이제 와 모두가 기를 쓰고 숨긴 과거를 캐서 무엇에 쓰냔 말이다.
하지만 그 과거가 결국 여기까지 왔다.
“큰 형님은 알고 있지?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할 거라느니, 그런 소릴 하면서 날 미워했을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날 유폐한 것도 내 출생과, 아버지의 과거와 관련이 있겠지.”
그뿐인가.
아버지의 귀물을 모아두는 창고에는 홍령이 생전 지녔던 침통이 있었다. 구천을 떠돌던 귀신이 깃들 만큼 아끼던 물건 말이다.
그것이 나와 닿아 지금의 홍령과의 관계를 만들었다.
무당파와 하오문, 정반합, 소림에 이르기까지.
숨겨진 과거는 내가 지금껏 걸어온 모든 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와 상관없는 과거란 건 없다.
그렇기에 이제는 알아야 했다. 단 하나의 거짓도 감춰짐도 없는 모든 과거를.
“다른 건 됐어. 한 가지만 확실히 얘기해 줘. 아버지와 홍령은 대체 무슨 사이였어?”
다른 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사실 이 질문이야말로 핵심이다.
이것에 대해 대답하려면 그 모든 것을 대답할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알고 오셨다니 더 이상 답을 미룰 수가 없군요. 알겠습니다. 이 노구의 낡은 이야기보따리를 한번 풀어보지요. 어디 보자, 긴 얘기라 뭐라도 마시면서 해야겠군요.”
은 파파는 그리 말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술 항아리 하나를 꺼내왔다. 마개를 따자마자 독한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나도 한 잔 줘.”
“우선 식사부터 하시지요. 빈속에 술은 좋지 않습니다요.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끼니는 거르지 마세요. 그리 굶고 다니는 거 보면 이 할미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리 말하며 은 파파는 내 잔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나는 닭고기 국물 속에서 단단하게 익은 새우를 꺼내 입에 넣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은 파파가 준비한 음식은 그 마음만큼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항아 고것, 그러니까 현 하오문주를 만나셨단 보고는 들었습니다요. 그러니 장주가 어찌 돈을 벌었는지 아셨겠지요. 썩 바른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때 장주와 쇤네에겐 그런 추잡한 짓만이 밑바닥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손을 잡았다던 기녀가……?”
“예, 쇤네지요. 지금이야 이리 쭈글쭈글한 노구지만 그때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는지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은 손님을 받았지요, 흘흘. 그러다 어느 날 내 방에 구멍이 뚫려 있고, 겨로 엿보는 작자들이 있어 혼쭐을 내러 갔더니 장주가 그런 장사를 하고 있질 뭡니까. 왜 네 놈이 꽁으로 돈을 벌고 있느냐 따져서 나도 그 대가를 일부 받기로 했지요. 그뿐인가요, 장주가 들여오는 마약을 나도 좀 받아서 내 손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나 보다. 솔직히 좋은 내용은 아니지 않나. 아끼는 사람이, 먹고 죽을 것도 없던 시절에 살려고 했던 일이라 한들, 속에서 올라오는 불쾌감은 어쩔 수 없다.
“이해합니다. 욕을 하셔도 좋습니다. 더럽다 손가락질을 하셔도 되고요. 그때는 그 방법뿐이었다, 그건 이 노구가 하는 변명이고 그걸 도련님이 들어줄 이유는 없지요. 쇤네는 그냥 도련님이 알고자 하는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요.”
“……계속해.”
“우리는 돈을 벌었습니다. 돈이 새끼를 치고 돈을 낳듯이 돈을 벌었습니다. 우리 사업에 끼는 자들이 늘었고 나도 주변 기녀들을 소개해주며 일을 불렸지요. 그렇게 몇 년을 했더니, 어이쿠야, 건물을 하나 올릴 정도가 되더군요. 당시 쇤네의 기명을 붙여 항아루라 했지요.”
현 하오문의 본거지인 그곳이다.
“그때쯤 나는 그런 일에서는 손을 떼고 보다 뒤에서 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제자 녀석에게 기명도 물려주고, 기녀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전해지던 무공을 갈고닦았지요. 지저분한 일을 하다 보면 피를 볼 일이 많지요. 쇤네는 그런 쪽으로 제법 재주가 좋았고, 장주는 돈을 더 크게 불리는 재주가 있었습니다요. 우리는 참 좋은 짝궁이었지요.”
“―그렇게 하오문이 시작된 거군.”
“맞습니다. 그 이름이야 좀 나중에 붙였지만, 그래요, 다른 패거리들과 부딪치다 보니 우리가 누구다 할 말이 있어야 하더군요. 당시에 항주에 흑사갈파라는 흑도방파 큰 게 하나 있었는데, 그 작자들과 부딪치면서 오히려 세력이 커졌습디다. 홀홀, 출신도 모르던 새끼기녀가 대뜸 하오문이라는 무림문파의 문주가 되고, 출세했지요.”
하오문주가 은 파파를 스승이라 불렀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하오문의 초대문주였을 줄은 몰랐다.
하긴, 그 정도는 되니 누구도 은 파파의 꼬리를 잡을 수 없었겠지.
“흑사갈파와는 꽤 큰 갈등을 빚었지요. 많은 피를 흘렸고, 서로 마주치면 칼부터 뽑을 만큼 앙숙이었습니다. 허나 장주가 말입니다, 돈 불리는 솜씨만큼이나 남의 돈줄을 훔치는 솜씨도 참 좋았습디다. 차츰차츰 우리에게 밥줄을 뺏기다가 최후에는 사달을 냈지요.”
“사달이라면?”
“큰 도련님 말입니다. 놈들에게 납치를 당했었습니다. 어휴, 그때 일을 생각하니 지금도 속이 쓰리구만요.”
은 파파는 미지근하게 식어가던 술을 한 호흡에 들이켰다.
큰 형님을 납치했다라…….
나야 장성한 큰 형님만 보았지만, 은 파파는 큰 형님 또한 갓난쟁이 때부터 봤을 테니. 그때는 큰 형님도 한참 어린 나이였다. 큰 사건이었을 거다.
“인질을 잡고, 돌려주는 대신 거금이라도 요구했어?”
“차라리 돈이었다면 쉬웠겠지요. 허나 놈들은 장주를 불러내더군요. 반드시 홀로 와 앞으로 항주 내 영역을 어찌 가를지 결정하는 거래를 하자 했습니다. 홀홀, 누가 봐도 함정이지요. 허나 아니 갈 수 없었습니다. 가장 은신술이 뛰어난 쇤네만이 홀로 그 뒤를 따랐고, 큰 도련님은 무사했습니다만, 흑사갈파는 거래할 의사가 없었습디다. 쇤네가 쫓아올 것도 예상하고 있었더랬지요. 그 자리에서 장주와 이 노구를 한 번에 처리해버릴 작정이었던 게지요.”
아주 깊은 산 속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며 은 파파는 내게 아버지 유산의 위치를 기록한 지도를 꺼내보라 했다. 그리고는 한 지점을 짚었다.
“이쯤이었을 겁니다. 아주 깊은 산골이었고, 지형이 너무 험해서 장주는 가는 길에도 고생을 했지요. 사람 셋 정도 묻어도 천 년은 티가 안 날 그럴 곳이었고, 우리는 흑사갈파의 함정에 빠져서 그 자리에서 죽나 했습니다만…… 그 절체절명의 순간,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산을 울리더군요.”
그때 들었던 목소리를 흉내 내려는지 은 파파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간악한 무리들이 약한 자들을 핍박하느냐! 몰랐으면 모를까, 이를 본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화산의 검수 화홍령의 검을 받아라!”
다소 뜬금없는 연기였지만, 내 등줄기에는 소름이 돋았다.
[……어?]
여태 충격에 빠진 채 침묵을 고수하던 홍령마저도 말문을 열었다.
그만큼 똑같았다.
[방금 그거, 나……?]
내가 알던 홍령, 바로 내 옆에 있는 홍령과 목소리도, 말투도 거의 흡사했다. 그때가 후기지수 시절이라 좀 더 목소리가 어리다는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홍령 그 자체였다.
그때 한 번 본 걸로 저런 연기가 가능한가?
“수백 명의 적에게 둘러싸였는데, 절벽 아래서 붉은 꽃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군요. 아름다운 소녀가 살벌한 검기를 뿌리며 흑사갈파의 무인들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또 다른 후기지수들이 뒤따랐습디다.”
“후기지수들?”
“그날 우리를 도운 후기지수는 둘이 더 있었습니다. 그 둘의 실력도 화 소저에 못지 않았습지요. 그 당시에는 절친한 친구들로 그 우애가 이름을 날렸었지요.”
“그게 누구지?”
홍령의 생전 친구들. 홍령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어찌 사는지 궁금해했다.
“하나는 제갈세가의 제갈천우. 이름이 사내 같지만 여인이었습니다. 근데 사내라 해도 헛갈릴 것처럼 얼굴이 시원시원하니 참으로 잘생겼지요. 남장을 하면 그리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검술보다는 다양한 잡기에 능한 처자였어서, 그날도 눈이 아릴 정도로 매운 연막탄 같은 것을 던져대며 흑사갈파를 쫓았지요.”
홍령의 제갈세가 친구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제갈다영의 고모뻘 되는 인물. 한 번 스치듯 얘기를 꺼냈을 때 제갈다영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지나가서 그 뒤로 잊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 그자는 검도 뛰어났습니다. 화 소저와 비등비등할까, 조금 더 뛰어났을지도 모르겠군요. 문파가 지척에 있어 어릴 적부터 교분을 나누었기에, 무림 출도도 함께 했다 했습니다. 그때부터 차기 종남제일검이라는 말을 들었지요. 남자답게 선이 짙은 미남이라 여인들의 방심을 훔치곤 했지만 항시 그의 마음은 화 소저에게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휘소. 그것이 그 청년의 이름이었습니다.”
휘소.
휘소.
휘소.
분명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요, 이쯤 되면 짐작하시겠지요. 그 두 사람이 도련님의 친모, 친부입니다.”
그래. 그때다. 소림에서, 소림과 정반합의 관계를 알게 되었던 날이다.
그 전까지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멋대로 내 몸의 주도권을 차지하지 않았던 홍령이 다짜고짜 내 몸에 깃들어 그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휘소. 이제는 세상에서 잊힌 이름이지.”
좌수검의 이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