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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19화 (219/350)

219화

나 여기 있다고 나설 상황도 아니고 그럴 기력도 없긴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허나 상황이 웃긴 건 나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진지했다. 특히 신생을 따라온 현건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진실이라고 어떻게 믿지.”

“네놈은 면상을 보아하니, 어디 보자, 후기지수 용모파기에서 많이 본 얼굴인데. 신분을 감춘다고 머리도 달리 묶고 옷차림도 바꾼 거 같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어디 보자, 무당의 제자놈이던가?”

도개걸의 말에 현건이 움찔했다. 누가 봐도 정곡을 찔린 모습이었다. 그저 무당의 제자로 주어진 임무를 행하면 될 때는 잘 해내는 거 같더니, 거짓말이나 뭔가를 숨기는 데는 재주가 영 없는 모양이지.

“내가 개방 방주야, 임마. 장문인 그 자식도 나보다 배분이 낮은데, 네놈이 어디서 까불어?”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보의 신뢰성을 담보할 수―.”

“골 때리는 놈이네. 무당에 아직 제자를 이렇게 꼬장꼬장한 놈으로 키울 호랑말코가 남아 있나?”

“건 공자 말이 틀린 건 아닌데요. 저도 사부님 못 믿어요.”

“어이쿠야, 하나뿐인 전 제자라는 놈까지 한다는 소리가. 하따, 속 터진다. 윤모야!”

“예!”

“거기 술 한 병 던져봐라!”

무한 지부장 윤모가 바닥에 놓인 술병을 던졌고, 도개걸은 그걸 낚아채 그대로 한입에 들이켰다. 한참을 꼴깍꼴깍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술을 들이켠 도개걸은 불콰한 얼굴로 탁 소리 나게 병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니들, 아니지, 신생이 네놈은 말고, 새끼 도사놈, 네놈도 금왕의 유산이라는 보주를 손에 넣으려고 온 거 아니냐? 하여간 호랑말코 놈들, 지들이 개입한 티를 안 내려고 후기지수 하나 덜렁 보냈다 이거지? 건 공자가 뭐냐, 현자 배일 테니까 원래 현건인가?”

“현건이면 무당 삼대 제자 중 대제자일걸요?”

“아, 그러게. 윤모 네 말이 맞다. 그 재수 없는 낯짝 맞네. 그치, 내 말 맞지?”

“……맞소.”

역시 현건도 금왕의, 아니, 아버지의 유산을 노리고 온 거군.

“그래, 이렇다 이거야. 갑자기 어디서 소문이 빡 돌았는지, 우리는 지도 들고 머리가 빠개지게 고민해가면서 겨우 항주라는 단서를 찾아놨더니, 누가 소문을 흘려가지고 온갖 날파리들이 다 꼬이게 생겼지. 근데 이게 날파리만 꼬이겠냐? 지가 주인이라고 주장할 놈도 당연히 올 거 아냐?”

“스승님이요?”

“금가 새끼 그놈, 지 사재를 풀어서 거지를 먹일망정 지 애비 유산을 남이 가져가게 두고 볼 놈은 아니야. 처먹어도 지가 처먹은 다음에 누굴 나눠주겠지. 놈도 지도를 갖고 있으니 당연히 올 거라고 생각했다. 놈에게 주어진 안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감시까지 붙여가며 좇았는데, 갑자기 하늘로 솟았는지 사라져 버렸어.”

“진짜 안 오셨단 말이에요?”

“그래, 임마. 그 와중에 회주 그 물주 새끼는 뜬금없이 금태양한테 회주 자리를 넘긴다질 않나. 씨이발, 돌아버리시겠네.”

“예?”

어?

“아냐, 그건 니들이랑 상관없는 얘기다. 답답해서 괜한 소리나 지껄였네. 아무튼 그 새끼 이 동네는 얼씬도 안 했고 볼일 끝났으면 가 봐.”

도개걸이 귀찮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신생은 여기서 더 얻을 정보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현건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신생에게 이곳 항주와 개방 본타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한다면, 볼일이 없어졌는데 더 머물고 싶지 않겠지.

그런데도 나를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니. 그 사실에 마음이 간지러웠지만, 당장 따라 나가 신생의 손을 잡고 돌아가는 일보다 중한 일이 있었다.

“뭐냐, 넌 왜 안 가?”

“정반합의 회주가 왜 갑자기 회주 자리를 넘긴다는 거지? 그간 돈만 대고 별 말은 없는 존재 아니었나?”

“씨발, 너 뭐 하는 새끼야. 뭔데 정반합을 알아?”

순간 도개걸의 눈빛이 달라지며 그의 기세가 바뀌었다. 독한 술을 마셔 불콰하던 얼굴도 내공으로 주기를 날려 멀쩡해졌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무한 지부장 윤모만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할 뿐이었다.

“이러면 좀 이해가 가실까?”

나는 품에서 금태양의 가면을 꺼내 썼다.

“아니면, 나가서 마약중독 후유증에 시달리는 자들을 침 한 방으로 낫게 하면 아실까?”

“……설마 금가 새끼냐?”

“당황하는 모습이 재밌어서 좀 더 감추려고 했는데, 방금 그 말은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어서.”

나는 다시 가면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상황파악이 빠른 도개걸과 달리 윤모는 한참 어버버하다가 그제야 깨달았는지 두 손을 딱 치곤 “전 일단 나가보겠습니다. 얘기들 나누십셔.” 하곤 밖으로 나갔다.

“무한 지부장도 합의 일원인가?”

“그렇지. 근데 너, 원래 그렇게 말이 짧던가? 그래도 연장자에 대한 기본 예우는 차리는 놈이었던 거 같은데.”

“신분을 다르게 위장하려면 습관부터 바꿔야지. 금태양일 때는 제대로 대우해드릴 테니까 안심하시고. 그래서 그 얘긴 뭐야?”

“나도 알고 싶다. 몇 가지 임무를 지정하는 거 외에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든 크게 관여 안 하던 회주가 갑자기 네놈에게 모든 걸 넘기겠다고 하는데, 어떤 놈인지 찾아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구만. 넌 정말 아무것도 몰랐냐?”

“모르니까 물어보겠지.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지?”

“일단은 내가 제일 먼저 알았을 거다. 단독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은 주로 외팔이 놈에게, 여럿에게 퍼트려야 하는 일은 나에게 오지. 아무래도 내가 개방 방주고, 개방에도 정반합에 든 놈이 여럿이다 보니. 근데 아직 퍼트리진 않았어.”

내용이 내용이니 그랬겠지.

나도 당황스럽다.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정반합의 회주가 나에게 회주 자리를 넘기겠다고? 그런 일은 적어도 당사자끼리 합의는 마친 후에 진행되지 않나? 하다못해 남들보다 먼저 통보라도 하든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 사실을 마주했더라면 정말 곤혹스러울 뻔했다.

“나도 당황스러운데 합의 일원들은 더하겠어. 전파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 회주의 말을 거부할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합을 나가거나 와해될 수도 있겠군. 당신은 그걸 두려워하는 거야. 맞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애송아, 합을 나가는 놈은 없을 거다. 그거 하나는 확실히 해 두지.”

도개걸이 깊디깊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이자가 이런 눈을 할 때는 항상 섬서의 일과 관련이 있다. 무형의 결의가 유형의 시선이 되어 꽂힌다.

“대신 다른 사람을 회주로 세우거나 분열이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회주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 텐데?”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하느냐?”

“돈이 많으니까. 돈 많은 사람들은 자기 돈을 허투루 쓰려고 하지 않거든.”

“……하여간 재수 없는 놈. 꼭 이럴 때 금가 놈 자식새끼인 걸 티를 내요.”

하하.

“네놈이 회주가 되는 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돈을 끊겠다더군.”

역시 그거겠지.

원래도 무림인 집단은 돈 나가는 구석밖에 없다. 무당처럼 정파에 속하는 문파도 어떻게든 문파 유지를 위해서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고, 그게 아니면 소림처럼 속 빈 강정이 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소림은 후원이라도 많이 받지. 정반합처럼 비밀 조직은 든든한 자금줄이 없다면 유지존속이 극도로 어려워진다.

“언제까지 감출 생각이지? 회주도 기한을 정해줬을 텐데.”

“이번 보름까지다.”

하오문의 경매가 열리는 보름 얘기다. 공교롭게도 겹치는군.

“며칠 안 남았네.”

“내 말이 그 말이다. 골이 빠개질 거 같군. 이런 걸 고민하는 건 내 전문이 아닌데.”

도개걸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러는 걸 보니 진짜 자기가 아는 얘기는 다 했나 보군. 정보상이 아는 얘기를 다 토해냈다면 나도 더 이상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아, 한 가지만 더 묻지.”

“뭐냐.”

“어떤 방식으로 회주에게서 돈을 받았지? 현물? 아니면 전표?”

“아서라. 나도 이미 그놈 뒤는 캘 만큼 캐 봤다니까. 네놈이 캐봤자 아무것도 못 찾을 거다.”

“그건 그때 가봐야 알 일이고. 그래서 돈을 어떻게 받았는데?”

여태 잘 말해놓고는 이제 와 무슨 중대한 정보라도 되는 양 망설이는 도개걸이다. 물론 자금줄에 대한 정보가 중대 정보긴 한데, 나한테 감출 내용은 아니지 않나? 갑자기 내가 회주 자리를 떠맡게 되면 곤란한 건 정반합뿐이 아니라고.

“……거지 놈들 몇 놈이 푸성귀를 팔았다.”

“푸성귀?”

“연락이 오면 지정된 장소에서 합에 속한 거지들이 시들어빠진 채소를 판답시고 좌판을 깔았다 이 말이다. 거지들이란 게 원래 다 빌어먹고 사는 족속들이지만, 그래도 가끔 돈 몇 푼이라도 고쟁이에 끼워 두고 싶어서 그러는 놈들이 있어. 그런 것처럼 대충 푸성귀 깔아놓고 팔고 있으면 노인네 하나가 와서 사간다는데, 건넨 전낭에 금이 들어 있지.”

“잠깐만, 노인네? 성별은?”

“영감탱이가 좌판서 풀떼기 사는 거 봤느냐? 당연히 할망구지. 똑같은 할망구인진 모르겠는데 중원 전역에서 수시로 불러다가 거지들한테 금을 쥐여줘. 한 번은 추적해보라고 시켰는데 어느 순간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종적을 감춘다더군.”

“혹시 이렇게 생겼어?”

휴대용 지필묵을 꺼내 허둥지둥 그림을 그렸다. 그림 실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특징 정도는 짚어서 그릴 수 있다. 아주 평범하고 어디에서나 볼 법한 노인의 인상이지만, 너무 평범하기에 그것이 특징이 되는 얼굴.

“쓰읍, 내가 봤던 용모파기와 비슷한 것도 같고. 뭐냐, 아는 사람이냐?”

“……아마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닐 거라고 예상했었다. 정반합이 어떤 곳인가, 또 그곳의 회주란 어떤 의미인가. 그 막대한 돈을 볼모로 잡고 나를 다음 회주로 지정할 정도라면 나와 보통 관계의 사람은 아닐 게 분명했다.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내가 처음 태양의원을 개업했을 때, 내 치료를 받고 한동안 의원에 머물면서 이런 저런 일을 도맡아 하다가 홀연히 사라졌지.”

“네놈의 환자였다?”

“채소를 파는 행상이었어.”

“하아?”

도개걸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한 번 스쳐 지나간 인연이 내게 덥썩 회주 자리를 맡긴다 하면 말이 안 될 거 같긴 하지.

“이만 가보겠어.”

“어이, 야! 금태양!”

개방 본타를 나서자마자 나는 곧바로 금 씨 전당포로 향했다.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했다.

아버지 금왕, 내 친어머니의 정체, 친어머니로 알고 있던 이와 함께 장례를 치른 ‘화홍령’이란 이름의 여인, 거기에 이젠 정반합까지.

그 모든 것은 한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은 파파!”

“오셨습니까요, 홀홀. 얼굴이 말이 아니십니다.”

은 파파는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나를 맞았다.

다정한 할머니 같은 표정이지만, 그래, 나는 항상 저 밑에 어떤 저의가 깔려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더 이상 모든 것을 비밀에 싸인 채 두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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