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218화 (218/350)

218화

“이쪽이요. 서둘러요.”

“나는 충분히 빠르게 가고 있다. 오히려 네 걸음이 느린 거 같은데.”

“아, 아니거든요!”

버럭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사실 제 발 저린 반응이라는 것은 신생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신생은 개방 방주의 제자였고, 어린 시절부터 동냥젖을 받아먹으며 항주에서 자란 거지였다. 태양의원에서 벌써 일 년 넘게 시간을 보냈지만 사실상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으니 익숙하다면 아직도 이곳이 익숙하다.

고향이라면 고향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을 각오를 하고 도망친 고향이기도 하다.

어찌 망설임이 없을 수 있을까.

아직도 종종 그날의 끔찍한 기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곤 하는데.

‘아냐,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사실 처음 금태양이 항주로 향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일순간 몸이 굳었다. 아직까지도 몸이 절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신생은 평생 항주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승이 항주로 향했다. 제자는 따라가야 했다.

괜찮다.

자신은 더 이상 거지가 아니라, 태양의원의 의원 신생이니까!

특히 배에서 있었던 일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는 상처 입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수술하고, 그 예후 관리까지 스스로 해냈다. 선원들이 도움을 주긴 했지만 의원으로서는 신생이 오롯이 혼자 해낸 일이었다.

그랬기에 가능했다. 이곳에 돌아오는 것은.

“근데 좀 이상하네요. 동네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신생은 속도를 내면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별거 아닌 거리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버릇은 의원이 되었어도 여전했다. 사실 거지로서 배운 습관들이 의술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남다른 관찰력은 의원에게 아주 적합한 재능이니까. 괜히 홍령이 금태양보다 낫다며 추켜세운 게 아니었다.

“조용한가. 딱히 그래 보이진 않는데…….”

현건이 신생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조용하진 않았다. 대로를 걷고 있었기에 그들은 금태양이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거지들, 약에 취해서 과하게 흥분해 뛰어다니는 자들, 약 기운이 가셔 세상 잃은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내는 이들이 혼재해 있고, 외부에서 온 상인이나 그나마 제정신을 차리고 사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없는 것처럼 무시하며 분주히 길을 오갔다.

확실히 조용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신생의 관점은 달랐다.

“항주가 어떤 곳인지는 얘기했잖아요. 의원이 없고 약도 부족한 곳이라고요. 그런 곳에 스승님이 왔다고요. 우리보다 며칠 먼저 도착하셨을 게 분명한데. 지금쯤이면 소문이 쫙 퍼져서 어딜 가나 스승님 얘길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죠.”

금태양이 가는 곳은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신생은 금태양이 의술로 흐름을 휘어잡는 모습을 몇 번이나 똑똑히 보았다.

그랬기에 신생은 이곳에도 이미 금태양의 위명이 하늘을 울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열댓 명의 환자를 수술하고, 비상약 약간으로 백 명의 환자를 낫게 하고, 천 명의 환자가 금태양의 침 한 방을 맞기 위해, 아니, 그냥 진맥이라도 받으려고 만 명의 환자가 줄을 서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곳도 의원이 귀한데, 이곳이라면 더하지 않겠는가?

“보아하니 거지들이 많은데, 의원에게 낼 돈이 어디 있겠나. 하오문의 마약에 빠져 거지가 되는 이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야 진맥 한 번에 몇십 냥씩 덤터기 씌우는 무당의들 얘기고요. 스승님은 인의를 아는 의원이시라고요. 여기 사정 척 보고 공짜로 치료하시든지 노동이나 정보로 대신해주시든지 했을걸요? 무한에서는 익숙지 않은 수의 치료라고, 약이나 침은 물론이고 수술비용도 안 받았다고요. 무당이었으면 건당 은 백 냥은 들고 오라고 했을걸요?”

“크, 크흠. 태청의원과 분원들의 치료비가 조금 높게 책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건 다 제공되는 의술의 품질 유지를 위해서―.”

“저도 다 알거든요. 물건이나 기술은 제일 싼 곳에 외주 주고, 무당의들 온갖 명목으로 쥐어짜서 본산에 상납하잖아요. 그 때문에 날이 갈수록 치료 질이 떨어진다던데. 이번에 태양의원 가맹으로 옮긴 의원님들이 얼마나 성토했는지 아세요? 하긴, 본문 대제자인 분이 그런 거에 관심이나 있겠어요. 알아도 무당이 옳다고 생각하겠죠.”

“……그 부분은 본산도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목적이 겹치는 길까지만 함께하다 헤어지면 그만인 사이라 거침없이 말을 했는데, 의외의 답이 돌아와 신생은 놀란 눈으로 현건을 돌아보았다. 그 무당의 제자가 이런 말을 하다니?

“어, 근데 건 소협은 왜 혼자 항주에 온 거예요? 전에는 무당 사람들하고 우르르 몰려다녔잖아요.”

“그건, 사정이 좀 있다.”

현건이 말을 흐렸다. 그 표정이 제법 어두워 신생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왠지 그 표정을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개방에서 도망칠까 생각했을 때.’

설마?

하지만 신생은 곧 머릿속에서 그 가정을 지웠다. 자신은 꽤나 혹독한 환경이었지만 상대는 무당의 대제자가 아닌가. 자신을 키워준 가족 같은 문파를 저버릴 생각 같은 걸 할 이유가 없다.

“다 왔어요. 저 골목이에요.”

쓸데없는 주제에 대한 얘기는 그만두고 걸음을 놀리며, 두 사람은 과거 객잔이었던 곳을 무단으로 점거해 쓰고 있는 개방 본타에 도착했다. 신생은 익숙한 풍경에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하곤 배식을 하고 있는 덩치 좋은 거지에게 말을 걸었다.

“정보를 좀 사러 왔는데요.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하류 쪽 왕초 만복 거지님 있어요?”

도시가 큰 만큼 정보의 종류도 다양했고 개방에도 각기 세부 분야별로 뛰어난 정보통들이 따로 있었는데, 만복은 신생이 아는 한 항주 내의 정보, 그중에서도 동네 정보에 제일 빠삭한 사람이었다. 금태양의 전생으로 치자면 동네 통반장 같은 느낌이랄까.

신생이 원하는 정보의 종류와 담당까지 딱 지정해서 묻자 거지는 좀 놀란 눈으로 신생을 바라보았다.

“뭘 좀 아는 꼬마구만. 개방의 정보를 사본 경험이 많은가 보지?”

신생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과 개방은 둘 다 정보를 다루지만 정보의 분야가 다른데, 또 다른 점 중 하나가 정보의 전달 체계였다.

태양의원에서 일하면서 가끔 금태양의 심부름으로 태양객잔 주인장에게 하오문의 정보를 요청하고 받아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신생은 하오문의 체계적이고 빠른 일 처리에 감탄했다.

개방은 정말 기이하고,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데? 싶은 정보도 갖고 있는 반면, 대체로 거지들이라 느리고 게을렀다.

가끔 뭔가에 꽂히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르긴 한데…….

아무튼 그런 개방 거지들의 속성을 알고 있는 이들은 지금 신생처럼 정확히 뭘 찾는지 지정을 해 그런 과정을 빠르게 단축했다. 원래 거지가 아니어도 막연한 부탁보다 정확한 지침이 나은 법이다.

“근데 너, 낯이 좀 익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보긴 뭘 봐요. 그래서 만복 거지님 있어요, 없어요?”

“……잠깐만. 너 혹시 신생 아니냐?”

순간 신생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보를 좀 느리게 받는 거야 그럴 수 있지만 일부러 개방 본타 거지들과 마주치는 시간을 줄이려고 부러 사람과 분류를 지정한 거였는데.

“네, 저 신생 맞아요. 하지만 이제 거지가 아니에요.”

신생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자신을 부른 거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쫄 필요 없다. 자신은 태양의원의 신생이다! 스승님의 제자다!

“저는 태양의원의 의원 신생이고, 정보를 사러 왔어요. 만복 거지님 없나요? 아니면 왕초 거지를 만나야겠어요. 안에 있죠?”

“아니, 야! 잠깐만! 안에!”

거지가 뒤늦게 만류했지만 신생은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신생의 두 눈이 놀란 토끼처럼 크게 떠졌다.

* * *

“……신생? 네가 왜 여기에―.”

내 친모인 줄 알았던 여인과 그녀가 낳은 아이, 그러니까 둘째 형님의 아이, 그리고 홍령과 이름이 같은 이가 내가 태어났다는 날, 죽어 묻혔다.

어쩌면, 혹시 모를 가능성에 나도 홍령도 말을 잊고 있었던 사이 밖에서 작은 소란이 있고 문이 활짝 열렸다.

“김진 소협, 다시 뵙습니다. 헌데 무슨 일 있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왜인지 신생과 함께 들어온 현건이 내 안부를 물었다. 신생도 서둘러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 좀 주세요. 어디 안 좋으신 거 같아요.”

“……뭐냐,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정보를 사러 왔어요. 스승님 정보요. 항주로 오셨거든요. 마침 잘됐다. 사부님 계시니까 정보는 빨리 찾겠네요. 근데 이분 맥 좀 짚어보고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 같아요.”

신생은 걸왕의 물음에는 대충 답해주고는 내 손을 뺏다시피 잡아끌어 맥을 짚었다. 배에서는 마냥 아이 같았는데, 그 잠깐 사이에 어엿한 의원의 얼굴을 하곤 집중해서 맥을 찾았다.

“심기가 많이 흐트러졌어요. 침을 놔줄게요. 침 맞으면 빨리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신생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제자가 얼마나 침을 잘 놓는지 확인할 정신은 없었지만, 확실히 침을 맞자 정신적인 충격이 빠르게 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알게 된 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됐어요. 한 식경 정도 앉아서 쉬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뭐야, 네놈 둘은 또 어떻게 아는 사이냐?”

“그런 게 있어요. 김진 공자, 볼일 끝난 거면 내가 일 봐도 되죠?”

“그래.”

나는 신생의 머리를 힘없이 헤집어주곤 적당히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신생의 말대로 휴식을 좀 하고 이동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이동을 해? 어디로?

……진실을 확인해야겠지.

내 친부모님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 금왕과 나의 진짜 관계에 대해.

답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가야겠지.

순순히 답을 해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보다 많은 근거를 갖고 얘기하면 뭐라도 답이 나오겠지.

당장 움직일 정신은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앉아 휴식도 취할 겸 신생과 도개걸의 대화를 들었다. 한숨 돌리고 나자 두 사람 간에 무슨 일이 생길까 조금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랬기에 신생이 왜 여길 찾아왔는지 궁금해졌고.

“스승님을 찾으러 왔어요. 항주로 향했다는 얘긴 들었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어서요.”

“나 참, 이 배은망덕한 자식 좀 봐라. 사부를 버리고 스승을 새로 들이더니 이젠 그 스승을 찾겠다고 옛 사부를 뻔뻔하게 찾아와?”

“그래서 안 해주실 거예요?”

“싫다, 이놈아. 네놈이 뭐가 이쁘다고.”

“이쁘진 않으시겠지만, 전 이제 의원인데요.”

“그게 뭐?”

“의원이라고요. 저기 널려 있는, 금단증세에 시달리는 거지들을 고쳐줄 수 있다고요.”

“의술로 정보 값을 내겠다?”

신생은 도개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당당한 의원이었다. 역시, 그 배에 혼자 두고 내린 게 정답이었다.

“……됐다. 고작해야 일 년 배운 실력으로 무슨. 내가 그깟 의원 하나 없어서 이 고생을 하는 줄 아냐. 그 정도는 그냥 알려주마.”

“그냥이 어딨어요. 저 이제 거지 아니에요. 공짜로 안 받는다고요.”

“딱히 받을 만한 정보가 아니라 그런다. 네놈 스승, 금태양 그거 여기 안 왔다.”

“네? 그럴 리가 없는데,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죠?”

“진짜 안 왔다니까. 나도 그 녀석 행방은 쭉 주시하고 있는데, 진짜 안 왔다.”

“말도 안 돼. 스승님이 항주에 없다고요?”

아닌데.

나 여기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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