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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17화 (217/350)

217화

거지는 약 봉지를 뜯어 맛을 보더니, 상질의 금창약인 것을 확인하곤 희희낙락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점점 더 허름하고 거지가 많아지는 길목으로 들어서다가 최후에 도착한 곳은…….

[객잔이네요?]

그러게. 굴다리가 아니네.

많이 낡긴 했지만 그래도 5층 규모의 객잔이었다. 진짜 영업을 하는 거 같진 않았지만, 일단 낡아빠진 객잔 현판이 걸려 있었으니까. 거리의 몇몇 거지들, 정말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거지들이 비틀대며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그나마 때깔이 좋아 보이는 거지들이 거대한 철과를 늘어놓고 거지들에게 멀건 죽을 나눠주고 있었다. 소림의 반야원에서 빈민들을 위해 무료 배식을 해주던 풍경과 흡사했다.

내가 생각하던 개방 본타의 풍경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나 그 안에 내게 익숙한, 그리고 예상했던 것도 하나 있긴 했다.

“어, 방주! 어서 오십쇼! 언제 오신 겁니까요?”

개방 방주 도개걸. 정반합, 그리고 신생과의 일로 나와 여러모로 인연이 있는 그가 있었다.

“아까 왔다. 뒤에 그건 뭐냐?”

“정보가 좀 필요하답디다.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나를 데려온 거지가 굽신대며 나를 안으로 이끌려 했다. 그러나 나는 자리에 우뚝 선 채 도개걸을 바라보았다.

“아니, 난 그쪽하고 얘기하겠어.”

“아하? 아야, 너 뭔 화상을 데려온 거냐?”

어처구니없어하는 도개걸은 아랑곳 않고, 나는 품에서 봉지 한 줌을 더 꺼냈다.

“양기가 부족할 때 쓰는 가감내고환 스무 알, 경련에 쓰는 개관산, 체기가 심할 때 복용하는 목향균기산, 설사를 멎게 하는 사역산 각각 세 봉씩, 그리고 금창약 다섯 봉지.”

내가 갖고 다니던 상비약들. 봇짐에는 더 많은 약이 있지만 당장 들고 다니는 것은 이 정도였다. 허나 이것만으로도, 이곳에선 천금에 준하는 가치가 있었다.

당장 배식을 받던 거지들이며 객잔에 들어가던 자들까지 고개를 홱 돌려 내 손에 들린 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원한다면 더 주지. 이거면 개방의 방주에게서 정보를 살 수 있나?”

“안 그래도 머리 아파죽겠는데 웬 어린 것이…… 하, 그래. 머리나 식힐 겸 네놈 얘기나 들어보자. 야, 이놈은 내가 맡으마. 들어가자.”

도개걸의 성격상 꼬투리를 잡아도 두세 번은 더 잡을 줄 알았는데. 저쪽도 무슨 일이 있나?

나도 머리 아픈 판에 쓸데없는 드잡이질을 할 필요 없다는 건 좋았다.

도개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안은 그야말로 거지소굴이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거지뿐이었는데, 그 거지들 사이에도 차등이 있었다. 밖에서 배급을 하는 거지들처럼 그나마 때깔이 좋은 거지와 기력 없이 널브러져 있는 거지, 그리고 약을 한 듯 취해 있는 거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네요. 그렇게 마약을 팔아대는데 거지들이라고 약을 안 하겠어요? 더 싸구려에 질이 안 좋을 테니 고생들 좀 하겠네요.]

나는 그들에게 눈길을 줬다가 다시 도개걸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로 쓰는 방인지 여기저기 술병들이 늘어져 있었고 깔끔한 탁자 하나가 있었다. 도개걸은 앉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술병을 탁자 위에 척 올리더니 그대로 마개를 뜯어 입에 콸콸 부어댔다.

“크으― 하, 술 들어가니까 좀 낫군. 그래. 뭐가 궁금해 여기까지 온 게냐?”

“금가장의 금태양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그 새끼는 왜?”

“이유는 당신이 알 거 없고. 최근 행적은 필요 없어. 옛일을 알고 싶다. 예를 들자면 금태양이 태어났을 때 있었던 일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아.”

“그렇게 옛날 일을 어떻게 기억해? 그게 언제 적인데.”

“개방은 금가장을 적대시하지 않나? 적에 대한 정보라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챙겨놨을 텐데?”

하오문주는 내 정체를 알아냈지만 도개걸은 내가 금태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긴, 하오문주도 십이월들의 반응이라든가, 나를 콕 집어 조사를 했으니 알아낸 거였지. 그게 아니고서야.

“흥, 금가 자식새끼 그놈도 어디서 적을 많이 만들었나 보군. 하긴, 그 애비에 그 아들이지.”

그 말에 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이 이제는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어졌다.

“그 새끼가 태어날 즈음이면 이십여 년 전인데. 어디 보자……. 마침 적당한 인사가 하나 와 있지.”

도개걸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으로 가더니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윤모야!”

“왜 부르셔요?”

“이리 좀 와 봐라. 볼 일 있다.”

내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개방 무한지부장 윤모. 하긴, 무한지부장이면 무한에서 거지 생활을 오래 했을 테니 그 시절의 일을 알 법도 하군.

“금가에 의원질 하는 그놈, 태어날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작자가 왔다. 뭐 생각나는 거 없냐?”

“아니 그때가 언젠데 이제 와 생각나는 거 없냐 하시면―.”

“임마, 애새끼 태어난 거면 경사 아니냐, 경사. 그놈들이 뿌리는 밥 한 끼 얻어먹은 거 없어?”

“어? 잠시만요. 방주가 그러니까 뭔가 생각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 그때 자식새끼 태어났다 하는데 잔치 연다는 얘기가 없어서 무한 왕초랑 열심히 씹어댔던 기억도 나고.”

잔치가 없었다.

“그 전에 태어난 그거, 지금 무한에서 공방 하고 있는 고거 태어났을 때는 아주 잔치가 보통 잔치가 아니었거든요. 거지들도 석 달은 배곯을 걱정 안 하고 지냈지. 하나 더 태어났다기에 연달아 노났구나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아파 뒈지기 직전이라 그래서 그런갑다 했지.”

일곱째 누님, 금왕공방주 금간양이 태어났을 때는 그리 큰 잔치를 열었는데, 내게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곧 죽을 것처럼 약하게 태어나서?

아니면, 내가 아버지 아들이 아니라?

“아, 맞아. 잔치는 아니었는데, 그때 상이 하나 있긴 했더랬죠.”

“상?”

“시끄럽게 판을 벌이진 않았는데, 거지들한테는 와서 밥 먹고 극락왕생 좀 빌고 가라고 해서 몇 번 배 채우러 갔지. 삼십구재에 천도재까지 꼼꼼히 다 지내서 애새끼들 번갈아 다 델고 갔었는데.”

“그게 금가장이랑은 뭔 상관이야? 그때 금가에 뒈진 놈이 있던?”

“다들 쉬쉬하긴 했는데 우리야 잘 알지. 그 밥 하는 찬모며 재 지내는 땡중도 금가장에서 부르던 사람들인데. 금왕이 한 번씩 다녀갔다고도 하고. 그 뒤로 기제사도 챙겼을걸?”

“누구 제사였지?”

“하나는 관이 작았으니 애새끼였을 거고. 그것도 아주 갓난쟁이 말이야. 나머지 둘은 이름만 봐선 여자 같던데. 하나는 잘 기억이 안 나고, 하나는 그래도 기억이 나. 그 당시 이름난 여협 하고 이름이 같았거든.”

“이름난 여협?”

“화산의 자하신검 화홍령 말이야. 이름도 성도 흔하지 않아서, 그거 하나는 기억이 나네.”

* * *

시간을 조금 돌려서, 금태양이 하오문주를 만나고 있을 즈음.

신생과 현건은 항주성 앞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이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냐?”

“아니면 저기 정문으로 가서 은 백 냥을 내시든가요. 시가라 그때 그때 다르긴 한데, 또 모르죠. 쫌 강해 보이는 무림인은 깎아주기도 하거든요.”

“민간인, 그리고 관을 상대로 검을 뽑을 생각은 없다.”

“그리고 노잣돈도 넉넉지 않고요. 무당에서는 제자가 유람하러 가는데 그거 밖에 안 쥐여줘요? 돈도 많으면서.”

“유람이 아니래도.”

“어쨌든 당장 전낭이 가벼운 건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신생과 현건은 전날에 비해서는 제법 가까워졌다. 친하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이에다 신생이 의원으로서 큰 도움을 주니, 무당의 제자이지만 의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현건으로서는 고마운 존재였다. 거기에 자신의 신분도 가급적 감춰준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이런 거지굴을 기어서 통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금태양의 제자로만 알고 있던 어린 소년이 사실 개방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은 건 바로 이 거지굴 앞에 도착해서였다.

목적을 위해서는 항주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는 금왕의 유산이라는 불로불사의 약을 손에 넣기 위해 왔고, 그 약이 이곳에서 열리는 하오문 경매에 나올지도 모른단 얘기를 들은 게 어제였다.

정보를 얻자마자 발에 불이 날 듯 달려 도착했으니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었지만, 그 외에 상세한 정보는 하나도 아는 게 없어 안에 들어가 내용을 확인해봐야 했다.

“너무 힘드시면 숨은 좀 참으시고요. 저는 점혈로 후각을 막았어요. 익숙한 냄새긴 한데 그렇다고 맡기 좋은 냄새는 아니라서.”

“점혈로 후각을 막는다고?”

“네. 설마 못 하세요?”

“아니, 할 수는 있다. ……그런 방식으로 쓸 수 있다고 상상을 못 해봤을 뿐.”

현건이 서둘러 점혈로 후각을 막았다. 앞에서 기어가는 신생이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무림에 대한 경험이라면 현건이 훨씬 더 많을 터인데(사실 이 부분은 신생이 개방 방주의 제자임을 몰라서 하는 착각이었다), 이런 소소한 부분에 있어서는 저 어린 소년보다도 못하다니. 일전에 김진을 만났을 때처럼 또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통렬히 깨닫는 현건이었다.

현건이 그러한 깨달음을 얻거나 말거나, 신생은 알던 통로가 막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끼며 거지굴을 빠져나왔다.

“으, 더러워. 어디 옷 빨 곳부터 찾아야 하나.”

각종 오물이 쌓여 더럽기 짝이 없는 곳을 지나오느라 옷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사실 신생에게는 성문을 통과할 돈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넉넉히 있어서 자신의 몫뿐 아니라 현건의 것도 내어줄 수 있을 정도였다(물론 그렇다 해도 꽁으로 주진 않고 차용증을 쓰고 무당에서 받아냈을 거다. 현건과는 제법 가까워졌지만 그렇다고 무당에 대한 반감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 돈은 스승을 보고 오라며 챙겨준 여비다. 스승과 태양의원의 의원들, 그리고 모든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벌어들인 돈의 일부다. 그런 돈을 부정에 찌든 포쾌들에게 한 푼이라도 줄쏘냐!

그랬기에 선택한 성문 거지굴이었지만,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다.

전이라면 이 상태가 익숙했겠지만, 이제 신생은 거지 아이가 아니라 태양의원의 의원이다! 의원이라면 기본적으로 청결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 욕탕으로 씻으러 가고 싶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빨리 가요. 조금 있으면 저녁 구걸 하러 나갈 시간이라 본타의 거지들이 자리를 비울 거예요. 정보를 얻으려면 최대한 많은 거지가 있을 때 가야 한다고요.”

“알았다. 으윽.”

후각 점혈을 푼 현건이 그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서둘러 걷는 신생의 뒤를 따랐다. 신생은 현건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재차 당부했다.

“명심하세요. 당신이랑 같이 가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목적이 일치해서예요. 맞죠?”

“그래. 나는 경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고, 너는 그 경매에 간다는 네 스승의 정보가 필요하지.”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개방에 가야 하는데, 나는 개방의 정보를 이용할 수 있지만 조금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어요. 그때 절 도와주는 거 잊지 마세요.”

“아무렴. 그런 이해관계가 없었어도 나는 너를 도울 것이다. 너는 배의 선원들과 호위무사들을 밤낮 가리지 않고 치료한 협의의 의원이니까.”

“낯간지럽긴. 다 스승님한테 배운 거라고요.”

서로의 조건을 확인한 후 신생이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정황상 자신의 스승은 아버지의 유산을 손에 넣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제자인 자신이 함께 있어야 한다. 뭐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스승님, 제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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